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을 모든 오리배에게 <수성못>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18년 4월 28일 오후 3시 30분 상영 후
참석 유지영 감독ㅣ배우 이세영
진행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관객기자단 [인디즈] 오채영님의 글입니다. (사진제공 신소영 님)
화창한 날씨의 토요일이었다. ‘배우 유지태와 함께 독립영화 보기’ 13번째 작품으로 <수성못>이 상영되는 날이었다. 배우로서 할 수 있는 뜻 깊은 일을 고민하다가 ‘상업 영화 한 편을 찍으면, 독립영화 한 편을 지원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는 유지태의 관객 초대 이벤트는 올해로 벌써 7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수성못>은 대구에서 자란 필자에게 아주 반가운 영화였다. 영화의 배경이 된 장소도 친숙했지만, 마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그 곳에서 내가 했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수성못이 실재하는 지명인지 몰랐을 관객까지도 모두 영화 속 '희정'에게서 자신의 일부분을 발견했을 것이다. <수성못>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수수께끼와 여운 속에서, 영화저널리스트 이은선 기자의 진행으로 유지영 감독, 희정 역의 이세영 배우와 함께 하는 인디토크가 진행되었다.
이세영(이하 이세영): 안녕하세요, <수성못>에서 희정 역을 맡은 이세영입니다.
유지영(이하 유지영): 안녕하세요, <수성못> 연출한 유지영이라고 합니다. 재미있게 보셨기를 바라면서 질문 많이 부탁드립니다.
이은선(이하 진행): 저는 진행을 맡은 영화전문 기자 이은선입니다. 먼저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여쭤보겠습니다. 왜 대구의 수성못인가요?
유지영: 석촌호수여도 사실은 문제가 없는 스토리긴 하죠. 그런데 제가 대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거든요. 저는 영화를 만들 때 장소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20대 초반에 힘들 때마다 수성못으로 새벽에 산책을 많이 갔는데 그 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영화 속 희정 같은 삶을 살면서 대구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독립하고 싶었고,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 시기였거든요. 수성못을 대구라는 도시에 빗대어 말하면, 그 안에서 열심히 발버둥 치고 있지만 앞으로 가봤자 제가 못 안에 갇힌 오리처럼 느껴졌달까요. 그런 마음들이 작업노트에 기록이 되어 있었고 첫 장편 영화를 만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게 딱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 장편은 내 얘기였으면 좋겠고, 내가 나고 자란 장소에서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수성못>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진행: 수성못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겠다는 결심을 한 후 처음 생각한 시나리오는 현재의 영화와 같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전에 생각했던 스토리가 혹시 또 있나요?
유지영: <수성못>이라는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는 대사가 많이 없고 장소 위주의, 말하자면 포토제닉한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전위영화에 가깝다고 할까요? 수성못을 배경으로 영상미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구상 중에 저의 20대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면서 희정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하여 그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서른다섯인 제가 보는 이십 대의 제 거울이랄까요. 처음엔 이미지 중심으로 구상되었던 영화가 희정의 등장과 함께 스토리 중심으로 나아갔던 것 같아요.
진행: 희정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치열하게 사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주변에도 그 치열함을 강요하는 사람이기도 한데요, 솔직히 조금 피곤할 것 같기도 하죠?(웃음) 희정이라는 인물을 처음 대했을 때의 배우님의 마음이 어땠을 지 굉장히 궁금해요.
이세영: 굉장히 오지랖이 넓고,(웃음) 자기도 모르면서 쉽게 말하고, 자기 세상에 갇혀있는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만 한 편으로 시나리오를 받고 촬영을 할 때 저랑 굉장히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꼈고 충분히 이해가 가더라고요. 또 열심히 살고 있는 20대 청춘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허투루 보여주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진행: 그 노력의 일환이 영화 속 대구 사투리겠죠? 사실 감독님이 이세영 배우에게 대구 사투리를 꼭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해요. 이세영 배우가 희정을 그 캐릭터처럼 치열하게 준비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희정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배우가 아이디어를 제공한 부분이 있나요?
유지영: 이세영 배우와 제가 유머코드가 되게 잘 맞아요. 극 중 오리배 관리소장님한테 거짓말로 엄마 아프다고 하면서 뒷걸음질 치면서 나가잖아요. 그런 유머코드들이 세영 배우의 아이디어였어요. 가끔 스태프들은 그게 뭐냐고 핀잔도 주는데 저는 너무 웃긴 거예요. 각 씬, 각 쇼트마다 함께 논의하며 촬영했고 연기에 있어서는 제가 이세영 배우에게 의존한 것도 많았다고 봐요.
진행: 이 영화에서는 ‘내가 모르는 것은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요. 특히 인물들의 마지막을 처리하는 방식이 그렇죠. 각 인물들에게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도 있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결론을 모두 열어 준 것도 감독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난 섣불리 희망 같은 건 얘기 하지 않겠어’라는 굉장히 단호한 의지인데요, 실제로 영화를 만들면서 가져가고 싶었던 목표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유지영: 저는 미대를 나왔어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영화도 만드는데 이런 창작의 과정에서 항상 경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술로써 메시지를 던지는 거예요. 저도 희정이처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모르고 저에게도 인생은 한 번뿐이고 모든 것이 첫 경험인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예술의 몫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항상 예술이란 사회 혹은 개인의 거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 때도 ‘2015년도 대구의 어떤 젊은이의 풍경으로 큰 퍼즐 속 한 조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비전이 있었어요. 차이밍량 감독이 했던 말 중에 “세계의 미래를 걱정하면 상업 영화고, 나의 미래를 걱정하면 예술 영화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되게 와 닿아요. 내가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 서툰데 영화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그나마 서툴지 않기 때문에 꾸준히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모르는 것까지 내가 말할 수 없고, 저 역시 어떤 사람에게 악한 사람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모호하다는 얘기를 듣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답을 내리는 영화를 만들진 못하고 오히려 질문을 드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진행: 감독님이 얘기하는 부분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는 생각에 드네요. 동시대를 얘기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나부터 스스로를 굉장히 열심히 들여다 봐야 하는 작업이거든요. 내가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아니면 내가 이 주인공을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굉장히 치열하게 해야 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상당히 깊숙하게 들어가는 작업일 수 있는데요, <수성못>이라는 치열한 과정을 두 분이서 통과하면서 각자에게 어떤 식의 위로가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이세영: 희정이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또 저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아쉬운 부분이 많은 사람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고 그런 과정을 지나면서 저도 제 스스로가 부족한 면을 좀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됐어요. 내가 희정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은데 나도 착하지만은 않구나, 나도 오지랖이 넓은 스타일이구나, 그렇게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영화를 촬영하던 당시에도 희정이랑 너무 비슷하게 살아서 누가 연락하면 “바쁜데 왜 전화해!” 이런 식으로 굴었거든요.(웃음) 모두 다르다는 걸 알고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게 된 것 같아요.
유지영: 이 영화를 통해서 통과의례를 지난 것 같았어요. 단편을 6편 작업하고 이게 첫 장편작인데, 다 제 이야기를 했거든요. 저에 대한 이야기, 혹은 제가 투영된 이야기를 했는데, <수성못>을 찍고 나서는 이제는 내 이야기를 그만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 것 같아요. 또 개봉일에 <수성못>을 보면서 참 희정이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20대 때의 저를요. 그 때는 정말 힘들고 치열하게 살았는데, 누구도 ‘너 정도면 괜찮지 않니’하며 저를 위로해준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 그 때는 힘들어서 몰랐지만 지금 영화를 보니 희정이를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러면 제 자신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진행: 이 영화는 청춘들의 얘기잖아요. 젊은 세대를 그려내는 영화에서는 그들을 둘러싼 기성세대를 묘사하는 방식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기성세대들은 주인공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구체적으로 미치지 않는 모호한 인물들입니다.
유지영: 강신일 배우가 연기한 ‘박 씨’라는 인물은 말씀하신 대로 이 젊은이들의 곁을 끊임없이 맴돌면서도 어떤 긍정적인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에요. 어른들이 없는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서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박 씨의 입퇴장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희정의 엄마 같은 경우는 희정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어른들이 없는 세계라는 것은 박 씨를 통해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어른들은 스치듯 지나가게 연출을 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빠도 있지만 없는 듯한, 대구의 가부장 같은 느낌으로요.
진행: 희정이가 서울에서 '퍽치기' 당하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요? 어쩌면 그 장면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관객 분들도 있을 거예요. 잘 해결해나가면 될 것 같은데, 왜 한 번 더 이런 시련을 만들까 하고요. 그런데 이런 방식이 감독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절대 순탄하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 어쩌면 이 감독의 장기라고 느껴졌는데요, 편안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상황들이 싫어요?(웃음)
유지영: 시나리오를 쓸 때 수정을 거치면서 여러 장면이 바뀌잖아요. 그런데 그 장면만은 처음부터 쭉 있었던 장면이었어요. 오히려 거기서 거슬러갔겠죠. 목표가 없이 ‘인 서울’만을 바라보고, 내가 무슨 과를 가고 싶은지, 왜 편입을 하고 싶은지, 왜 서울을 가야 하는 지 모른 채 가던 이 아이에게 네가 '뭣이 중헌지' 알아야 한다는 장면이기도 하고요. 영화에서 감독은 어쩌면 이 세계를 창조해낸 신이잖아요. 여기서 심리적인 타격이 있는 방식으로 각성을 한 번 주고 싶었어요. 너에게 세상이 녹록하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이상 서울에 온 것만으로는 잘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진행: 그 씬을 중심으로 거꾸로 이 영화를 돌아보면 굉장히 다른 느낌으로 영화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장치가 있어요. ‘영목’이 만들고, 결국엔 ‘희준’까지 가세하게 된 자살클럽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중요한 축인데요, 나이브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들에게 죽음은 삶에 대한 예찬과 또 다른 방식의 매혹적인 소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럼에도 작품 안에서 죽음을 다루려면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야 할 텐데요, 게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동반자살이라는 소재는 무겁고 대하기 어렵고 극으로 만들려면 난감한 이야기인데 자살클럽은 어떤 의도로 연출했나요?
유지영: 이 영화는 희정을 중심으로 따라가는 플롯인데, 영목은 희정과 대비되는 위치에 있어요. 희정이 빛이고 삶을 의미한다면, 영목은 그림자, 죽음을 감염시키는 저승사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희정과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따라서 죽음의 무게를 대변하는 입체적인 요소가 필요했는데 그 때 떠오른 소재가 동반자살이었어요. 항상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거나 혹은 충동적으로 죽으려고 하는데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서 나의 삶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자살예방센터에 취재를 갔을 때 처음에는 기록일지들을 보면서 좀 더 드라마틱한 아이템을 시나리오에 끌어오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들은 내 옆에서 내일 죽는다고 해도 내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평면적이고 피상적인 묘사는 피하려고 했어요. 이를테면 내가 지금 목을 매려고 자살을 시도하는 그 순간에도 바퀴벌레가 있으면 '왁' 하고 놀랄 수 있잖아요. 그런 부분이 저에겐 중요했습니다. 영목과 자살클럽은 관객에게 죽음을 상기시키는 기능을 같이 하길 원했죠.
진행: 마지막 장면 이후 희정의 모습을 관객은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희정의 마지막 표정을 보며 ‘쟤가 바로 집으로 갈까?’ 아니면 ‘설마 수성못으로 걸어 들어갈까?’하며 아리송해지죠. 배우도 그 장면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많았을 텐데요.
이세영: 마지막 장면 촬영을 앞두고 대사 수정을 계속 했어요. 그런데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 것은 저도 싫었던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때에도 저는 50대 50이다, 희정은 살았을 수도 있고 금방이라도 물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연기를 했습니다. 물에 뛰어 들어도 죽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다시 살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요”라는 대사가 있잖아요. 수성못의 물을 바라보면서 ‘정말 모르겠다’는 감정으로 연기를 했어요.
관객: 영화 속 희정은 곧 제 모습이었어요. 저도 대구에서 어떻게든 서울에 오겠다고 졸업하고 올라와서 살고 있는데, 꼭 목표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요새 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를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동생 희준이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이 무슨 책인지 궁금했습니다.
유지영: '이방인'이라는 책입니다. 희준이 읽었던 부분은 마지막 구절인데요, 그 장면에서 희준이 도서관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잖아요. 그 장면을 희준이 이후에 자살클럽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복선처럼 생각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방인'이 계속해서 사회의 대열의 이탈자로 살면서 편입되지 못하는 사람이 대중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어주겠다며 조롱하는 내용이거든요. 그것이 희준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객: 영화를 보면서 영목의 심리에 대한 갈피가 잘 잡히지 않았는데요, 영목이 왜 그렇게 자살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적극적으로 자살클럽을 만들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동영상을 찍지만 그게 단순히 공감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인지, 영목에 대해서 감독님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유지영: 저도 처음에 시나리오 쓸 때 굉장히 고민을 했던 부분입니다. 우선 희정과 영목은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인데, 둘의 공통점은 목표가 없이 실행한다는 거거든요. 영목 역시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죽고 싶은지 모르는 채로 중증 우울증을 가진 ‘미루’라는 여자친구한테 우울증이 감염이 된 거죠. 그래서 무기력하고 만성적인 죽음,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죽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희정도 맹목적으로 인 서울만 하려고 하잖아요. 그 둘이 그렇게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모르면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이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제 의도였습니다. 영목의 전사(前史)를 넣은 적도 있어요. 아픈 어머니가 있고, 요양원에 있고, 여자친구는 우울증이고, 삶이 너무 우울하고, 그런 내용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넣다 보니까 영목의 드라마가 너무 강해지면서 습관적으로, 또 만성적으로 자살에 젖어있는 모습에 방점이 찍히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단서인 미루 하나만 남겨놓고 그 원인을 보여주는 대신에 자꾸 죽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관객: 주인공이 묻지마 폭행을 당한 후에 씩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와서 울어버리잖아요. 그런데 지갑을 뺏겼는데 어떻게 햄버거를 사먹을 수 있었는지…(웃음)
이세영: 예리하시네요. 저도 감독님께 여쭤봤어요. 가방 안에 굴러다니는 동전이라거나 바지 주머니에 천 원 몇 장이 있었겠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사 먹었다고 설정을 했는데, 사실 그때 당시 나온 신제품을 먹었거든요. 촬영이라고 좋은 걸로 주시더라고요. 감정연기를 하면서 햄버거를 먹는데 치즈가 막 늘어지고 이걸 후루룩 해서 먹을 수도 없고 우는데 치즈가 막 흘러가지고 더럽다고 NG나고.(웃음) 저도 햄버거에 굉장히 의문을 많이 가졌거든요. 왜 그랬나요?
유지영: 저는 항상 주머니에 천 원짜리를 갖고 다녀요. 지갑은 잃어버려도 집에는 가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너무 자연스럽게 그렇게 설정을 해버린 것 같고… 햄버거의 경우는 저희가 7000만원으로 만든 저예산 영화 아닙니까.(웃음) 가게를 섭외하는데 그 조건으로 신상품이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근데 치즈가 쭈욱 늘어나고 우는데 질질 흐르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여섯 번 정도 찍다가 햄버거를 바꿨습니다. 그 햄버거가 아니면 섭외가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웃음)
관객: 희정이 엄마랑 싸우고 나서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희준에게 듣는 말은 ‘여자라서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인데요. 영화 속 희정은 여성을 향한 폭력에 다양하게 노출되지만 남자형제에게 여자라서 편하게 사는 거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장면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유지영: 그 상황에서 보면 희준이란 인물은 군대 문제로 정체가 되어있는 인물이잖아요. 희정과 영목은 그냥 목표가 없이 달려나가고 있다면, 희준은 그 중간에서 머무르고 있고 그런 상황들이 숨막혀오는 인물인데, 자기 입장에서 보기에는 달려나가는 사람이 부러운 거죠. 그게 순간 자기 안에서 꼬인 거였어요. 그 씬은 희준의 감정에 제가 이입을 해서 썼는데, 희준의 입장에서는 그 순간만큼은 누나가 부러운 거예요. 누나의 모든 걸 알지도 못하니까요. 누나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희정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른 채 얘는 목표도 있고, 달려나가고, 꿈도 있는데 나는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관객: 주인공이 호수에서 헤엄치면서 날갯짓을 해야만 바다로 갈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자각한 오리배처럼 느껴졌는데요, 혹시 지금의 두 분이 극 중 희정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유지영: 달리다가 넘어져도 되니까 그냥 너무 힘들 땐 콱 넘어져버려서 옆에 뭐가 지나가는 지 봤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고속도로를 달리면 풍경들이 쌩쌩 지나가잖아요. 그런데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는 들꽃도 보이고 하늘도 볼 수 있고 창을 내려서 향기도 맡을 수 있죠. 그렇게 비포장도로 가듯이 좀 천천히 가고, 힘들면 좀 세웠다 가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이세영: 저는 희정과 굉장히 비슷했어요. 맹목적으로 발버둥치고 열심히 하면서 목표가 ‘여기서 벗어나자’인 거요.(웃음) 다이어리 앞장에 항상 한 해를 다짐하면서 쓰는 글이 있는데, 2015년에 써놓은 걸 보니 ‘가끔 앞만 보고 가면 맞게 가고 있는지 모른다. 잠깐 멈춰서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뒤도 한 번 돌아보고, 주변을 좀 돌아보면서 천천히 걸어가도 된다’는 말을 썼더라고요. 누가 쫓아오는 거 아니니까 좀 여유를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진행: 우리는 관성적으로 젊은 세대들은 꿈 꿔야 하고, 도전해야 하고, 뭔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잖아요. 뭔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스스로 굉장한 실패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고 매체도 그런 것들을 강요하죠. 최근 젊은 감독들이 만든 작품들을 보면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반가운 시선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유지영: 많은 관객분들이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다 눈에 담아서 가겠습니다. 저희 영화와 배우들, 영화 속 희정, 영목, 희준을 마음에서 오래오래 안아주시길 바라며 조심히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이세영: <수성못> GV를 하면서 가장 많은 관객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감사드리고, 저희 영화 오래오래 기억해주세요.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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