독립영화가 비평을 만났을 때 
-<카페 느와르>를 통해 살펴본 독립영화의 현재



*관객기자단 [인디즈] 추병진 님의 글입니다.


프랑수아 트뤼포에 의하면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영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영화에 대한 사랑을 궁극적으로 실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평론가 정성일, 김소영(김정) 등이 트뤼포가 말한 세 번째 방법을 실천하면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증명해보였다.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2009)는 그 사랑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상업적 목적을 떠나 감독의 세계관이 온전히 담긴 이 영화는 여느 독립영화들과 확연히 다르다. 비평가이면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들의 영화는 과연 어떻게 다를까? 또 같은 독립영화의 범주에서 생각할 때, 이들의 영화는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까? 필자는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를 중심으로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펴보고 싶다.



<카페 느와르>는 일반 관객들에게 굉장히 낯선 방식으로 진행된다. 소설을 읽는 듯한 인물들의 대사는 구어체 대사에 익숙한 관객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유난히 호흡이 긴 쇼트들은 빠른 리듬으로 진행되는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을 힘들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중간에 느닷없이 영화 제목과 크레딧이 다시 등장하면서 2부가 시작되고, 컬러화면과 흑백화면이 불규칙적으로 뒤바뀌기도 한다. 또 의도적으로 180도 상상선을 어기기도 하고, 사실적인 극의 흐름에서 벗어난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열거한 요소들은 영화의 전형적인 관습에서 탈피한 새로운 실험이자 시도이면서, 동시에 정성일 감독이 영화에 대해서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정성일 감독이 21세기 영화의 새로운 화법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탐구하면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 데 반해,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은 오히려 관습적인 영화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 즉, 여러 독립영화들에서 보기 어려운 것은 영화의 화법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독립영화의 이러한 경향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매년 수많은 독립영화들이 제작되고, 그 중에서 ‘선택된’ 작품들만이 영화제에서 상영된다. 그리고 주요 부문에서 수상을 한 극소수의 작품들만이 영화관에서 상영될 기회를 가진다. 아쉽게도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작품들은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보다는 대중에게 익숙한 화법으로 전개되는 영화들이다. 영화관에 온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독립영화는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관객이 감상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재능 있는 독립영화 감독들이 선택하는 것은 영화의 새로운 화법이나 실험보다는 이미 익숙한 화법이나 장르의 컨벤션이다.

 

비평가 정성일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쇼트 단위로 낱낱이 파헤친다. 그는 영화의 가장 작은 단위인 ‘쇼트’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카페 느와르>에서는 정성일 감독의 어떤 결단이 담겨있는 쇼트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 영수가 다른 인물에게 손을 내미는 동작에서 영수의 손을 갑자기 클로즈업으로 보여줄 때, 또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에서 종로3가에 이르는 거리를 단 하나의 쇼트로 보여줄 때,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을 굳이 두 부분으로 쪼개지 않고 투샷으로 한 번에 찍을 때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영화라는 세상을 창조하는 영화감독의 결단이다. 이처럼 <카페 느와르>의 모든 쇼트들은 각자의 이유와 의미를 가지고 영화 속에 배치되어 있다. 또한 정성일 감독이 서울이라는 공간을 주로 광각렌즈를 통해 널찍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영화를 구성하는 쇼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독립영화 감독들은 쇼트의 구성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이때 정성일 감독은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묻는다. “이 쇼트는 왜 그렇게 찍었습니까?”, “이 쇼트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생각이나 태도는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쇼트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그 어떤 것을 취사선택하여 프레임 안에 담는 것이 바로 쇼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를 세심하게 보는 관객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개별적인 쇼트이다.    


수많은 독립영화들은 필연적으로 배급과 상영이라는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카페 느와르> 역시 이 문제를 피할 수 없었고, 관객들을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일 년에 한번 찾아오는 각종 영화제를 제외하면 독립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만큼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은 일반적으로 독립영화를 외면한다. 기존의 독립영화들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영화평론가들의 영화 역시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비평만큼이나 흥미로운 영화평론가 김소영(김정)의 장편영화 데뷔작 <경>(2009),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는 안타깝게도 많은 관객들과 만나지는 못했다. 아무리 비평이 훌륭하더라도, 또 영화를 만듦으로써 영화에 대한 사랑을 궁극적으로 실현하더라도 관객과의 성공적인 만남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 것인가? 이미 휘청거리는 배에 올라탄 ‘몰락한’ 비평과 ‘저예산’ 독립영화는 어떤 길을 모색해야 할까? 만약 비평과 독립영화가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조금 더 가까워진다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어떤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예를 들어, 독립영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열정 가득한 글이 대중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독립영화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관심도 증가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독립영화 감독들은 비평가들의 날선 비평을 통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자신의 영화를 한 단계 성장시킬 수 있다. 이와 반대의 위치에서, 비평은 새로운 독립영화들의 등장으로 인해 자극을 받고 더 긴장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촉각이 곤두 선 비평가들이 쓴 새로운 감각의 글은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비평의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독립영화와 비평의 진지한 만남은 한국영화계에 활기를 더할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실제로 <카페 느와르>가 다양한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또 <경>이 여러 가지 담론 속에서 이야기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새로운 활로가 필요하다. 언젠가 독립영화와 비평이 상생하는 미래를 꿈꾸며 이만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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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권현진 2015.10.08 20:5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학교에서 마침 영화이론에 대해 배우고 있어서 유익한 내용이 많네요^_^





<춘희막이>줄 관람평

차아름 | 굽은 등에 짊어진 모진 세월의 무게, 그럼에도 같이 가자.

심지원 | 얄궂은 시작, 애틋할 여생.

추병진 | 얄궂은 운명 속에서 피어난 세월의 우정

김가영 | 그들만의 소소하고도 특별한 이야기





<춘희막이>리뷰

<춘희막이> : 그들만의 소소하고도 특별한 이야기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가영 님의 글입니다.



여기 신기한 관계의 두 사람이 있다. 본처인 ‘최막이 할머니’와 이 집에 씨받이로 들어와 지금까지 막이 할머니와 한 지붕 밑에 살고 있는 ‘김춘희 할머니’. 막이 할머니가 태풍과 홍역으로 두 아들을 잃게 된 후 씨받이로 데려온 춘희 할머니는 원래대로라면 아들을 낳고 본가로 되돌아가야 했으나 막이 할머니와 46년 간 같이 살림을 하게 되었다. 둘은 본처와 후처라는 관계로 묶여있지만, 서로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 있어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6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해 온 만큼, 두 할머니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영화 속에서 서로 말려 올라간 옷을 내려주고,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주고, 아픈 배를 손으로 쓸어주는 소소한 일상들을 통해 우리는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조용히 관찰할 수 있다. 이렇듯 <춘희막이>는 중심이 되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는 점에 있어서 <워낭소리>(2008)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와 결을 다르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본처인 막이 할머니는 춘희 할머니에게 매번 핀잔을 주고 때로는 모진 말을 서슴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춘희 할머니를 걱정하고 아껴주는 존재이다. 또한, 이런 막이 할머니가 아무리 모질게 대해도 항상 허허 웃으며 넘겨버리는 춘희 할머니에게 막이 할머니는 친구이자 어머니이자 인생의 동반자와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막이 할머니가 며칠 집을 비우는 날에는 하루 종일 기다리며 눈물까지 보이는 춘희 할머니의 모습은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의 씨받이라는 문화에 대해 생각해봄과 동시에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영화 <춘희막이>는 많은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 주변에 있지만,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에 불과한 것들을 남들에게는 특별한 무언가로 다가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다큐멘터리의 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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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과 연대의 기록 <스와니-1989 아세아스와니 원정투쟁의 기록> 

인디토크(GV) 기록


일시: 2015년 9월 30일(수) 오후 8

참석: 주현숙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관객기자단 [인디즈] 추병진 님의 글입니다.


<스와니-1989 아세아스와니 원정투쟁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원정투쟁을 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나 일본 땅에서 투쟁을 시작한 소수의 한국인들과 다수의 일본인들이 함께한 투쟁의 기록이다. 최근 <위로공단>에서 보았던 익숙한 이미지, 소리들이 다시 생생하게 재생되는 느낌이 들면서, 영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주현숙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이하 주): 이 작품은 올해 3월 말에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처음 상영을 했고, 제가 굉장히 보여드리고 싶은 작품 중 하나였어요. 과거에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 함께 참여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유가 이 작품에 나오는 투쟁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그 이후로도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인) 익산에서는 일본 측과 계속 교류가 있었다고 해요. 점점 교류가 많아지니까 이것을 어떻게든 영화로 남겨야겠다 싶어서 오두희 감독님이 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막상 감독님은 편집을 끝내지 못하고 잠시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거예요. (웃음) 결국 감독님 주변의 다른 분들이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편집을 도와주었고, 이 작품은 그렇게 완성될 수 있었어요. 이 다큐멘터리가 ‘연대’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이 작품을 둘러싼 연대 에너지가 사람들 마음속의 무언가를 불러일으켜서 결국 완성할 수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하워드 진(Howard Zinn)이라는 사람이 했던 말을 찾아봤어요. 하워드 진은 미국의 민중사를 기록한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인데, 이 분은 아주 작은 투쟁의 승리도 민중의 승리라고 명확하게 기록을 해요. 저도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기록할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성취를 했고, 또 어떤 것은 성취하지 못했는가를 정확하게 기록을 하지 않으면 주류에 의해서 역사가 왜곡당하기 쉽다고 생각해요. 마침 제가 유튜브에서 본 영상이 있는데, 어떤 대학원생이 2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석학들을 인터뷰 했더라고요. 그 중에 하워드 진의 인터뷰가 있는데, 이 학생이 “젊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어요. 그 대답은 “사회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펼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고 풍성해질 수 있다. 그것이 세계를 위해서도 좋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다. 함께 참여하고 세계 안에 포함되려고 노력하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이상을 가지고 행동하고, 만일 그것이 당장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마라. 오히려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이 더 확장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을 생각하고 영화를 보니 이 작품에 나오는 젊은 여성들도 그렇지만, 투쟁에 참여했던 평범한 일본인들이 유독 눈에 띄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내던질 정도의 어떤 선택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느낌일까, 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당연히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관객: 영화 속에서 조합원과의 인터뷰 중에 공장에 노조가 생기면서 사측과 교섭 회의에 들어갔다고 하잖아요? 십대 후반 정도 되는 젊은 친구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하고 의논하면서 요구사항을 만든 다음 교섭 회의에 참여했다고 하고요.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정말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 같아요. 노조라는 것이 그저 해고를 막거나 임금을 인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너와 나의 요구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모아서 무언가를 만들고 현실로 이루어낸다는 점. 그런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정말 좋았어요.


주: 이제 막 다큐멘터리 작품을 시작한 어떤 감독이 있는데, 그분이 만든 작품은 모 기업의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예요. 노동조합이 탄생하기 전에는 직원들이 해고되는 경우, 또 하청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작년에 불법 고용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면서 그분들이 노조로 인정을 받았어요. 결과적으로 월급도 적어지고 생활하기도 힘들지만 그 이후로 그분들이 오히려 기뻐한다고 해요. 자존감을 얻었다, 노조가 좋다, 그런 얘기도 하시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함께 목소리를 내는 힘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 중에 한 분은 “그때 조합원들이 없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이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피칭을 했는데, 제가 대본을 보니까 ‘첫 걸음마, 첫 입학, 첫 사랑처럼 설레게 하는 것이 첫 노동조합인 것 같다’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이런 감수성이 낯 뜨거운 것과는 다른 느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그분들처럼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또 물질적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보다는 자존감과 선택에 대한 당당함이 중요한 것 같아요.


관객: 예전 구로동맹파업을 담은 푸티지가 지금은 거의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현재를 다룬 기록들이 과연 30, 40년 후에도 많이 남아있을까 싶어요. 요즘엔 노트 필기도 하지 않고 대부분 컴퓨터 파일로 저장을 하니까요. 예전에 기록한 다이어리는 책장에서 빼서 보면 쉬운데, 어딘가에 저장해둔 파일은 찾기가 어려워요. 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찍은 6mm 테이프는 집에 있는데, 최근 10년 동안 찍은 사진들은 핸드폰 이외에는 저장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주: 실제로 다큐멘터리가 산업화되면서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다는 젊은 친구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집회나 시위 현장에는 잘 안가요. 예전에는 집회에 가보면 작은 카메라들도 많이 있었는데, 요즘엔 거의 볼 수가 없어요. 어떤 긴급한 현장을 기록해달라는 연락이 오면 막상 현장에서 촬영할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요. 사실 그런 현장은 가던 사람이 잘 알거든요.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것을 촬영하거나 기록한 다음에 잘 보관하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그것보다 실제 현장을 기록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에요.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할은 주요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것을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담아내는 것인데, 그런 중요한 역할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는 새로운 감독들에게 현장에 자주 가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네요.(웃음)



노조, 집회, 투쟁이라는 낯선 단어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보고 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주현숙 집행위원의 말처럼 어떤 이들은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현장의 결과물을 가지고 편집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편집의 결과물을 보고 어떤 생각과 감정을 발전시킬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다. 이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낯선 단어들이 내면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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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극장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인디플러그 <족구왕>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bit.ly/1MIBdZ2





<족구왕> : 이왕 한 번 사는 거,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삽시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가영 님의 글입니다.


군 제대 후 복학생의 신분으로 학교생활을 하게 된 홍만섭(안재홍 분). 부푼 가슴을 안고 학교에 왔으나 그를 맞이하는 것은 사라진 족구장과 군 복무 기간 동안 연체 된 학자금 대출 이자, 그리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기숙사 룸메이트들이다. 정해놓은 꿈도 없고, 토익 점수도 없지만, 그에게는 복학생으로서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족구’와 ‘연애’.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는 만섭을 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기숙사 룸메이트 형국(박호산 분)은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며 다그치면서도 그의 대담한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을 되돌아 본다. 만섭은 사라진 족구장을 다시 되찾기 위해 힘쓰는 한편, 만인의 연인인 학교 표지모델 안나(황승언 분)를 사이에 두고 전직 축구선수 강민(정우식 분)과 삼각구도를 만들게 된다.



영화 속 인물은 크게 만섭과 형국, 그리고 강민 세 명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 만섭은 대한민국 복학생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 후 의욕 충만 상태로 학교로 돌아왔으나 캠퍼스, 사람들, 현실, 그 모든 것들은 낯설기만 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지만, 만섭은 그러한 낯선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직접 부딪히고 저지른다. 이는 그가 복학생이기에 가능한 행동들이자, 모든 복학생들이 꿈꾸는 자신만만한 삶이다.



주인공 만섭이 이후에 어떻게 살아갔을 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 속 복학생들의 경우 해를 거듭할수록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자신만만함은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점점 그 본래의 색을 잃게 되고, 만섭의 룸메이트인 형국과 같은 캐릭터로 변하게 된다. 만섭이 대한민국 복학생의 표본이라고 한다면, 형국은 대한민국 고학번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졸업할 때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에 남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형국의 모습은 특별하지도, 어색하지도 않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인 만섭보다 형국이라는 캐릭터가 우리 대학생의 현실을 더 잘 반영한 캐릭터라고 해도 무방할 것 이다. 



만섭의 라이벌 강민은 만섭과 다르게 얼굴도 몸매도 훤칠하지만 현실에서는 무엇 하나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지 못하는 겁쟁이다. 그리고 그런 강민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안나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주인공 만섭이다. 만섭이 자신만만한 복학생이고, 형국이 냉철한 현실주의 고학번 선배라면, 강민은 만섭처럼 열정적이지도, 형국처럼 현실적이지도 못한 무기력한 대학생을 상징한다. 그는 우리시대의 목표도 열정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대학생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그 무기력함 속에도 본능적인 열정이 숨어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누구의 삶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청춘에게는 각각의 삶이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대학생의 대표적인 3부류를 각각의 인물들에 투영함으로써 우리에게 뻔하지만 항상 결여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 있어서 영화 <족구왕>은 대학생들을 위한 성장영화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뻔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영화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자신감을 얻고 잠시나마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우리 모두 영화 속 만섭의 대사처럼, ‘남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좋아하는 것을 숨기고 살지 말고 병신 같아도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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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줄 관람평

차아름 | 같은 상황의 반복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말과 태도의 미묘한 차이

심지원 | 태도의 차이가 빚어낸 해학적 순간

추병진 | 종착역이 다른 순환선. 긴 호흡 속의 미묘한 변화들.

김가영 | ‘우리의 삶의 표면에 숨겨진 것들의 발견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리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태도의 차이가 빚어낸 해학적 순간


*관객기자단 [인디즈] 심지원 님의 글입니다.



감독 홍상수의 영화인생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데뷔 이래로 매년 한 작품 이상씩 성실하게 영화를 만들어 온 그의 최근 행적에서 급물살을 타는 노련한 사공의 모습을 본다. 일 년에 한 편 그의 영화가 대중들에게 공개될 때마다, 그의 마니아층의 신뢰는 겹겹이 쌓여왔으며, 각종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외신의 찬사 역시 끊이질 않았다. 이번 신작 역시 그간의 것을 갱신하며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시공간을 영화적 장치로 영민하게 활용할 줄 아는 홍상수식 유머, 이번에는 ‘수원’ 그리고 ‘지금’과 ‘그때’다.



예정된 특강 날짜 보다 하루 먼저 수원에 도착한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 분)는 행궁을 산책하던 중, 화가 윤희정(김민희 분)을 만난다. 처음 윤희정을 본 순간부터 호감을 느낀 그는 그녀를 따라 커피숍, 작업실, 일식당 등 근방을 전전한다.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시공간의 이동은 이로써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핵심은 이 영화가 크게 1부와 2부라는 두 가지 경우의 수로 나뉜다는 것에 있다. 둘의 시작은 같으나, 끝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1부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에서 함춘수는 윤희정의 말에 긍정적인 감탄사와 함께 맞장구를 치는 것은 기본, 작업실에서 마주한 그녀의 그림에 관해서도 칭찬일색이다. 그는 윤희정과 함께 하는 내내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알 것 같아요’와 같은 말들로 동조의 뜻을 강력히 내비친다.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 함춘수로 인해 윤희정은 ‘이 남자가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구나’라는 달콤한 착각에 빠진다. 달콤한 만큼 마음을 일찍 열고, 또 그 만큼 쉽게 상처 받는다. 



이와 달리 2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함춘수는 감정 표현에 있어 직설적이다. 그가 윤희정에게 하는 말들은 무조건적인 감언이설보다 현상에 대한 솔직한 지적이 주를 이룬다. 예컨대 그는 윤희정의 그림에 대해서도 ‘상투적인 것으로 자기 위안을 얻으려는 작품’이니 ‘좀 더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혹평을 아끼지 않는다. 다소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그의 솔직함은, 1부에서는 들리지 않았던 고백을 통해 더욱 거침이 없어진다. ‘사랑합니다. 결혼하고 싶어요.’ 이어지는 부끄러움과 난처함은 보는 이들의 몫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버릇처럼 환경을 탓한다. 문제 상황이 생긴 이유는 우리가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그런 사람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곤 한다. 그러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1부와 2부를 구분 짓는 결정적 요인은 다름 아닌 주인공 함춘수의 ‘태도’다. 그가 태도를 달리하는 순간, 변화하는 것은 비단 본인만이 아니다. 첫째로 그가 추구하는 바인 동시에 상호작용하는 대상이었던 윤희정의 태도가 가장 가시적인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의 공기가 달라지며, 이는 곧 전혀 다른 두 가지 양상으로 귀결된다. 사소한 판단이 작용과 반작용을 반복할 때, 미세한 차이는 커다란 영향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렇듯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는 사소한 태도의 변화들이 모여 큰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홍상수는 노련한 두 배우를 통해 이에 대해 분명한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린 지’ 비교적 명확한 답을 내린 듯하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순간순간 일구어내는 소소한 깨달음 같은 것일 테다. 판단을 달리하는 것도 우리의 몫, 이를 통해 삶의 매 순간을 호흡해 나가는 것도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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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상수의 남자들 - 홍상수 영화 주연 배우 4인방 탐구 
-배우 김상경, 유준상, 이선균, 정재영



*관객기자단 [인디즈] 차아름, 심지원 님의 글입니다.


지난 9월 24일 홍상수 감독의 17번째 장편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개봉했다. 이번 작품으로 정재영은 <우리 선희>(2013)에 이어 홍상수 감독과 두 번째 호흡을 맞추었다. 이에 정재영이 그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처럼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자주 출연하는 배우들이 있다. 특히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고 일컬어지는 ‘찌질한 남자’를 연기한 배우들은 실제 그들의 성격이 그렇지 않을까 의심이 될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김상경과 유준상, 이선균, 그리고 최근 정재영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이른바 ‘홍상수의 남자들’로 손꼽을 수 있다. 여러 홍상수의 영화를 통해 특유의 찌질함을 선보였던 네 배우의 작품과 작품 속 그들의 연기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1. 뻔뻔하게 유쾌한 남자 김상경


홍상수 감독의 초기 영화부터 페르소나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배우가 바로 김상경이다. <생활의 발견>(2002)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극장전>(2005), <하하하>(2010)를 통해 호흡을 맞춘 바 있다. 김상경 이후 숱한 배우들이 ‘홍상수의 남자들’로 이름을 알려왔지만, 그 중에서 홍상수의 언어를 이토록 뻔뻔하면서도 유쾌하게 표현해내는 배우는 전무후무 김상경이 유일하다.


(▲ <하하하>의 '문경'역 김상경)


<생활의 발견>의 경수, <극장전>의 동수 그리고 <하하하>의 문경. 이름조차 비슷한 세 인물모두 배우 김상경이 분했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연극판에서 영화로 진출한 배우다.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경수의 모습에서 뻔뻔함과 순진함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발견할 수 있다. 무작정 떠난 여행길에 마주한 두 여자 명숙(예지원 분)와 선영(추상미 분)을 향해 은근하게 드러내는 욕망과 합리화가 그 근거다. ‘우리 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이 되지 말자’는 영화 속 대사처럼, 김상경의 경수는 다소 불편하고 어색한 이야기들이 먼 타인의 것이 아니라, 실은 피부로 느낄 만큼 근접한 것임을 인지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극장전>도 마찬가지다. 현실과 허상이 모호하게 변주되고 있는 이 영화에서, 10년 동안 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하고 있는 반(半) 백수 동수 역시 찌질한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극에서는 ‘죽고 싶다’는 말을 그토록 반복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살고 싶었던 한 남자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김상경 식 해석이 이 영화의 최대 관전 포인트라 하겠다.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하하하> 속 문경은 비교적 호쾌하고 솔직하지만, 특유의 후안무치는 여전하다. 문경은 통영에서 우연히 만난 성옥(문소리 분)에게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순정이라는 이름 아래 강력히 호소한다. 적당히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적당히 뻔뻔할 줄 아는 문경은 그 어느 때보다 김상경이라는 배우에게 잘 어울리는 옷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뻔뻔하면서도 공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도맡아 해 온 배우 김상경이 있었기에, 홍상수식 유머 코드는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2. 진지한데 웃긴 남자 유준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을 시작으로 유준상은 <하하하>, <북촌방향>(2011), <다른 나라에서>(2012), 단편 <리스트>(2011)등 홍상수 감독의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특히 <하하하>,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 는 칸 영화제에 3년 연속 초청되며 그가 명실공히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것을 입증했다. 


(▲ <다른 나라에서>의 '안전요원'역 유준상)


유준상은 특유의 말투를 가지고 있다. 꾹꾹 눌러 말하는 듯 진중하면서도 어딘가 코믹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의 이런 점은 관객에게 기분 좋은 웃음을 남긴다. 여전히 구차하고 찌질하지만 진지하고 서글서글한 그의 캐릭터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처음 주연을 맡은 <하하하>에서 그는 극중 가장 유쾌하지만 우울증에 걸려 약을 달고 사는 괴짜 같은 캐릭터다. 극중 불륜관계에 있는 연주(예지원 분)를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만취상태로 큰아버지에게 생떼를 쓰며 연주를 소개하는 대책 없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런 천연덕스럽고 비논리적인 모습들이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북촌방향>은 선배를 보러 서울에 온 영화감독 성준의 일정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는 비슷하게 반복되는 상황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고 실수를 되풀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다짐하는 모습이 한없이 구차하고, 그런 모습들로 반복적인 유머를 이끌어낸다. <다른 나라에서>의 유준상은 어쩐지 귀엽다.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서글서글한 그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이 영화에서 그는 단순한 배우 역할만 하지 않았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말했듯이 바닷가 배경에 쓰일 텐트를 준비하고 우연히 챙긴 랜턴이 영화의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됐다. 또한 즉석에서 ‘안느송’을 작곡하기도 하며 그는 점차 배우 그 이상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유준상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얼마 전 개봉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도 적은 분량이지만 꾸준히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등장한다. 이를 통해 그가 감독에게 얼마나 신뢰가 쌓인 배우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3. 버럭 하는 뻔뻔한 남자 이선균


<밤과 낮>(2008), <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 <우리 선희>까지. 우리는 홍상수 감독의 다섯 작품에서 이선균을 볼 수 있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남자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찌질하고 뻔뻔한 남자로 주로 그려진다. 


(▲ <옥희의 영화>의 '진구'역 이선균)


특히 그는 짜증 연기의 1인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버럭 하는 모습이 압권이다. <옥희의 영화>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주문 외울날’에서의 그는 아내에게는 핀잔을 듣지만 감독으로서의 허세를 가진 인물이다. 상대를 은근히 무시하기도 하고 애매한 말들도 학생을 훈계하며 버럭 화를 내버린다. 또 송교수(문성근 분)의 비리를 캐묻지만 자신 역시 곤란한 상황에 빠지자 짜증 섞인 대응을 하는 인물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의 그도 뻔뻔하기 그지없다. 해원(정은채 분)과 불륜관계이지만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구차하게 설명을 하고 교수로서의 지위도 잃고 싶지 않아한다. 그러나 해원의 옛 남자 얘기에 화를 내며 욕하고 심지어 혼자 울기까지 한다. 반면 때로는 어딘가 애틋하고 짠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옥희의 영화>의 ‘키스왕’에서 진구는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만날래? 만나줄래?”, “나 니가 너무 좋아.” 와 같은 말들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을 뱉는다. 다른 친구들에게 또라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진구의 그런 모습이 너무도 간절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우리 선희>에서의 문수도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선희(정유미 분)가 아직 자신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다고 착각하며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문수를 연기한다. 다른 두 남자 주인공 역시 선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쩐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문수가 세 주인공 중에 가장 불쌍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이선균은 욱하고 짜증 많은 전형적인 찌질함을 보이지만 뭔가 애처로운 캐릭터로 등장하여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있다.   




4. 비범하게 친숙한 남자 정재영


‘홍상수의 남자들’ 가운데 최신의 계보를 잇고 있는 배우가 바로 정재영이다. 그는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통해 대중들에게 꾸준히 얼굴을 비추고 있다. 이러한 꾸준함 덕분이었을까. 그는 우리 주변에 꼭 하나 있을 법한 그런 모습으로 어디서나 존재감을 발한다. 물론 홍상수 영화에서도 그 친숙함은 예외가 없다. 


(▲ <우리 선희>의 '재학'역 정재영)


두 사람의 첫 호흡이 이루어졌던 작품은 <우리 선희>다. 정재영은 선희(정유미 분)를 둘러싼 세 남자 중 선배 재학을 연기한다. ‘뭐든지 깊게 파고, 또 파봐야 안다’는 문수(이선균 분)의 말에는 그저 타박만 늘어놓던 재학이, 다른 시간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선희에게 흑심을 내비치는 술집 신은 단연 이 영화 최고의 순간 중 하나다. 이선균의 문수가 ‘애걸복걸’하고, 김상중의 최 교수가 ‘천진난만’하다면, 재학의 시작은 제법 ‘능수능란’하다. 그러나 결국엔 문수와 최 교수를 능가하는 애걸복걸함과 천진난만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배우 정재영이 성공적으로 끌어낸 재학의 찌질함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첫 신에서 행궁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재영의 익숙한 뒷모습과 구겨진 점퍼는 왠지 모를 친근함을 불러일으킨다. 특강일 보다 하루 일찍 수원에 도착한 영화 감독 함춘수(정재영 분)는 행궁 산책 중 만나게 된 화가 희정(김민희 분)에 반한다. 그 후 그녀를 따라다니는 함춘수의 모습이 두 가지 경우의 수로 구성되어 영화의 1부와 2부가 된다. 각 부에서 그가 희정에게 취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1부의 함춘수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말로 희정을 꾀어내는 것에 비해, 2부의 그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다. 태도의 차이가 결과의 차이 또한 만들어낸 것이 자명하나, 결국 인물이 가진 성급함과 친숙함이라는 본질은 같으며, 그것이 인물의 가장 큰 매력인 동시에 배우 정재영의 매력이기도 하다. 정재영은 실제 모 인터뷰에서 스스로 함춘수와 굉장히 닮아 있어, 애써 연기하려 노력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루어진 캐릭터 분석이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수상의 쾌거를 안겨주었던 것은 아닐까.



김상경, 유준상, 이선균 그리고 정재영까지. 앞서 살펴 본 네 명의 배우들은 각기 각색의 독특한 캐릭터 형성을 통해, 홍상수 영화를 관통하는 ‘찌질함’이란 키워드를 실현해왔다. 배우는 감독의 페르소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만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 감독 못지 않은 존재감을 발하는 것이 숙명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고 꾸준했기에, 위 네 명의 배우들은 비단 ‘홍상수의 남자들’에 그치지 않고 ‘홍상수가 사랑하고, 두 번 이상 찾아간 남자들’로 거듭날 수 있었으리라.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행보를 기대하는 동시에 응원한다. 더불어 새로이 홍상수를 사로잡을 배우가 멋진 작품으로 나타나, 그 계보를 이어가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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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극장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인디플러그 <사이비>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bit.ly/1MtqAJn





<사이비> : 믿음이라는 파국


*관객기자단 [인디즈] 추병진 님의 글입니다.


사이비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 또는 그런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 단어에 ‘종교’를 붙이면 익숙한 이미지들이 떠오르곤 한다. 폐쇄적인 공간, 옹기종기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 열변을 토하는 지도자, 신비스러운 약 등. 이 종교 집단은 일반적인 종교의 교리를 빌리고 있으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절박한 심정으로 종교에 빠져든 신도들은 거의 광적인 수준으로 종교에 헌신한다. 이들의 믿음은 절대적이며 어떠한 의심도 끼어들 틈이 없다. <사이비>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이러한 집단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수몰예정지역으로 거의 폐허가 된 마을에 세워진 작은 교회.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며 한줄기 희망을 기원한다. 이 교회의 장로는 젊은 목사를 내세워 믿음을 설파하며, 사람들에게 몸을 낫게 한다는 약을 팔고 새 기도원을 세울 돈을 모금한다. 한편, 술집에서 난동을 피워 경찰서에 끌려간 ‘민철’은 우연히 장로의 정체를 알게 된다. ‘영선’은 자신의 대학 등록금을 탕진한 민철을 원망하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복수심에 가득 찬 민철은 경찰을 불러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장로의 정체를 추궁하기에 이른다. 



<사이비>는 주요 인물인 장로, 목사, 민철 그리고 그의 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시점을  따라가면서 진행되는 영화이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영화 속의 인물들은 하나 둘씩 망가지기 시작한다. 홀로 교회의 이면을 파헤치는 민철은 물론이고, 정체를 숨기는 장로와 순진한 목사 역시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도 마을 사람들은 맹목적인 믿음에 빠져들며 무기력한 기도를 반복한다. 결국 시작과 함께 내리막길로 들어선 이들의 이야기는 가속도가 붙으면서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인물들의 표정이다. 우리는 선한 인상 속에 숨겨진 인물들의 어두운 민낯을 볼 수 있다. 시종일관 온화하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생기면서 표정이 잔뜩 일그러질 때, 우리는 실사영화와는 다른 느낌의 ‘생생한’ 분노를 보게 된다.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배우의 표정을 보듯이 느껴지는 강한 정서는 연상호 감독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사이비> 속의 인물들은 위선과 욕망으로 물든 세상에서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방향을 잃는다. 그 속에서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개념은 점점 흐릿해지고, 때로는 이 두 가지가 겹쳐지기도 한다. 헛된 믿음에서 시작된 욕망은 폭력을 일으키거나 죽음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처럼 믿음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지만, 어떤 믿음을 가지는가에 따라 그것의 결과는 다르다. 결국 <사이비>는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떤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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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맞이 가족특선영화 - 송편처럼 꺼내먹어요! 
-<춘희막이>, <워낭소리>, <학교 가는 길>, <반짝이는 박수 소리>, <민우씨 오는 날>, <할매꽃>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수빈, 김가영 님의 글입니다.


추석 연휴가 성큼 다가왔다. 때맞춰 가족 관객들을 겨냥하는 ‘대작’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여기, 대작의 스케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깊은 울림을 전하는, 소소한 ‘소작’ 영화들이 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답게 가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영화들을 모아봤다. 흔히 생각하는 가족의 틀을 깨며 가족을 새롭게 정의하는 영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소수자 가정의 일상을 다룬 영화, 현대사의 비극이 투영된 가족에 관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을 통해 가족이라는 넉넉한 품이 지닌 힘과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이다. 총 여섯 작품 중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편이 다큐멘터리 장르이다. 일상을 그대로 담는 것이 가장 영화에 가까운지, 가족이 주제가 되는 독립영화엔 유달리 다큐멘터리가 많았다. 흥미로운 남의 집 이야기를 들으러 가볼까.



1. 가족의 새로운 정의


1) <춘희막이>

박혁지 / 2015 / 다큐멘터리 / 96분 / 12세관람가


막이 할머니와 춘희 할머니는 외진 산골마을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족’이다. 하지만 둘은 엄마와 딸도, 피를 나눈 언니와 동생도, 시누와 올케 사이도 아니다. ‘한 영감의 두 마누라’일 뿐. 두 할머니가 본처와 후처로 한집살림을 시작하고 10년 후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 후로도 할머니들은 35년을 그 곳에서 함께 살아왔다. 대장부 스타일의 막이 할머니는 춘희 할머니만 보면 구박하기 일쑤다. 하지만 로션을 곱게 발라주고 생선살을 발라 밥 위에 얹어주는 등 곁에서 항상 춘희 할머니를 세심히 챙긴다. 춘희 할머니는 늘 막이 할머니 눈치를 본다. 그러나 얼굴이 안 보이면 보고 싶다고 울면서까지 막이 할머니를 찾는다. 얄궂은 운명으로 만난 할머니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함께 해왔던 것일까. ‘한 남자의 부인 둘이 가정을 이룬다’ 머릿속으로 얼핏 상상해봤을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예고편을 보는 순간 아침 드라마의 한 장면에 가깝던 그 상상은 무참히 깨어진다. 진심으로 행복할 때만 나올 수 있는 춘희 할머니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춘희 할머니를 향한 막이 할머니의 애정 어린 손길을 보고 있노라면 말이다.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예고편을 보면 할머니들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 더 많은 궁금증들이 생겨난다. 영화를 만든 박혁지 감독은 이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한다. 카메라는 할머니들의 현재를 향하고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을 할머니들이 품고 있는 과거의 사연이나 서로에 대한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가족의 의미를 더 깊고 넓게 숙성시킬 이 가족을 얼른 스크린에서 만나보길 희망한다. <춘희막이>는 오는 9월 30일에 개봉하며 인디스페이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2) <워낭소리>

이충렬 / 2008 / 다큐멘터리 / 77분 / 전체관람가




30년간 함께해온 소 한 마리와 한 노부부가 있다. 최노인은 여느 할아버지들처럼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자신이 평생을 함께한 소에게만은 관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그의 곁에는 항상 구수하고도 정겨운 말투로 그를 대하는 부인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부부는 평생 같이 늙어갈 줄 알았던 소가 1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30년 동안 함께 해 온,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소와 주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 <워낭소리>는 ‘가족’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이자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이다. 보기만 해도 푸르른 풀의 향기와 구수한 소 똥 냄새가 나는 듯한 영상과 영화를 가득 채운 자연의 소리는 우리를 정겨운 시골집에 데려다 준다. 극 중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툭툭 내뱉는 뼈있는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정겨움과 뭉클함은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현재 <워낭소리>는 9월 30일까지 인디플러그에서 추석을 맞이하여 진행하는 반값 행사 대상 작품으로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감상할 수 있다.









2. 소수자 가족의 일상


1) <학교 가는 길>

이민지 / 2012 / 다큐멘터리 / 65분 / 12세관람가

4년 전 몽골에서 한국으로 온 ‘막살’가족. 그들은 비록 모두 미등록 신분이지만 한국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각자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막살의 엄마가 미등록 이주자 집중 단속으로 인해 몽골로 강제 송환된다. 계속되는 어려움에 아빠는 마음과 몸의 병을 얻고, 막살은 자신의 꿈을 접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국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주 노동자 가족의 삶을 다룬 영화 <학교 가는 길>은 다큐멘터리이지만 외부 내레이션이 없고 배경음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그저 담담하게 그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영화는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이들의 존재를, 그리고 이들의 아픔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실제로 영화를 연출한 김민지 감독은 우연히 마주치게 된 공장터 아이들의 밝은 모습 속 슬픔을 발견하고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와 같은 땅에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이주 노동자 가족들의 삶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2) <반짝이는 박수 소리>

이길보라 / 2015 / 다큐멘터리 / 80분 /전체관람가



경희와 상국 부부의 언어는 입이 아닌 손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대화를 할 땐 꼭 서로를 마주 보고 있어야 하고 동작 하나하나에도 힘이 실린다. 이들은 듣고 말하지 못하는 대신 다른 수단을 통해 더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더 섬세하게 느낀다. 딸과 아들은 부모님이 전해준 언어와 세상의 언어를 함께 구사하며 두 세계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이 가정의 삶을 함부로 가늠하곤 한다. 그러나 네 가족이 꾸리는 일상은 별다른 구석이 없다. 아버지는 전원주택에서 살 미래를 꿈꾸고, 솜씨 좋은 엄마는 겨울이면 부지런히 김장을 담그고 추석이면 성실히 송편을 빚는다. 서로를 향해 시종일관 해맑은 미소를 짓는 가족들에게서 남다르게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가 전해질 뿐이다. 두 세계를 살아가면서 적지 않은 시간동안 고민하고 돌아다니고 읽고 쓰고 찍어왔던 딸이 가족의 소박한 일상을 담담히 전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장애가정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딸과 아들은 장애가정의 아이들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도덕과 의무를 짊어지며 또래와는 사뭇 다른 유년기를 겪어왔다. 그 어려운 시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아이들은 단단한 심지를 품은 사람이 되었다. 제 두발로 뚜벅 뚜벅 걸어가는 딸과 아들, 그리고 용기 있게 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려는 부모. 우리가 이 가정에서 보아야 할 것은 가족들 서로간의 무한한 사랑과 지지이다.








3. 현대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투영된 가족


1) <민우씨 오는 날>

강제규 / 2014 / 드라마 / 26분 / 전체관람가




연희(문채원 분)는 숭엇국, 가자미식해 등 남편 민우(고수 분)가 좋아하던 반찬들로 매일 상을 차린다. 그러나 오래전에 집을 나선 밥상의 주인은 좀처럼 돌아올 줄을 모른다. 연희는 점점 흐려져만 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일상을 기록한다. 하지만 자신이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기록이 필요 없는, 숨 쉬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평양에 살고 있으며 그 또한 연희를 찾고 있다는 연락이 온다. 상봉 날이 되자 연희는 늘 그랬듯 공들여 도시락을 싸고 판문점 행 버스에 오른다. 연희는 과연 그토록 그리워하던 ‘민우씨’에게 따끈한 밥과 반찬을 전할 수 있을까. 영화의 배경은 현재이지만 연희의 모습은 남편과 헤어지던 순간 그대로이다. 연희가 떠나지 못하는 집에도 남편이 입던 옷과 모자가 그대로 걸려있다. 이처럼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뜻하지 않게 이별한 가족들의 시간은 헤어지던 순간에 멈춰 있다. 그들에게 한 번의 만남은 지나온 세월과 맞먹는 무게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귀중한 만남은 정치적 이유에 휩쓸려 무산되기 일쑤다. 그 가운데 가족을 그리워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영화는 힘주어 이 같은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영화는 묻고 있다. ‘과거의 헤어짐을 역사 탓으로 돌린다고 해도, 현재의 이별마저 역사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2) <할매꽃>

문정현 / 2007 / 다큐멘터리 / 89분 / 12세관람가




문정현 감독은 6년 전 정신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작은 외할아버지의 일기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일기장에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가족사가 적혀있다. 계급과 이념간의 갈등, 남북으로 흩어져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들. 가족사 안에 녹아 든 현대사의 비극을 주변 가족들의 인터뷰를 통해 샅샅이 파헤친다. 개개인의 삶, 더 나아가 우리 주변 가족들의 삶을 한 데 모으면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된다. 영화 <할매꽃>은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늘 날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 교과서 보다 더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우리나라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감독 자신의 가족 내에서 역사의 비극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가족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이 영화는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우리의 아픈 역사는 결코 오래된 일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역사가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고, 가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 <할매꽃>을 통해 조금 더 특별한 시선으로 우리 가족을 바라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족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정의를 보여주는 영화에서부터 현대사의 비극이 투영된 가족에 대한 영화까지 총 6편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온 가족이 모여 추석을 맞이하는 분들도 좋고, 시간이 여의치 않아 추석을 가족들과 보내지 못하는 분들도 괜찮다. 이 모든 영화 속 이야기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진짜 ‘가족’들의 이야기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우리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추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춘희막이>는 오는 9월 30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할 예정이며, <반짝이는 박수소리>, <워낭소리>, 그리고 <할매꽃>은 독립영화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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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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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깨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다 <침묵의 시선> 인디토크(GV) 기록


일시: 2015년 9월 17일(목) 오후 7시 30분

참석: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관객기자단 [인디즈] 차아름 님의 글입니다.


충격적인 다큐멘터리라는 평을 받으며 화제를 낳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침묵의 시선> 인디토크가 지난 9월 17일 저녁에 열렸다.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참석하여 <침묵의 시선> 뿐만 아니라 전작인 <액트 오브 킬링>, 그리고 오펜하이머 감독이 영향을 받은 리티 판 감독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 보신 이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불편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가 말씀드릴 것도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펜하이머 감독의 영화가 두 편이 공개됐습니다. 첫 번째 <액트 오브 킬링>, 그리고 <침묵의 시선>입니다. 제목으로 보자면 ‘액트’와 ‘킬링’, 오늘 보신 영화에는 ‘침묵’과 ‘시선’이 있습니다. 이미 영화에 대해서 감독 본인이 많은 말을 했어요. 대담들이 있었고 자료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피해가면서 저의 생각을 말해드릴까 합니다. 



















액트에서 시선으로의 변화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게요. 그전에 간단한 저의 기억에 대해 말씀 드리자면,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리티 판 감독이 내한을 했습니다. 캄보디아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그의 영화 중 <크메르 루즈 - 피의 기억>(2003)이라는 작품을 예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상영한 적이 있습니다. 2013년에 방한했을 때 크게 대중적으로 호응이 있거나 반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클로드 란즈만의 <쇼아>(1985)라는 작품과 더불어서 혹은 그 이상으로 리티 판 감독의 캄보디아 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부산에 방문을 했는데 굉장히 큰 화제가 됐습니다. 작품자체도 굉장히 큰 화제가 됐었죠. 오펜하이머 감독이 인터뷰 등에서도 얘기를 했지만 방금 말한 리티 판 감독으로부터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해자의 증언은 통상적인 다큐멘터리에서 많은 편이 아닙니다. 증언 혹은 증인이라는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피해자로 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증언이라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고요, 거기에 플러스 된 것이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하는 측면입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오늘보신 영화 <침묵의 시선>에도 이 두 가지가 미묘하게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식의 불편하고 굉장히 보기 힘든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까. 최종적으로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에 목표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향성을 오펜하이머 감독이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리티 판 감독이 캄보디아 대학살에 관해 만든 다큐멘터리 <크메르 루즈 - 피의 기억>의 영향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티 판 감독과 오펜하이머 감독, 둘의 얘기를 드렸던 이유는 제가 처음 <액트 오브 킬링>을 봤을 때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게 리티 판 감독의 <크메르 루즈 - 피의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두 작품 모두 가해자를 증언자로 위치시키고 한편으로 가해자와 희생자가 조우, 대면한다는 설정이 있고요, 가해자의 증언이 말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 같은 재연의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 세가지 측면이 오펜하이머 감독의 영화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리티 판 감독에 대해 얘기를 드렸습니다. 



리티 판 감독의 다큐멘터리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의 공통적인 특징에 대해 얘기 드릴까 합니다. 작품에서 가해자의 증언이 중요하기 때문에 불편함이 있습니다. 이건 작가적 책임의 문제에서 논란이 될 수도 있고요, 실제로 <액트 오브 킬링>은 다큐멘터리 영역 안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가적 책임이라는 것은 가해자의 증언을 기록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연출적인 입장까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 안에서 대단히 한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유일하게 주어질 수 있는 도구 중 하나가 카메라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대상을 찍는 사람이 힘이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위치마저도 가해자가 자리를 선점하게 된다면 도구가 갖고 있는 작가적인 위치 혹은 책임성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작가적 책임성에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오펜하이머 감독은 그런 작가적 책임성에 논란이 있음에도 이런 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떻게 자각 없는 가해자와 마주하는가, 이를 봐야 하는 관객의 책임과 불편함의 문제, 이런 양쪽의 입장이 있습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전자적인 측면이 부각될 것 같고요, <침묵의 시선>은 후자적인 측면, ‘본다. 바라본다.’라는 측면이 부각된 것 같습니다. 전작은 가해자의 증언, 이번 작품은 희생자의 입장에 섰고 또 다른 한편으론 <액팅 오브 킬링>은 ‘액팅’, <침묵의 시선>은 ‘보기’, ‘시선’이 부각된 작품입니다. 


두 감독의 영화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실제로 출연하고 있고 과거의 행동을 재연한다는 것이 공통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인도네시아와 달리 재판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리티 판 감독은 <크메르 루즈 – 피의 기억>에 처음에는 캄보디아 재판과정을 담으려 했던 것이었는데, 재판과정에 참여하면서 이런 학살이 벌어진 메커니즘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술가가 역사에 참여하게 됐을 때는 정치인이나 사회학자가 참여하는 것과 조금 다른 측면이 있잖아요, 그가 주목한 것은 그 끔직한 일들이 벌어지고 나서 얼마 뒤에 사람들이 그걸 망각했고, 새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이젠 이야기하지 말자는 식으로 묻혀 버렸다는 것이에요. 체계적인 망각과 소거의 과정이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끔찍한 일이 있었는데 어째서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지낼 수 있는지가 의아했던 거죠. 이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도 그 나이에 캄보디아에 있었고 프랑스로 건너가 살게 되었음에도 자신이 겪은 역사적 상처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상처와 어떤 방식으로든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떠올린 직업이 영화감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영화감독이 된 이유는 캄보디아 대학살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기억한다’라는 것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거죠. 이미지가 없다면 기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고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이미지, 영상을 찍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가능한 일이죠. 그때 그가 떠올렸던 문제는 이런 범죄가 진행된 메커니즘, 다시 말해 이 감독의 피의 역사의 원제 안에는 ‘킬링머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요. 기계적으로 작동된다는 것이죠. 기계가 작동되듯 사람들이 미친 듯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이죠. 이 기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됐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피해자의 증언만으로는 합리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죠. (처음에는) 캄보디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수용소의 경비원이었던 사람을 분리해서 인터뷰를 했다고 해요. 이 두 사람을 대면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것이죠. 그런데 그런 인터뷰 과정 안에서 우연치 않게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경비원을 만나고 싶다고 했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자신이 수용소에서 경험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분이에요. 그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어 그 사람을 만나 묻고 싶었던 거에요. 수용소에 찾아가서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경비원은 그것에 묵묵부답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저지른 것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게 옛날 일이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 안에서 리티 판 감독이 다른 식의 제안을 합니다. 어떤 식으로 했는지를 재연해달라고 하니까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것들을 재연을 하는 거죠. 말로는 숨기거나 말하기가 힘들 수 있는데 행동을 보여달라고 하니깐 자신들이 사람들을 데려와서 어떻게 고문하고 취조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리티 판 감독이 ‘바디 아카이브’라고 표현을 합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지워질 수 있지만 아주 일상적으로 반복적으로 잡아다가 죽이고 고문하고 해서 이것이 몸의 기억으로 남아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죠. 이것이 굉장히 놀라운 과정으로 작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 감독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홀로코스트와는 상황이 다른 문제에요. 홀로코스트는 기록이 거의 전무한 상태로 학살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계속 기록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들의 증언밖에 없는 건데, 크메르 루즈 대학살의 경우는 그들을 계급의 적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그들이 계급의 적인 이유를 알릴 수 있는 조작된 문서들이 차고 넘칩니다. 고문을 가해서 계급의 적임을 자백하게 된 수많은 기록들이 존재하는 거죠. 거짓된 기억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항적 기억들을 구축하는 과정들이 남게 됩니다. 근데 그 점은 인도네시아를 다룬 오펜하이머 감독 영화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봐요. <침묵의 시선>에서도 되게 충격적인 게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공산당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감옥으로 보내졌는지 설명하는데 (주인공 아디의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나면 아버지로부터 거짓말이다 얘기를 듣죠.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망각되고 은폐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거짓증언과 거짓된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과 대항해서 새로운 방식의 기억을 구축해야 하는 문제들이 남아있습니다. 가해자와 대면하게 되는, 과거에 있었던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재연이라는 것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의 증거, 흔적을 가시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리티 판의 영화와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이라는 작품 안에서 공통점 중 하나는 가해자와 희생자가 비대칭적인 관계라는 겁니다. 이 두 사람들이 상호적으로 탈 인간화의 과정을 거쳐갑니다. 희생자에 대한 비인간화와 살육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비인간화. 탈 인간화 과정 안에서 오펜하이머 감독은 가해자에 훨씬 더 주목해 <액트 오브 킬링>을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도구가 될 수 있었는지, 그런 식의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또 그 시기가 지난 이후에 어떻게 체계적으로 그것을 망각하거나 자부심을 갖고 이야기 할 수 있는지를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굉장히 충격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침묵의 시선>에서도 아디가 말하죠. 그들이 저런 식으로 자부심을 갖고 얘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스스로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저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요. 그것이 <액트 오브 킬링> 안에서 ‘액트’라는 부분이 보여주는 거죠. 살인자의 증언과 재연,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살육의 몸짓은 한편으로 살인의 작동이 어떻게 가시화되는지 보여주는 흔적인 동시에, 과거에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없었던 살육의 과정을 몸의 동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리티 판 감독과 오펜하이머 감독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리티 판 감독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제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런 살육의 과정, 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근본적인 목적이 무언가를 촬영하는 것은 무언가를 담아낸다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되돌려 준다는 것에 있습니다. 죽은 자, 사라진 자들, 희생자들 그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은 기억의 작업이고 기억의 작업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 없이는 작동될 수 없죠. 그랬을 때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든다는 것이고요. 있지 않은 것을 구성해나가는 것은 있지 않은, 사라져 버린,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되돌려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작업을 하는 것은 살해당했던, 죽었던, 사라진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었던 존엄성을 회복해주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리티 판 감독의 영화는 이런 잃어버린, 파괴된 것, 그들의 생명, 존엄을 회복시키는 과정이죠. 물론 고발도 있고 비판도 있지만, 가해자, 학살자의 증언, 그들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부분들이 아닌 거죠. 또한 학살자를 인간화하는 것, 범용함 이런 것들은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반대로 오펜하이머 감독은 그것을 되돌려 준다는 것 보다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혹은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강하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펜하이머 감독도 얘기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상황이 다른 곳과 굉장히 다릅니다. 한 동네에서 학살을 한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들은 재판이나 후회와 반성도 없고,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얘기하는 것에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그런 조건들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때문에 거짓 증언과 기억으로 살아가야만 하고요. 그런 일이 있다는 것 자체를 드러내는 것을 오펜하이머 감독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살육 재연 자체가 과잉적인 자기 정당화로 보이죠. 이런 과잉적인 행동들을 <액트 오브 킬링>은 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과거의 자신들의 저질렀던 행동을 현재 안에서도 자기정당화하고 있는 거죠. 액트는 대단히 판타지적으로 구현되고 있고 이것은 위험해 보이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액팅의 행위자로서 존재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역사적 거리와 반성적 거리를 갖지 않은 채, 다시 말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려고 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 액트라는 범주 안에 계속 있는 거죠. 사람이 행동을 할 때는 자신의 행동을 떨어져서 관찰할 기회를 갖지 못하거든요. 말하자면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반성적 거리를 두고 성찰할 거리를 갖고 있지 못한다는 거죠. 캄보니아는 그 부분이 존재한다고 보는 거고요. 행동을 하면서 반성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행동할 때는 행동에 적합한 어떤 과장적인 상상력을 갖는 거죠. 이점이 <액트 오브 킬링>에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들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서 행동을 멈추고 혹은 행동한 부분들을 자기자신이 되돌아보게 만들 필요성이 있죠. <액트 오브 킬링> 안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이 액팅했던, 그들이 찍힌 것을 자신이 다시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들입니다. 그게 정말 반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액팅과 그것을 다시 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단히 위험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추구한 하나의 목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분열을 만들어가는 거죠. 액팅 후 보는 자의 위치로 전환시켜 그 분열 안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 예술가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실험적인 것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데 어쨌든 본다는 행위를 통해 액팅과 떨어지게 하는 것이죠. 그것이 확장된 것이 <침묵의 시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액팅을 보는 것으로 전환했다는 것.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아디가 영상을 계속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보고 있는 영상은 과거에 찍은 것들이고 시간이 지난 뒤 현재 안에서 다시 그들을 찾아가 대면합니다. 대면을 어떻게 촬영해야 될까요? 제가 기억하기로 리티 판 감독의 작품은 샷바이샷으로 되어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오펜하이머 작품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범용한 평범한 사람들이다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때 이 비대칭 관계가 대면, 직면하는 순간을 어떻게 잡아내는가를 <침묵의 시선>을 볼 때 주목했습니다. 


<침묵의 시선>의 통상적 측면에서 안경과 점핑빈이 나옵니다. 왜 점핑빈이 나올까. 꼬마들이 점핑빈을 보는 장면이 서너 번 나오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디의 어머니가 (점핑빈을 보면서) ‘넌 언제 나올 수 있을까. 널 볼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건 이미지라기 보다는 형상이고 은유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간의 얘기가 나오지만 점핑빈은 후에 나비의 성충이 되어 날아가게 되죠. 내부에 있는 것은 계속 꿈틀거리고 있지만 아직 나오지 않은 거에요. 아마도 은유적으로, 딱딱한 껍질이 우리가 보고 있는 어떤 것이고 그 안에서 꿈틀대는 것이 기억의 작동이라는 것, 진실의 꿈틀거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아직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거죠. 근데 그것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이 나올 것이라는 미동의 관심이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안경이라는 것에 ‘보기’의 문제가 들어있죠. 특정한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안경이라는 것이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등장합니다. 대학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노인이 대부분이고 시력이 저하되어있죠. 시력이 저하된 사람들에게 안경이 필요하고, 안경을 맞춰주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기 위해서는 교정이 필요하니까요. 안경이라는 렌즈를 착용하지 않으면 흐릿하거나 전혀 보이지 않는 거죠. 렌즈로 교정해나간다는 것은 이 영화의 작업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카메라의 눈 덕분에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된 거죠. 만약에 볼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는 방법을 바꾸거나 안경을 써야 하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렌즈, 안경, 혹은 카메라의 눈을 통해서 새로 보게끔 만들어가야 하는 거죠. ‘본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의 재난 혹은 재앙을 소재로 하는 다큐멘터리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들이에요.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에서 ‘보기’와 관련된 더 큰 부분은 자기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적 이미지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도 자신의 행동을 보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되돌아보는 과정인 거죠. 


오펜하이머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살육을 저지른 사람들을 우리와 다른 몬스터로 이해하면, 완전히 다른 타자로 이해해버리게 되면,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것이죠. 범용한 인간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 점이 오펜하이머 감독의 두 편의 영화에서 핵심적이었던 것 같고 <침묵의 시선>에서는 훨씬 더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액트 오브 시잉’(Act Of Seeing)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기의 행위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침묵의 시선>은 굉장히 논란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에 대한 각각의 생각, 입장을 가지고 이런 문제를 얘기할 수 있는 지점이 중요한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범용한 사람이 그런 학살에 가담하게 되는 매커니즘과 재연의 행위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살을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의 궁극적인 의미와 역할에 대해 되돌아 봤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 아디가 가해자들을 찾아가 안경을 맞춰주던 장면처럼 관객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흐릿한 것들 혹은 내재된 의미를 보이지 못했던 것들을 교정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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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줄 관람평

차아름 | 물불 안 가리고 몰아치는 정치풍자

김수빈 | 자가당착의 땅을 무자비하게 굴착한다

심지원 | 2015년의 포돌이는 아버지를 만났을까?

추병진 | 물불가리지 않는 풍자와 유머. 그 속에서 펼쳐지는 포돌이의 눈물겨운 수난극.

김가영 | 5년이 지났는데도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오모니!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리뷰

<자가당착> : 자가당착의 땅을 무자비하게 굴착한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수빈 님의 글입니다.


각기 다른 특징의 여러 영상이 모여 하나의 영화를 이뤘다. 물론 방점은 마지막에 굵게 찍힌다. 먼저 ‘대한 늬우스’라는 이름의 패러디물이 영화의 포문을 연다. 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인기 코너 형식을 빌렸다. 밥상 위에서 이뤄지는 가족들의 대화가 아버지의 ‘밥 묵자’ 한 마디로 정리되던 그 코너말이다. 가족의 오붓한 식사 시간, 딸은 정부의 정책에 대해 나름의 보고서까지 만들어 가며 조목조목 비판을 한다. 아버지는 어딘가 약이 오르는 눈치이지만 제대로 응수할 근거가 없다. 딸은 정치를 역술과 엮는 기묘한 통찰력까지 보여준다. 다음으로 <칠거지악>이라는 영화의 예고편이 이어진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는 복수를 꿈꾸며 무술을 연마하고 복면을 쓴 여성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돌이의 좌충우돌 성장 및 전쟁 드라마가 시작된다.



포돌이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기도하는 뒷모습으로만 익숙하다. 안방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틈이 생겨도 금세 닫히고 만다. 아버지가 그리운 포돌이는 만남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낸다. 포돌이는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분리되어 있는 하반신을 이어붙이기로 한다. 하지만 쥐떼들이 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방 안의 살림을 거덜 내고 포돌이의 하반신까지 갉아먹기 일쑤다. 포돌이는 쥐떼를 잡기 위한 일전에 돌입한다. 청소기로 쥐들을 빨아들이거나 물대포를 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으로 주변 이웃들이 항의를 하러 몰려든다. 그러면 그들에게도 물대포를 쏘아댄다. 하지만 포돌이의 고투에도 쥐떼는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오히려 빨간 띠를 매고 단합된 모습으로 포돌이에게 돌격한다. 쥐떼를 향한 포돌이의 탄압작전도 스케일을 점점 불려간다. 과연 포돌이는 쥐떼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의 독특한 리듬이다. 충돌과 우발로 짜인 사운드들이 영화 고유의 리듬을 만들어 내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동력이 된다. 단순한 효과음뿐만 아니라 포돌이가 내뱉는 감탄사나 짧은 대사들도 모두 사운드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수많은 자료들 속에서 상황에 맞는 사운드를 선별하고 배치하는 작업을 거쳤을 제작진의 노고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작업과정이 더디고 고되 요즘에는 잘 행해지지 않는다는 퍼핏 애니메이션(인형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한 장면씩 촬영하여 움직임을 만드는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띠는 것도 인상적이다. 만약 포돌이가 부드럽고 유려한 동작으로 움직였다면 이 영화가 가진 이 독특한 질감과 재미를 절대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쉽게 가지 않는 길을 택했던 감독의 선택이 이 영화만의 독특한 멋을 배가했다.



포돌이가 있기에 앞서 ‘여인’이 있다. 마네킹인 여인은 감독의 2008년작 <철의 여인>의 주인공이다. 포돌이의 선배인 셈이다. <철의 여인>의 원제가 바로 <자가당착>이다. 인형과 마네킹이 주인공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영화는 콘셉트나 구성에 있어 맞닿아 있는 측면이 많다. 모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난장과 아수라장을 질주한다. 감독은 할 말이 있다면 <자가당착 3>을 만들 의향도 있다고 한다. 두 영화를 만들면서 겪었을 수많은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뚝심을 지켜내고 있는 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 참여>는 끈질긴 법적 투쟁을 겪고 5년 만에 대중과 만났다. 집요한 감독의 이 사연 많은 노작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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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ndiespace_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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