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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미망〉: 살아온 나에게 전하는 성숙한 내가

by indiespace_가람 2024. 12. 31.

〈미망〉리뷰: 살아온 나에게 전하는 성숙한 내가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예송 님의 글입니다.

 

 

지울 수 없게 펜으로 그릴 것
틀리더라도 그대로 계속 둘 것 
한 번에 할 수 있는 만큼 선을 최대한 길게 쓸 것 
시작하면 반드시 완성할 것 

⁃ 영화 〈미망〉 중 

 

영화 〈미망〉 포스터

 

인생 그려보기

 

도통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 불편함을 이만치 껴안고 제 인생은 뜻대로 가지 않는다는 한탄만 연발된다. 단번의 실수라도 오점은 지워지지 않고, 눈초리를 따갑게 내세워 삶을 쏘아보지만 결국 내 인생인지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날의 나는 오늘의 나를 참 미워했고, 원망했으며, 잊을 수 없는 흔적으로 기억의 방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만남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연(緣)을 생성한다. 대상은 생명이 깃들어 있을 때도 있고, 까무룩 회신조차 돌아오지 않을 사물이 되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것과의 우연한 만남은 당최, 어쩌다를 연이어 말하게 하는 미궁의 근원이 되고 결국 끝까지 쫓아가 기억을 헤집다가 지치기를 반복한다. 문제조차 희미하지만, 그에 응당한 답이 존재할까. 결국 마주한 사람에게 미소를 짓는 것으로 나만의 회신을 남긴다. 

“우리가 어쩌다 이런 사이가 되었을까”와 같이 질문이 매번 등장한다. 발화의 지점을 파헤쳐 보면 ‘너와의 관계가 틀어질’까에 대한 불안 혹은, ‘길어질 인연에 대한 직감’이라 본다. 우연함 속에서 파생되는 의미들은 의도치 않은 순간 삶에 비집고 들어와 때로는 살아갈 하나의 의미로 확장된다. 이를 지칭하는 용어는 매번 달라질 테지만, 때로는 사랑, 성장, 경험으로 와닿는다. 

영화 〈미망〉은 타인의 모습으로 반추하는 우리의 이야기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 속에서 보편성이 고개를 들이밀어 곁에 머문다. 세 막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구성은 어디선가 겪었을 과거의 인연을 널리 퍼지게 한다. 

 


흔적 남기기

영화 〈미망〉 스틸컷


 영화의 시작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반가운 인연을 만났다는 듯 서로에게 건네는 안부에 내심의 기대가 담겨있다. 변한 게 없다며 여자는 묻고 남자는 “변한 게 뭐가 있나, 그냥 시간만 가는 거지”라는 답을 남긴다. 영화는 시작부터 물리적 시공간의 경과에 따라 쌓이는 지층을 넌지시 엿본다. 시간을 분절시켜 틀린 그림을 찾다가 달라진 점에 원망하거나, 섭섭해하지 않는다. 시간을 선으로 곧게 늘어뜨려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나를 추정한다. 우리는 그렇게 쌓여간다. 

영화는 실제로 1막에서 3막까지 이어지는 물리적 시간의 소요 기간이 4년이 걸렸다. 긴 시간의 제작 기간만큼 인물들이 걸었던 거리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유입의 연속으로 다른 걸음걸이의 이들로 채워졌다. 매일의 날씨가 다른 만큼 옷차림도 상이해졌으며 머리는 길어졌다가도 짧아진다. 2막에서는 1막과 똑같은 거리를 걷는 여자가 등장해 새로운 인연과 그 길을 걷는다. 매번 올 때마다 헷갈린다고 전했던 여자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길을 안내 받으며 집으로 귀가한다. 다르지만 비슷한 구조의 남성 두 명이 여자와 거리를 걷고 있으며 장소의 공유를 통해 길 위에서의 기억은 한 층 더 쌓여간다.
 

영화 〈미망〉 스틸컷


3막에서는 1막에서 마주한 연인이 지인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난다. 서로를 통해, 마음속에 인상을 남겼던 인물의 등장으로 위 장소는 개인의 ‘의미’를 구축한 나의 장소로 거듭난다. 여기서 주목해 볼 지점은 그 발생의 지점이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지속해서 사멸을 하나의 계기로 연장한다. 1막에서는 여자가 최근에 돌아가신 엄마를 언급한다. 그녀는 엄마의 죽음 이후 전화번호를 정리했다. 남자는 그 연락처에 남겨졌다. 2막에서는 1막에서 보였던 거리가 변화했다. 공사장, 건물 등이 사라지고 생성되며 거리의 풍경이 변화했다. 즉, 지난 거리가 소멸되었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는 지속해서 멸(滅)의 기운이 들어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음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제와 동일한 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차림새와 어투로 일상을 보낼지라도 매일의 주변은 시시때때로 변화하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땐 이전과 달라진 풍경이 우리를 마주한다. 다시 말해 미망(彌望 : 멀리 넓게 바라봄)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매일의 시간은 어제와 이어져 재탄생하며, 어제의 의미는 오늘이 되어, 또 다른 모습으로 확장된다. 즉, 우리는 매일 생동한다. 사라진 것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문을 두들겨 자신의 자리를 확보한다. 

영화 〈미망〉 스틸컷


적응하기 어려운 형태의 소멸과 소실은 흔적이 되어 우리를 뒤쫓는다. 자국이 남은 삶이 어제와 같을 리 없다. 그러나 담배를 끊었다던 남자가 여자와 헤어진 후 다시금 입에 담배를 무는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 승객이 내린 후의 빈자리를 좇는 카메라의 시선처럼, 공허의 상태 속에서도 새로운 경우와 사례와 사정이 발생한다. 

 


내일 추정하기

 

빈자리의 버스 좌석으로 곧 다른 이가 앉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거닐었던 거리를 이들은 또다시 걸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이와 함께 걸을지, 홀로 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거리께에서 이순신 동상과 피맛골에서 멈칫하며 무언가를 떠올릴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흔적은 너그러이 품 안에 안겨 기억 위로 한 층 쌓였고 과거의 우리를 통해 미래를 에측해 볼만 하다. 


원하지 않는 대로 그려지는 것 같아 두려웠던 지난날을 떠올렸을 때 인생이라는 그림은 마냥 친절하지는 않다. 예상치 못하는 순간에 부끄러움을 안겨주기도, 불안을 엄습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운명처럼 와닿았던 순간들이 우리의 거름이 되어 미래의 나를 완성시킨다. 모든 경험과 기억은 나의 자산으로 귀화한다. 펜을 휘갈기며 무언가를 담을 작정을 했던 순간은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았을지라도 나의 이름으로 자여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잠에 빠져 다음날의 기상을 이행하는 우리에게 지루하게만 보였던 하루하루가 나의 거름이 된다는 뜻이다.

크기와 상관없는 변화가 매일 같이 발생한다. 그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우리들. 〈미망〉은 종로-을지로 일대를 걸어가는 여러 인연들을 포착한다. 군중의 틈새 속에 있는 우리, 먼 미래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보낼 편지 속에서 오늘을 어떤 날로 기록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편지 속에서 기억될 우리는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숨을 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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