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한줄 관람평
차아름 | 거센 비바람에 혹여 꺾이고 밟힐지라도 부디 피어나길
김수빈 | 기대어 피는 꽃
심지원 | 그것의 이름이 무엇이든, 꽃은 아름답기에
추병진 | 앞뒤를 예측할 수 없는 쓰라린 전쟁 영화
김가영 | 외로운 들꽃은 향기가 진하다
<들꽃>리뷰
<들꽃> : 기대어 피는 꽃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수빈 님의 글입니다.
황량한 들판 위로 두꺼운 옷을 아무렇게나 껴입은 두 소녀가 쫓기듯 내달린다. 간신히 굴다리 곁에 숨어 숨을 고르던 차에 멀리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소녀들은 어떤 남자에게 무지막지하게 구타당하고 있던 소녀를 구해낸다. 수향과 은수, 그리고 하담은 그렇게 처음 만난다. 이들은 빈집을 찾아 숙식하고 거리에서 일상을 보내는 동년배의 가출청소년이다. 첫 만남 후 소녀들은 따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시리도록 엄혹한 겨울,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늑한 보금자리다. ‘삼촌’이라고 불리는 자를 필두로 하는 인신매매 조직은 보금자리를 미끼로 이들을 납치한다. 삼촌 밑에서 행동대장으로 일하는 태성은 제 손으로 소녀들을 끌고 왔지만 수향이 마음에 걸린다. 결국 태성은 목숨을 걸고 수향을 풀어주고 그 틈을 타 소녀들도 가까스로 도망친다. 그러나 여전히 위협은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다. 소녀들은 질긴 들꽃이 되어 현실을 헤쳐 나갈 뿐이다.
영화는 일반적인 극영화처럼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하나의 위기가 해결될라치면 새로운 위기가 닥쳐올 뿐. 영화는 소녀들의 행복했거나 혹은 반대로 지독하게 불행했을 전사를 보여주지도, 시스템 속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또래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이들을 부러워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담지도 않는다. 그저 들꽃이 살고 있는 전장 같은 들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내내 소녀들은 울부짖고, 맞고, 싸우고, 구르며 분투한다. 그러나 들판을 배경으로 시작한 영화는 마지막에도 들판에서 끝을 맺는다. 가출청소년들이 처해 있는 냉혹한 현실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상징하듯이 말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소녀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관계들이다. 누군가의 품이 필요하지만 안길 데가 없는 이들은 서로에게 기대며 녹록치 않은 현실을 헤쳐 나간다. 은수와 수향은 마치 부부 같은 관계다. 서로를 살가운 태도로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에겐 보이지 않는 연대감과 믿음이 있다. 수중에 돈이 생기자 수향에게 줄 선물부터 챙기는 은수의 모습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수향은 첫 만남부터 하담을 딸처럼 돌본다. 세상을 향해 발톱을 세우고 있던 하담도 그녀에게만큼은 빗장을 푼다. 하담이 품고 있던 비밀이 드러난 후 수향은 하담을 내쫓지만 막상 하담이 사라지자 그녀를 애타게 찾는다. 가장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듯 보이는 바울도 소녀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면서 그들 곁을 떠나지 않는다. 태성은 삼촌 수하에서 일하고 있지만 처지를 따지자면 다른 소녀들과 같다. 수향에게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지라고 소리치지만 정작 그녀 곁을 맴도는 건 태성이다. 이처럼 들꽃의 청춘들은 서로를 안거나 기대며 유사가족이 된다.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면 서로를 챙길 새도 없지만 막상 서로가 없으면 현실을 헤쳐 나가기가 막막한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어느 곳에서든 군락을 이뤄 피는 들꽃을 닮았다.
어떤 이야기는 뚜렷한 목적과 필요에 의해 생겨난다. 그러나 정반대로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오는 이야기가 있다. 박석영 감독에게는 가출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불현 듯 찾아왔다. 우연히 홍대 놀이터에서 빈병을 깨뜨리고 있는 여자아이를 본 감독은 그 날의 장면을 잊을 수 없어 시나리오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감독은 이후 가출청소년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함께 지내며 영화의 토대가 되는 그들의 현실을 목격했다고 한다. 현실을 아는 만큼 감독은 더 진중하고 세심한 태도로 임했을 것이고 결과물은 현실을 고스란히 담은 묵직한 영화가 되었다. 온실 속의 화초도, 시멘트를 뚫고 나온 들꽃도 처음에는 같은 씨앗이었다. 조금만 더 양질의 토양이 닿았다면 들꽃도 어느 꽃 못지않게 화려한 모습으로 자라날 수 있었으리라. 여전히 거리엔 들꽃들이 가득하지만 매정한 겨울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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