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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양치기〉: 마주보는 얼굴들

by indiespace_가람 2024. 6. 22.

〈양치기〉리뷰: 마주보는 얼굴들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윤정 님의 글입니다.

 


봄비가 내리는 새학기의 어느 날, 삼삼오오 무리 지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들뜬 아이들의 몸짓엔 싱그러움이 가득 깃든다.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넘실거리는 학교 공간 속에 ‘요한(오한결 역)’ 역시 그곳에 있다. 그러나 그가 지나온 발걸음은 다른 아이들의 것과 궤적을 공유한다 할지라도 사뭇 느낌이 다르다. 우산 없이 운동장을 터덜거리며 가로지르는 요한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저 험난하고 무자비한 자연현상일 뿐이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기대할 만한 일이나 어떤 즐거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버린 듯, 내리는 비를 피할 의지가 없는 요한은 축축히 젖어 이미 본래의 색을 빼앗겨버린 옷가지의 채도처럼 그저 흐릿해 질 뿐이다. 

 

 

영화 〈양치기〉 스틸컷

 

 

축축한 촉감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체념하는 그때, 요한의 머리 위로 내리던 비가 잠깐 멎는다. 놀란 마음에 바라본 하늘엔 요한의 날들에 이래 없던 아주 선명한 노란색 우산과 맑은 얼굴의 ‘수현(손수현 역)’이 등장한다. 학교에서 괴롭힘과 따돌림의 대상이 되던 낮들과 집에서 조차 엄마와 그의 동거인으로부터 방치와 폭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던 밤들에 갑작스러울 정도로 선뜻 들어온 수현과 수현의 호의가 자신의 구원이 될 것임을 확신한 요한은 노골적인 욕망을 점차 드러내며 수현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수현은 그러한 요한의 관심과 그가 드러내는 본심들에 점차 부담을 느낀다. 교직원 회식이 있는 날 할 말이 있다며 굳은 날씨에도 자신을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거나 초대하지 않은 집으로 불쑥 찾아와 먹을 것을 달라는 요구, 같은 날 집 안에서의 해프닝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위협을 느낀 수현은 끝내 요한을 직접적으로 밀어내기에 이른다. 수현의 호의로 이례 없던 상승의 희망을 품게 된 요한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헛된 바람이었음을 깨닫고 굴욕감과 분노를 선생님이 자신을 때렸다는 거짓 모함으로 수현에게 표출하기에 이른다. 

 

 

영화 〈양치기〉 스틸컷

 

 

교육에 대한 헌신과 애정을 공유하는 동료들, 예비 배우자의 곁에서 안정적일 것만 같았던 수현의 일상에 요한의 한 마디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가져온다. 믿었던 주변 이들 역시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빠져나갈 수 없는 혼란에 갇힌 수현은 소문으로 떠돌던 거짓 증언을 요한을 향해 뻗은 자신의 손을 통해 사실이라고 증명하기 이름으로써 스스로를 무너트린다. 수현을 올려다보는 요한의 얼굴과 요한을 내려보는 수현의 얼굴이 고조되는 긴장감 속에서 빠르게 전환될 때, 욕조 안에서 허공을 응시하는 각자의 옆모습은 존재하지 않던 것을 만들며 점차 상승하는 요한과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추락하는 수현 사이의 중간지대를 만들어낸다. 


수현이 교육봉사를 하던 보육원에서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재회를 하는 동시에 지난 날들과 분리된 각자의 새로운 시작을 목격한다. 담배는 나쁜 사람들이 피는 것이니 좋은 사람인 수현이 손에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겨두고 요한은 새로운 안식처로 돌아간다. 점점 멀어지는 요한을 바라보는 수현의 얼굴엔 여전히 의혹과 불안이 서려 있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함께 깃든다. 

 

 

영화 〈양치기〉 스틸컷

 


마주보고 있음에도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어 스스로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에 이를 정도로 무겁게 느껴지지만 타인의 날들은 같은 종류의 삶이라도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너무나도 가벼워진다는 것을 요한과 수현은 그들이 얽히게 된 격정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면서 무의식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다가올 앞으로의 날들에서 그들이 주변을 바라볼 때, 선으로부터 비롯된 맹목적인 추앙이나, 악으로부터 비롯된 격렬한 증오 같은 단순하고 게으른 분류에서 벗어나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스펙트럼이 한 사람의 날들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통해 타인의 정면을 아주 찰나의 순간만이라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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