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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 Review] 〈너와 나〉: 너라는 상(像)이 맺힌 나의 세상

by indiespace_가람 2023. 11. 7.

〈너와 나〉리뷰: 너라는 상(像)이 맺힌 나의 세상

*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영은 님의 글입니다.

 

 

 

옅은 빛의 화면으로 파고드는 햇살은 저편의 수평선처럼, 혹은 꿈결처럼 아득하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아이들, 사이를 오가는 작은 원반들, 곳곳에 띠는 활력의 소리와 움직임들, 〈너와 나〉는 원초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출발한다. 우리가 물체나 사물을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빛이 통과되어야 한다. 눈 안에 있는 수정체가 빛을 통과시켜 망막에 상(像)이 맺힌다. 카메라의 렌즈는 빛을 저장하여 상이 맺히는 표면에 닿는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조절하여 선명한 상과 움직임을 기록한다. 빛을 저장하는 장치로써 카메라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고, 이를 포착된 이미지로서 기억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너와 나〉는 빛이 화면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화면 안에 고여서 응어리가 진 것처럼 화사하고 뿌연 밀도를 유지한다. 영화가 이토록 빛의 감각을 끌어안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와 나〉는 그 빛을 가득 담아내어, 너라는 상이 맺힌 나의 세상을 직시하는 영화다.

 

 

영화 〈너와 나〉 스틸컷

 

 

영화의 첫 시작을 떠올려 보면, 카메라는 학교 운동장을 얼마간 응시한다. 누구의 시점인지 아직 파악되지 않는다. 바깥을 향해 있던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면서 어느 교실 안에 위치함이 드러난다. 카메라는 창가 자리에 엎드려 있는 세미를 지나쳐 교실 뒤편에 멈춘다. 두 학생이 프레임 아웃 되자 거울에 꿈에서 깬 세미의 뒷모습이 비친다. 고요한 시선의 이동을 깨고 이어지는 다음 장면은 눈물이 맺혀있는 세미의 얼굴이다. 운동장에서 원반던지기하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는 세미에게 저 바깥의 소리이고, 불길한 꿈에서 깬 그는 앞에서 보인 세계의 풍경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먹먹한 시청각적 심상을 머금은 듯한 세미의 화면에서 말없이 꿈처럼 응축된 슬픔의 정념이 전해져 온다.

 

 

영화는 왜 바깥 풍경에서 내부로 향해야 했을까. 그리고 잠에서 깬 세미는 왜 거울에 비쳐야 했을까. 두 가지 의문점이 든다.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내부로 드리우는 빛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거울에 맺힌 상은 빛이 반사되는 현상이다. 꿈에서 깬 세미가 거울에 비친다. 영화는 세미를 여백에 홀로 남겨두는 동시에, 여기에 세미의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세미는 하은이 죽는 꿈을 꾼다. 우리는 영화에 도사리고 있는 불길한 기운이 죽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세미의 상이 맺힌 세계의 한가운데에는 사랑이 있다. 영화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지만, 결국 영화가 찍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표면뿐이다. 세미가 꿈에서 본 생생한 감각을 짚어나가는 〈너와 나〉는 그 어떤 수사를 생략하고 온몸으로 사랑을 향해 달려 나가기로 한다.

 

 

영화 〈너와 나〉 스틸컷

 

 

〈너와 나〉는 수학여행 전날 하루의 기록이다. 영화는 하은의 손과 발을 바라보는 세미의 시선을 따라간다. 비누 향이 배인 손, 하얀 각질이 돋은 발, 절뚝이는 하은의 다리를 바라보고, 공원에서 만난 개를 계속해서 마주하지만, 우리는 하은이 무엇을 보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은은 자주 연락이 두절되고, 뒤늦게 세미 앞에 나타나므로, 세미는 하은의 존재가 멀고도 가까운 것이라 단념하게 된다. 세미는 그런 하은을 찾아다닌다. 두 사람이 꼭 끌어안고 서로를 마주보기까지 영화를 이끄는 것은 오로지 세미의 감정이다. 노래 한 곡으로 세미의 답답한 마음이 전해지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슬픈 이별 노래여서가 아니라, 내내 맺혀있던 상이 사라진 감정의 응어리를 똑바로 응시하려는 영화의 태도에서 나온다. 노래방 화면 속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세미의 상(像)을 영화의 스크린에 영사하듯 마음의 물성을 시공간에 불러들인다.

 

 

영화에서 상기되는 세 번의 시각은 세미를 둘러싼 시공간에서 비롯된다. 공원에서 내내 침투하는 시계 초침 소리, 그가 노란색 꽃 더미를 헤집고 지나가는 자리에 남겨진 시계, 다른 이의 목소리로 전해져 오는 시각, 동시에 이것은 낯선 개를 마주친 공간이고, 하은을 찾는 시퀀스가 두 번 반복되는 공간이고, 안산역으로 향하는 공간이다. 비슷한 쇼트의 반복, 그러나 꿈과 현실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미묘하게 조금씩 다른 풍경은 이곳이 같은 시간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세미가 화면 밖으로 사라져도 카메라는 앞뒤로 흔들리는 그네의 움직임을 부여잡듯이 그가 스쳐 간 자리를 잠깐 응시한다. 말하자면 〈너와 나〉는 시간의 경과를 통해 이곳에 무엇이 존재했는지 짚어낸다. 영화는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지만, 현재의 시간 또한 흐르듯 카메라는 시공간의 경계를 흐린다.

 

 

영화 〈너와 나〉 스틸컷

 

 

연락 두절된 하은을 찾아 헤매던 세미는 지하철역에서 학교로 돌아가 텅 빈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교실로 올라간 세미는 바깥에서 개가 짖는 소리를 듣는다. 영화의 처음, 세미와 분리된 세계처럼 느껴졌던 저 너머의 창으로 운동장의 개가 세미의 눈에 들어온다. 이어 교실 문에 서 있는 하은과 만나 세미는 개를 찾아 달려 나간다. 이때 세미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영화는 그 뒤를 따라가는 하은의 시점숏을 부여한다. 줄곧 엇갈리던 두 사람의 시공간은 평행하고, 끝내 당도한 컨테이너의 안에 갇혀있는 개들의 모습과 마주한다. 카메라가 세 번에 걸쳐 개들의 모습을 찍는 동안, 하은은 끝내 철창 바깥에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가족이었던 ‘제리’의 죽음을 보낸 하은은 공원에서 만난 개에게 ‘진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진식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다시 ‘똘똘’이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달리는 버스 안의 잠든 시간, 하얀 커튼 너머로 사라진 ‘조이’, 죽어있는 하은의 얼굴, 다시 깨어나 잠들어 있는 세미의 얼굴, 세미는 여기서 우는 하은을 바라본다.

 

 

세미가 화단의 죽은 새를 품에 안고, 컨테이너 안의 똘똘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지만, 미처 구조되지 못한 존재들에게 영화는 내가 네가 되어 죽음에서 깨어나겠다고, 꿈을 통해서라도 찾아가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세미는 하은만큼이나 찾아 헤매던 훔바바의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이 서로의 마음이 가닿는 순간 내내 불길하던 마음이 눈 녹듯 사그라든다. 〈너와 나〉는 너와 나의 하루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이 네게 닿기까지의 여정, 너라는 상이 곳곳에 맺힌 나의 세상에서 내내 하고자 했던 대체 불가한 말, 사랑을 위해 달려 나가는 시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시공간에 채워진 모든 존재들에게 네가 누구든 나는 네가 될 것이고, 우리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너와 나〉는 죽음이나 사랑을 영화 밖의 우리가 관념적으로 사유하게 두지 않는다. 사랑의 결여는 마치 애도의 부재와도 같다. 우리가 과거에 도착하지 못한 이들을 기억하는 방법은 결국 영화든 현실이든, 거울처럼 하나의 세상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의 품으로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영화가 빛의 감각을 감싸 안는 이유는 우리가 바라보고 지나치는 시공간의 기억을 떠올려 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빛을 저장하는 카메라로 하여금 그 자리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감각이 여기에 사랑이라는 형태가 이렇게나 무수하다고, 곳곳에 사랑이 묻어나 있다고, 여기에 존재가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란 리본의 물결을 분명하게 기억하듯이, 영화에서 전해지는 숨결과 활력은 사랑의 물결이다. 스스로 왜 ‘사랑’을 말해야 하는가, 떠올려 보았을 때 잠시 외부의 이야기를 첨언하자면, 나는 세월호 사건을 다룬 에세이 영화 〈오, 사랑〉을 만든 김응수 감독이 “사랑은 수만 번 인용된 진부한 단어지만, 그것만이 또한 구원이다”라고 전하고 싶었다는 말을 기억해 낼 수밖에 없었다. 이 진부한 말을 반복한다고 해서 사랑이 지닌 가치는 결코 평범해지지 않는다. 나는 〈너와 나〉가 가진 사랑의 힘을 온 마음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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