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여공의 노래〉리뷰: 오늘 또 하루를 살아가네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예송 님의 글입니다.
최근의 시간은 흐릿해져가고, 기억은 더 이상 잘 쌓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형의 덩어리.
바람이 불어도 잘 쓸려 내려가지 않고, 파도에 여러 차례 부딪혀도 쉽사리 모래가 되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이 하나쯤은 있다.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기억,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 문뜩 떠오르는 기억, 내 삶의 빈틈 구석을 귀신같이 찾아 끈질기게 살아남는 잡초. 이제는 진물도 다 터지고 미운 살이 돋아난 흉터일지도 모르지만, 철썩이는 파도에 맞아 붕괴된 벽돌의 한면은 매끈하고 다부지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가 빛나는 지점은 이 부분이다.
투쟁과 폭력, 조롱과 비난이 온 세상을 지배한 그 시절, 조선인 여공들은 견고하고 질긴 삶의 의지를 피력했다. 영화는 우리가 어쩌면 알고 있었을 이야기를 섬세히 발굴한다. 폭력의 역사로 잊혀졌던 숭고한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을 뒤쫓고 있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여러 개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호루몬’, ‘소녀들’, ‘조선의 돼지들’, ‘붉은 벽돌 담장’ 네 이야기는 관련된 맥락에서 읽힌다.
100년 전,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어린 소녀들, 조선인 여성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항해한다. 각자의 목적은 상이할테지만 대개 가족을 위해서 길을 선택한다.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준다는 정보에 먼 길을 건너간 소녀들은 공장의 척박한 환경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 곳에 속하고 싶어했고, 혹시라도 외면 당할까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어린 나이를 숨기려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 노동환경은 척박했고 조선인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권리나 자유를 무시 당한채, 노동을 강요받는다. 함께 일하는 일본인 노동자들과 같은 식사를 나눠 먹을 수 없었고, 당시에 돼지의 내장을 음식으로 요리할 방법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일본인들은 이를 쓰레기 취급했는데, 여공들이 이를 불에 익혀 먹는 모습을 보고 ‘돼지’라 폄하 하기에 이른다. 휴게 시간 조차 지켜지지 않은 채 먼지 날리는 취약한 환경의 방직 공작에서 기계처럼 일하던 여공들은 전염병을 아울러 삶을 계속해서 위협받고, 제 한명이 눕기 어려운 좁은 숙소에 엉겨 붙어 하루를 마무리한다.
조선인 여공들은 핍박받던 환경에 화를 안고 자연발생적인 대모를 일으킨다. 제대로 된 수면 환경과 노동 환경, 조선인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 아래 모든 것을 차별 받던 여공들은 이 모든 게 폭력으로 귀결되는 현실에 분노한다.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도 거절당하고 동시에 가족에게 남길 편지조차 마음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공장을 넓게 둘러 싼 붉은 담장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고, 몰래 그곳을 넘어 도망 치는 날엔 보복당한다.
그러나 여공들은 그 속에서 의지를 불태운다. 영화는 기존에 역사가 개인의 진술이라는 것에 대해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다. 여공들은 핍박받았고, 폭력이 만연한 당대의 조선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살아있으며, 인격적 존재로 노동하는 한 인간임을 자신의 몸을 통해 증명해왔다. 끊임 없이 담장 너머로 도망쳤고, 학교를 만들어 글을 배웠고, 대모를 열어 존재성을 입증했다. 주체적으로 본인의 삶을 증명하기 위한 분투를 일삼았다.
영화는 기존의 역사 다큐멘터리 형식에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현대적 해석을 첨가한다. 100년전 여공들이 남긴 사료를 찾고, 이를 탐구하는 일본인 역사학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대의 소녀들에게 그녀들이 남긴 텍스트를 읽게 한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함께 쓰는 재일교포들이 읽는 글은 어눌하지만, 당대의 여성들의 말투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채워질 수 없는 시간의 공백과 정체성을 단숨에 신체로 스며 들게 한다. 글자로만 남겨져 있던 과거의 사료들이 현대의 신체로 소환된다.
과거를 회상하는 노인이 된 여공은 현재의 시간은 잊혀져도, 과거의 그날만은 익숙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과거의 시간에만 몰두하거나, 맺혀 있지 않다. 소녀 시절의 어려움에 빠져 현재를 속단하지 않았고, 가족을 이루고 삶의 터를 잡으며 재일코리안 1세대로 깊이를 다졌다. 비단 과거의 시절이 고통이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으나, 그 시절을 견뎌온 자신을 보듬고 응원하며, 현재의 자신으로 이르게한 중추적인 힘으로 기억한다.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 후대의 우리가 무언가를 함부로 논할 수는 없으나, 그들의 행동과 표정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진실과 태도를 보여주며 이는 현대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메세지를 전한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강인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일기다. 영화 속 일본학자는 이를 천천히 논하다가, 이어져 그녀들이 묻혀있을 거라 예측되는 땅에 찾아간 순간 감정이 복받친듯한 말을 남긴다. 소녀들은 강했고, 오랜 시간 덮어졌던 그녀들의 투쟁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질 때, 역사는 우리의 심장을 울린다. 알고 있어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그리고 알아도 현재와 동떨어진 박제된 역사로만 이해되던 과거를 눈 앞에 놓이게 하는 힘만으로 영화는 성과를 얻었다. 평범했던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통과했는지. 당당한 역사 속 소녀들의 투쟁은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기억해 삶의 곁에 두어야 할 이야기로 읽혀진다.
제목에도 나와 있는 여공들의 노래는 영화의 말미에 읊어진다. 사료로는 남아있지만, 정확하게 어떤 음으로 불렸는지는 구두로 전해진 이야기가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강인했던 여성들이 힘차게 불렀을 그날의 노래는 소박하지만 단란한 리듬을 안고있을 거라 예상된다. 그 명랑한 내용은 현대에 우리에게 닿아 있는 듯 익숙하고, 폭력이 만연했던 세상 속에서도 작은 울림을 꾸준히 전했던 소녀들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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