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버텨내고 존재하기〉: 사람들의 장소.

by indiespace_가람 2023. 11. 14.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 스틸컷

 

사람들의 장소.

버텨내고 존재하기 소피의 세계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태현 님의 글입니다.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음악에 대한 영화이지만, 장소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1935년 개관해 오늘날까지 관객을 맞이하고 있는 광주극장은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과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극장의 매표소, 상영관, 영사실, 사무실, 계단과 복도의 모습이 차례차례 등장한다. 공간들에 대한 클로즈업, 혹은 무던한 미디엄 쇼트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광주극장의 전경을 비추는 풀 쇼트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버텨내고 존재하기〉가 광주극장을 소환하는 방식은,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는 극장 구조물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통해서다.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음악과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풍경 속 한 명의 사람으로 돌아간다. 노래를 부르던 이는 고개를 돌리면 옆자리에 앉아 있고, 기타를 치던 이는 매표소에 앉아있다.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겹쳐지기도 하고, 때론 부딪히기도 한다. 영화 속의 광주극장은 ‘영화’에 대한 애상과 환상이 묻어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풍파에도 꾸역꾸역 버텨내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로 마음에 남게 된다.

 

〈버텨내고 존재하기〉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수많은 (각자의 애정과 관심을 가진) 타인을 통해 기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소피의 세계〉가 떠올랐다. 〈버텨내고 존재하기〉가 극장이라는 장소를 통해 타인과 나의 자리를 떠오르게 한다면, 〈소피의 세계〉에서 그 기능을 하는 것은 소피의 블로그이자 내레이션이다. 여행객을 맞이하는 종구와 수영은 몇 년 전 자신들의 집을 찾았던 소피의 블로그를 발견한다.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풍파 앞에 놓여있던 둘은 소피를 어떻게 기억했을까. 혹은 그날의 자신들을. 소피의 시선을 경유해, 그의 선의가 담긴 내레이션을 경유해 과거의 순간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소피의 세계〉는 우리의 시공간 안에 타인의 자리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음을 알린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만 아니라, 그때 놓인 사람들 사이의 나를 돌아보는 일일 테다. 자신의 해석으로 수영을 몰아붙이던 종구는 그럼에도 그를 선의로 이해하는 소피의 말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여전히 함께 존재하고 있는 종구와 수영을 불안하게만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들이 버텨내고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된다.

 

 

영화 〈소피의 세계〉 스틸컷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던 2017년의 초겨울, 켈리 레이카트의 〈어떤 여자들〉을 보기 위해 광주극장을 찾았었다.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보고 나와, 마치 오늘처럼 겨울의 문턱 앞에 서 있음을 느꼈던 그날을 떠올렸다. 파란 노을과 극장 앞에 띄워져 있던 영화 간판, 때가 탄 하얀 극장 입구에 놓인 매표소. ‘돈을 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따라 마시면 되는 걸까’ 생각하며 쳐다본 선반 위 커피메이커. 빛이 바랜 옛날 영화 포스터와 나프탈렌 냄새가 나던 화장실. 장소에 대한 아득한 기억과 함께 2층의 오래된 의자에 같이 앉아 영화를 봤던 열댓 명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어떤 애정과 관심으로 그곳에 나와 함께 앉아 있었을까. 지금 다시 떠올린다고 해도, 그들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마음으로 광주극장을 찾았는지, 그날의 일을 왜 여전히도 가깝게 기억하고 있는지 떠올릴 수 있다.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 스틸컷

 

 

영화가 끝나고, 마치 곧 사라질 곳을 마주하는 것 마냥 극장 주변을 서성였다. 영화에 대한 나의 작은 애정과 집착은 광주극장처럼 조금 낡아버린 듯했다. 다가오는 시간이 두려웠고,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다. 그 마음을 극장의 풍경에 투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광주극장은 미래의 백 년을 상상하며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어쩌면 그날 내 옆자리에 앉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광주극장 100년 관객아카이브). 광주극장을 지키는 이들처럼, 나도 인디스페이스의 관객 일원으로 영화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수명이 다한 것 같던 같이 느껴졌던 영화에 대한 애정은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있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날들에서도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지나치고 있었고, 이들을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심들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동료들 사이에 나를 위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 ‘버텨내고 존재하다’보면 지나온 시간을 반추할 수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 또한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때 존재했던 마음들과 가능할 수 있었던 관계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혹은 서로에게 조금이나마 너그러워질 수 있다. 〈버텨내고 존재하기〉에 등장하는 뮤지션들의 말을 경청하는 나를 지켜보며, 〈소피의 세계〉의 소피처럼 사람들을 선의로 이해해 보겠다 결심한다. 나의 존재 안에 사람들의 자리를 남겨두겠다 결심한다.

 

 

* 작품 보러 가기: 〈소피의 세계〉 이제한 감독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