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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세기말의 사랑〉: 순간을 바라보기

by indiespace_가람 2024. 2. 8.

〈세기말의 사랑〉리뷰: 순간을 바라보기

*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영은 님의 글입니다.

 

 

 

〈세기말의 사랑〉에 두 가지 함의가 있다면 “시들지 않는 사랑”과 “치정”일 것이다. 다사다난하게 얽힌 인물들의 사연은 언뜻 복잡한 관계의 치정처럼 보이지만, 애틋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엮인 이들의 드라마에는 시들지 않는 사랑이 있다. 생계와 주거가 불안정한 삶에 사랑까지 끼어들 자리는 없는 것 같지만, 인물들을 조금씩 지탱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인 것 같다. 물론 ‘세기말’이라는 시대의 운명을 향한 부푼 기대와 불안처럼, 상상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생각보다 강렬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떤 용기를 통해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때로는 화면을 넘나드는 손길을 통해 사랑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다.

 

 

 

 

공장의 경리과장 ‘영미’는 동료 배송기사 ‘도영’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다. 영미는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터본 적도 없지만, 도영이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영미는 미수금을 직접 메꾸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영미는 간병하던 치매 노인인 큰어머니의 장례마저 치르고, 공금 횡령 방조로 수감 생활까지 하게 된다. 영미의 몸에는 오래전 화재 사고로 난 화상 흉터가 있는데, 이 모든 불화의 원흉인 사촌오빠는 심지어 그 사이 영미 몰래 집을 팔기까지 한다. 〈세기말의 사랑〉은 그 잿더미 같은 비극을 좇기보다 사건의 이면을 느슨하게 밝혀낸다. 인물들은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처지를 언변 하지 않고, 대신 일상의 풍경들을 작게 조각내는 카메라를 통해 그 순간을 줄기차게 들여다본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검은 화면에 둔탁한 소리의 감각이 새겨진다. 영미가 전화기 다이얼을 달칵이며 누른다. 이미지가 제시되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는 영미의 목소리가 선행된다. 첫 컷은 영미의 시점으로 흑백의 뿌연 화면이 떠오른다. 영미의 손가락이 김이 서린 창문에 작은 하트를 그린다. 그 투명한 하트 너머로 멀리 보이는 도영에게 초점이 이동한다. 영화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결정한다. 이미지의 앞면과 뒷면을 지탱하는 카메라, 그 위치와 거리에서 또렷한 사랑의 순간을 연결한다. 영미의 마음 한가운데 깊숙이, 바로 도영이 있다. 〈세기말의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엇을 포착한다. 영미가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처럼, 카메라는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여러 인물을 연결한다.

 

출소한 영미 앞에 불쑥 찾아온 ‘유진’은 자신을 도영의 아내라 소개한다. 영미야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도영이 빼돌린 회삿돈이 송금된 통장 명의에 적혀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두부 대신 팩에 담긴 두유를 손에 쥐어주며 대뜸 그 돈을 갚겠다는 그의 말에 영미는 정중히 사양하고 돌아선다. 그러나 영미가 살던 집은 굳게 잠긴 문에 임대 문구가 붙어있어 갈 곳이 없어졌고, 유진은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곁에 있어야 할 보호자가 당장은 부재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그래서 다시 만나게 된다. 사실 유진과 도영의 관계 또한 이런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말하자면 순애보적인 사랑이었다. 〈세기말의 사랑〉은 인물 간 복잡한 사건들이 뒤얽혀 서사적인 구성과 전개에 다소 분란한 지점이 있지만, 그 짜임에 있어 영화가 가진 강점 또한 분명하다고 느꼈다. 혼자가 아니라 타인의 자리만큼의 여백을 두며 ‘함께하기’를 망설이지 않아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안에서 돌봄과 노동의 문제에 직면한 두 사람은 그 시간에 놓인다.

 

 

 

 

조금 과장하면 인물들의 ‘손’에 운명이라도 달린 듯, 서로에게 난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다고 영화는 믿는 것 같다. 밤낮없이 노동하던 영미의 시간은 종종 다이얼을 누르거나 재봉질하는 손(혹은 발)처럼 잘게 조각나곤 했는데, 영화는 끼어들 틈 없어 보였던 클로즈업의 연쇄나 아예 한쪽으로 치우쳐진 인물의 배치에서 불쑥 호의의 얼굴로 마주하는 이들을 담아낸다. 유진 앞에 도로 나타난 영미는 식판에 엎어져 있는 유진의 손을 꺼낸다. 여기서 카메라는 그 손을 닦아주는 영미의 손을 찍는다. 비좁은 화면을 가득 채우던 개인의 손들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포개어지는 셈이다. 시작과 함께 다이얼을 꾹꾹 누르던 영미의 손은 종이에 빨간 도장을 찍는 손으로 옮겨간다. 흑백에 가려져 있던 색깔이 점차 화면에 드러나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세계의 변화를 읽어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미의 팔에 난 화상 흉터를 본 유진은 꼭 ‘맨드라미’ 같다고 말한다. 구불구불한 선들이 겹겹이 쌓인 난색 계열의 꽃이고, 꽃말은 다름 아닌 ‘시들지 않는 사랑’과 ‘치정’이다. 유진은 영미에게 그 흉터를 만져 봐도 되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영미는 유진의 손을 잡아 자기 팔에 갖다 댄다. 불화의 공간에서 빠져나온 신체의 일부를 카메라가 바라보기까지, 장애와 비장애의 이분법을 휘두르는 사회의 풍경에서, 누구든 자신을 증명해 내야 하는 존재는 없다. 영화는 그러길 요구받는 현실을 증명해 내야 할 뿐이다. 그렇게 개인이 짊어지던 몸, 그리고 존재는 이제야 화면으로 드러난다. 유진의 곁에는 손으로 머리를 만져주는 동생이 있고, 재봉질로 옷을 만들어 입혀주며, 얼굴과 발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영미가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유진의 집에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영화는 여러 사정과 오해로 가려진 시간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공생관계의 이들을 점차 살가운 연대의 풍경으로 변모해 나간다.

 

 

 

 

흑백의 세기말에서 컬러의 새천년으로 도약의 시간을 건널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잘려 나간 흑백의 시간을 컬러의 시간으로 회수하기도 한다. 세상의 마지막을 앞두고 도영에게 도움을 청했던 영미는 끔찍한 장례식장에서 벗어나 잠깐 호텔에 머문다. 영미는 창밖의 대관람차를 바라본다. 극 중에서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못 탄다”는 말은 영미와 도영 각각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멀리서만 올려다보던 대관람차가 어두운 밤에 가까이서 반짝이고 있다. 다만 초점이 맞지 않아 형체가 흐린데, 이는 도영의 시선으로 재차 비춰지면서 선명해진다. 그런 두 사람이 먼 거리에서 바라보던 풍경, 어떤 시간을 경유해서야만 깨닫는 마음, 모든 오해와 역경이 풀어지고 나서야 밝혀지는 순간, 말하자면 이 플래시백으로 하여금 흐릿한 이미지가 걷히고, 영화가 마침내 선명해지는 듯하다.

 

브라운관에서 종소리와 함께 전파되는 새해의 풍경은 온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떠들썩했던 한때가 되었다. 결국 목숨은 건재하고, 세상은 멀쩡하다. 인물들은 “위장결혼”과 “불륜”이라는 불가해한 사랑으로 시끄러운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영화 또한 그렇게 명명되도록 흘러가지 않았다. 〈세기말의 사랑〉은 그 순간순간의 사사로운 사랑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영화다. 대일밴드로 감싼 손가락이 아닌, 네일아트로 꾸며진 정갈한 손톱. 도영의 시선인 마지막 장면의 이 클로즈업은, 시작하며 먼 거리의 도영을 바라보던 영미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 카메라는 가까이서 영미 얼굴의 다채로운 찰나를 비춘다. 여기에 그 너머의 무엇(가로막힌 벽이나 어떤 대상)을 덧대지 않는다. 비로소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세기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세기말의 사랑’을 완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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