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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세입자〉: 안락하다는 환각

by indiespace_가람 2024. 12. 23.

〈세입자〉리뷰: 안락하다는 환각

* 관객기자단 [인디즈] 문충원 님의 글입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차를 한 잔 내린 후 책상 앞에 앉는다. 평온해야 마땅할 풍경이지만 오늘은 어딘가 꺼림칙하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니 등장하는 건 귀신 따위가 아닌, 좁은 방의 작은 전경. 고개만 두리번거려도 모든 면적이 들통나는 서울 한복판의 흔하디흔한 월세방이 눈앞에 선명하다. 매일 마주하는 풍경이지만 오늘따라 왠지 공포스럽다. 월세밖에 살지 못하는 상경한 대학생의 통장 잔고에 대한 으스스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공포의 진짜 근원은 내가 어제까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 집을 안락하다 여겼다는 사실에 있다.


 생각해 보면 스무 살, 상경한 이래로 이리저리 전전하며 지내온 탓에 ‘나의 집’이라는 감각이 무뎌진 건 이미 오래된 일이다. 집이 나의 것이 아닌데, 나는 무턱대고 안락하기만 해도 되는 건가. 오늘 밤 발 뻗고 누웠다지만, 내일 일은 또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우리에게 과연 집이란 무엇이고, 그 집을 소유한 주인, 또 그가 사는 집은 어디이며, 나아가 그 모두를 지배한 도시로까지 상념은 뻗어 나간다. 안락하다는 인식이 이 도시마저 되짚어보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무의식적 안락함을 의심케 한 최초의 스파크는, 며칠 전 관람한 〈세입자〉의 몫이었다.

 

영화 〈세입자〉 스틸컷

 

 영화가 그리는 도시는 절망으로 무너지면서도 태연히 살아있다. 매캐한 공기가 코끝을 찌르는 듯한 흑백의 길거리도 누군가는 바삐 횡단한다. 죽어가는 건 단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뿐. 살인적인 물가와 지독한 공기질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쉽게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과 에너지를 흡혈하면서 영생을 꿈꾸는 도시는 치밀하게 그들을 자신의 품 안에 옭아매려 한다. 그럴듯한 직장과 몸 누일 곳을 제공해 준 다음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라 느끼게 만드는 방식으로 우리의 노동과 시간을 앗아가 제 몸집을 불린다. 더군다나 영화 속 도시엔 다소 기이한 제도들이 더해진다. 바로 ‘월월세’와 ‘천장세’가 그것이다. 월세 세입자가 다시 월세를 놓을 수 있거나 천장을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세금으로 혜택을 준다는, 현실에서 충분히 상상할 법한 설정으로 영화 속 도시인들을 한층 더 처절하게 속박한다.

 

영화 〈세입자〉 스틸컷

 

 주인공 ‘신동’도 예외는 아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나름 전망 좋은 신생 회사에 다니고, 자가는 아니지만 꽤나 큼직한 월셋집에서 지내는 그 역시 지금 속한 도시에 환멸을 느끼며 다른 곳을 갈망한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안정감은 집주인이 리모델링을 이유로 퇴거 명령을 내리면서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달리 갈 곳이 없어 근심하던 신동에게, 친구는 월월세를 놓으면 계약이 복잡해지는 탓에 집주인이 세입자를 내보내기 어렵다는 정보를 흘린다. 신동은 그 즉시 월월세 공고를 올리고, 화장실에 어느 신혼부부를 들이게 된다. 그러나 천장세를 노린 그들이 화장실 천장에 달린 통로를 이용해 정체 모를 세입자를 받으면서 영화의 기괴함은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집주인의 횡포와 도시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에서 나온 수였지만 그럴수록 신동은 역설적으로 시스템의 늪에 빠져들어 간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도시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듯이. 우리는 우리가 도시에 얹혀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도시의 명줄은 전적으로 도시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사회는 서민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각종 혜택을 제공하며 우리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듯하지만 정작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는 데에는 미온해 보인다. 일시적으로 여건을 완화할 대안들만 끊임없이 제공하며 문제는 은폐되고 도시인의 의존도만 높아져 가는 실태를 〈세입자〉는 과감하고 강렬하게 꺼내 보인다.

 

영화 〈세입자〉 스틸컷


 때때로 장르영화의 성취는 지구만큼의 부풀림에 있다고 믿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끝도 모르고 뻗어 나가는 상상력도 물론 좋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만큼만 상상해 보자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근미래적 배경 설정은 영화적 상상력의 한계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현실과 장르의 절묘한 교차점에 가까워 보인다. 기이한 제도와 그로테스크한 연출은 평범한 가정집과 사무실, 보편적인 감정이나 인간의 취약함과 만날 때 우리의 심리 속에서 극대화되므로. 더불어 “컬러는 묘사적이고 흑백은 해석적”이라는 사진작가 ‘엘리어트 어윗(Elliott Erwitt)’의 말처럼, 흑백 모노 톤의 연출은 의도한 바에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시켜 영화가 내포한 함의의 중심부로 곧장 인도하는 지름길이 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영화관 밖에서 마주하는 세상이 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정체불명의 천장 세입자가 신동 자신이었다는 결말부 반전은 그 자체로 섬뜩하지만, 영화관을 나온 후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부터 진짜 반전은 시작되는 것만 같았다. 신동을 몰아넣은 환각이, “아주 황당한 망상은 지워지지만, 아주 그럴듯한 망상은 심어주는” 약물이 지금 우리와 아주 동떨어진 개념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도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는 신동의 마지막 모습처럼 이 도시에서도 우리의 매일은 당연한 듯 반복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통과한 우리의 새로운 고뇌는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는 일. 혹은 늘 깨어 있기. 어떤 환각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너무 당연해, 아주 서서히 우리를 잠식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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