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리뷰: 방황의 끝
*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원 님의 글입니다.
방황에도 유효기간이 있을까.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말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는 한 방황의 시간을 겪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방황을 통해 성장하고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방황이 성장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아가미〉는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이들을 조명한다. 승원은 배우의 꿈을 꾸며 작은 극단에서 생활한다. 어느 날 승원에게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전해진다. 승원은 “그냥 좀 쉬고 싶다”는 말을 끝으로 극단에서 나간다. 이복남매인 승원과 가현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재회한다. 가현의 제안에 승원은 어릴 적 살던 시골집으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방문한 시골집의 풍경은 삭막하다. 텅 빈 집에서 사람의 온기는 찾아볼 수 없고 살림살이는 방치되어 있다. 꽁꽁 얼어붙은 집 앞 호수는 승원의 무기력하고 음울한 마음을 대변한다. 승원은 그저 먹고 자기를 반복하고 집과 호수를 오가며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시골집은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성장의 서사가 배제된 공간으로 그려진다. 관객은 승원이 시골집에 내려오고 며칠이 지났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매일의 일상은 위태롭게 지속되고 지직거리는 TV와 무력하게 반복되는 음악만이 공간을 채운다. 어느 날 시골집에 가현이 내려온다. 가현의 등장은 승원의 삶에 잠시 균열을 내는 듯하지만, 승원은 다시 어둡고 우울한 생활로 돌아간다. 가현은 공무원 시험을 이유로 시골집에 잠시 들른 거라 말하지만, 그녀는 며칠이 지나도록 고향집을 떠나지 않는다. 시골집을 벗어나지 않는(혹은 못 하는) 승원과 가현의 모습은 이들 내면의 불안을 환기한다. 꿈과 목표로 향하는 길은 너무도 멀고 불확실하다. 불투명한 미래의 압력은 두 사람이 온전히 휴식하지도, 방황하지도 못하게 만든다.
가현의 취미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가현의 카메라는 단조로운 일상에 사건을 만들어 두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가현은 집 안팎을 오가며 호수의 풍경을, 어린 시절 찍은 필름 사진을, 승원의 얼굴을 담는다. 여느 때처럼 카메라를 들고 호수로 나간 가현은 미끄러져 카메라를 잃어버린다. 호수가 “엄청 깊어 보인다”는 가현의 이야기를 들은 승원은 그날 밤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호수로 향한다. 호수로 내려가던 승원은 얼음에 미끄러져 유골함을 깨트린다. 가현이 잃어버린 필름 카메라 옆에 아버지 유골함이 조각난 채로 놓인다. 승원은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연극 연습실로 향한다. 다음 날 아침, 어제 승원이 있던 자리에 가현이 앉아 있다.
승원과 가현의 시간은 다시 흐르고 그들의 방황은 끝났다. 승원은 극단으로 돌아가 연극을 마치고 가현은 공무원이 된다. 무기력한 방황이 끝났지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승원은 여전히 생계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가현은 업무 전화에 시달리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간다. 두 사람이 방황을 거쳐 ‘성장’했는가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승원과 가현이 방황의 시간을 거쳐 변화하였으며, 어디로든 나아갈 거라는 사실이다. 잃어버린 필름 카메라를 되찾고 깨진 유골함을 붙일 수 없듯, 과거의 방황을 그저 없던 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방황의 시간을 지나 승원과 가현은 변화했다. 이들은 이제 집에 머무르지 않는다. 집을 둘러본 뒤, 다시 각자의 길을 나설 뿐이다. 처음 집을 찾아왔던 이들은 이제 그곳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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