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 [어제영화] 윤성호 감독 DAY
<은하해방전선> + <오늘영화>인디토크(GV)
일시: 2015년 8월 28일(금)
참석: 윤성호 감독, 박종환 배우
진행: '9와 숫자들' 송재경
*관객기자단 [인디즈] 차아름 님의 글입니다.
‘뇌가 탐나는’ 감독 4명이 모여 만든 재기발랄한 옴니버스 영화 <오늘영화>가 지난 8월 20일 개봉했다. 그 중 첫 번째 에피소드인 <백역사>의 윤성호 감독과 박종환 배우, 그리고 ‘9와 숫자들’의 송재경이 8월 28일, 기획전 [어제영화] <은하해방전선>(2007), <오늘영화> 상영 후 GV를 가졌다. 금요일 저녁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GV에 참여했다. 짧은 영화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윤성호 감독(이하 윤): 불금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스페이스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대화 나눠봐요.
박종환 배우(이하 박): 안녕하세요. <오늘영화> 첫 번째 에피소드 <백역사>에 출연한 박종환입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9와 숫자들' 송재경(이하 송): 윤성호 감독님은 여기저기서 아기자기한 작업들 많이 해오신 걸로 알고 있고, 잘 봐왔습니다. 모처럼 영화를 하셨는데 뭔가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그 동안 해오셨던 다른 작업들하고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윤: 열심히 꾸준히 뭔가 작업을 하긴 했는데 스크린에 올리는 작업은 몇 년 만인 것 같아요. 그사이에 ‘썸남썸녀’, ‘출출한 여자’, ’출중한 여자’,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이런 것들을 종종 스크린에서 튼 적은 있어요. 모바일이나 웹으로 대중들을 상대하려다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레이션을 쓰고, CG, 자막, 효과음 등 미장센이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에도 다른 채널로 돌리거나 스트리밍을 멈추지 않도록 집중할 수 있게 계속해서 조잘조잘 속삭이는 게 필요하거든요. 물론 제가 즐거워서 하긴 했지만, 그런 액세서리를 다는 것에 지쳐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옴니버스를 만들 기회를 마련해주셨죠. 2013년 개막작인 <서울연애>를 보고 너무 부러웠어요. 제가 다 아는 배우들과 감독들이 이렇게 준수한 영화의 에피소드를 만든 걸 보고 저기에 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옴니버스 공모가 떴을 때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이번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 세운 원칙이 있는데요, 제 영화들을 전에 보신 분들은 살짝 갸웃할 만큼 약간 스타일이 달라요. 그냥 카메라랑 배우만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다른 감독님들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라든지, 자기 관점적인 계획들을 하고 계시길래 저는 저를 닮은 사람보다는 제가 한번 담아보고 싶은 사람, 제가 잘 모르는 사람들 얘기, 영화가 그렇게 인생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를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송: 사실 저는 <오늘영화>를 통해서 이번에 박종환 배우님을 보고 많이 놀랬어요. ‘썸남썸녀’에 나오신걸 봤는데 이번에 인상이 터프하게 바뀌셨더라고요. 근데 막상 연기하시는 거 보니깐 또 그 느낌이 나고요. 허술한 것 같지만 귀여운 듯한 느낌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다양한 모습을 가진 것 같아서 실제 어떤 성격인지 궁금합니다.
박: <백역사>의 캐릭터랑 저랑 많이 닮아 있어요. 감독님이 저를 사석에서 눈 여겨 봐주신 게 있는 것 같아요.
송: 제일 궁금했던 게 처음에 여자를 찾아가면 이상한 노래 같은 걸 부르고 있어요. 중국어로 부르는데 저는 중국어를 잘 몰라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고, 꼭 그 장면이 필요했던 건지 궁금합니다.
윤: 그 노래가 ‘호상호상’이라고 좋아하고 생각한다는 뜻이에요. 조미라는 유명한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 주제가고 실제로 조미가 불렀던 노래에요. 말씀하신 대로 굳이 넣을 필요가 없죠. <백역사>에 기타리스트 한 분이 나와요. ‘푸르내’라는 밴드의 완무씨인데. ‘9와 숫자들’에게 항상 신세를 져서, 한 번 하드록으로 가고 싶었어요. (웃음) 이 영화가 신세를 진 영화들이 있어요. 레퍼런스 삼은 영화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허우 샤오시엔이라는 대만 영화감독의 기운을 조금 빌린 부분이 있어요. 그분이 저잣거리 시시한 남녀들의 사랑얘기를 예술적으로 다뤄요. 예술적으로 다룬다는 게 엄청 파격적인 멜로나 치정을 선사하는 게 아니라 신문으로 치면 가십면에도 안 실릴 것 같은 그런 이들의 연애를 굉장히 멋진 팝송이라든지, 심금을 울리는 어떤 장면으로 잡아내는 게 있거든요. 그런 게 묘하더라고요. 보통 독립영화에서 노동자는 투쟁을 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는데 여기서는 그냥 게으른 노동자가 나와요. 술 먹고 구두신고 와서 공장에서 안전수칙 지키지 않고 일하다가 화장실 가고 싶다 그러면서 조퇴하고. 여자도 약간 나사가 빠진 것 같잖아요. 대단치 않은 일, 젓가락이나 닦고 있다가 여기선 그냥 점프됐지만 아마 핑계 대고 만두 집에서 조퇴했겠죠. 그 둘이 서로 이름도 기억 못하면서 갑자기 사랑을 말하죠. 감정 비약이 심하고 나이브한 남녀거든요. 그 남녀들한테 되게 멋진 주제가를, 애틋한 주제가를 주고 싶었어요. 이분들의 이 순간도 화양연화 같지 않느냐, 이렇게 제멋대로 장식을 해주고 싶어서 그 노래를 한 번 깔아봤습니다.
송: 안 그래도 다른 밴드 음악을 쓰셔서 사실 삐쳐있었어요. 근데 막상 보니까 음악이 너무 좋더라고요. 짧은 영화라 몇 곡 안 나오지만. 그래도 그 장면에서 실제 연주하는 모습하고 이어지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감독님 작품 특유의 깨알 같은 개그 코드들이 곳곳에 있어요. 어느 정도 선까지 제시를 하시는지, 어느 정도를 배우님께서 만들어내셨는지 과정이 좀 궁금하네요.
박: 제가 감독님이랑 네 작품을 같이 했는데, 감독님 작품에서 애드리브를 한 건 단 한 번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썸남썸녀’에서 방송에 나오지 못한 장면이 한 장면 있는데 그 장면 빼고는 없었어요. 대본엔 없지만 현장에서 갑자기 이건 어떻겠냐고 하실 때 결국엔 제가 그걸 하는 거고, 학습해서 하는 게 아니라 주문하신 걸 하니까 그게 애드리브처럼 보이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윤: 사실은 오해 없이 들으셨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진짜 준비를 덜하고 들어갔어요. 게으름으로 생각할까봐 걱정되는데. <백역사>를 찍던 작년에 너무 많은 프로젝트에 관여를 하고 있어서 좀 지쳐있는 상태였어요. 지쳐있으면 하지 말지 왜 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이걸 하고 싶었어요. 흐름에 밀려 가듯이 하는 것을 하고 싶어서. 대본이 있긴 있지만 구체적으로 쓰여있진 않았었죠.
관객: 제목이 <백역사>에요, 흑역사의 반대말. 흑역사라고 하면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인데, 백역사라는 건 따로 의미를 붙이신 게 있는지, 영화의 마지막처럼 희망차고 앞으로 아름다운 앞날을 생각해서 붙인 건지,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요. 그리고 저는 ‘푸르내’의 팬인데, 중간에 완무씨가 등장한 계기가 있는지, 뮤지션이 급하게 들어간 이유가 있는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윤: 흑역사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자기의 잊고 싶은, 깜깜한 과거. 근데 흑역사란 말을 듣다 보니까 백역사란 표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흑역사의 반대말이니깐 찬란했던 과거? 흑역사가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고, 잊고 싶은 과거라면 백역사는 언뜻 생각하면 너무 자랑하고 싶고 찬란했고 좋았던 과거일 수 있잖아요. 근데 백역사라고 하면 앞이 그냥 하얗게 화이트가 되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흑역사든 백역사든 제가 이제 나이를 많이 먹어서인지 다 그리워요. 20대때 흑역사도 다 에너지가 있었던 시절이고 어둡든 하얗든 그때의 컬러의 온도가 나를 감싸고 있던 시절이어서. 흑역사는 깜깜해서 안보이고 백역사는 눈부셔서 안보이고. 연애, 이성으로 비유를 하면 왜 여자가 이렇게 안 생길까 깜깜한 게 흑역사라면, 여자가 생겼는데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고 너무 좋은데 거기에 합당한 재미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아직 할 줄 모르는 서툴고 눈부신 게 백역사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는 ‘푸르내’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9와 숫자들’이랑 너무 오래해서. (웃음) 농담 반 진담 반인데 제가 친해지고 싶으면 작업으로 작업을 걸어요. 이성한테 영화로 작업 건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친해지고 싶은 감독이나 소설가나 음악인이나 디자이너가 있으면 괜히 하나 같이 하자고 하거든요. 그렇게 해서 좀 친근해진 게 ‘9와 숫자들’ 재경씨고. ‘푸르내’ 음악도 알게 된 때부터 좋아했어요. 근데 완무씨가 키가 큰 줄 몰랐어요. 유튜브로 항상 보면서 귀여운 소년일 줄 알았거든요. 근데 처음 만난 날 보니깐 체격이 되게 좋으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앉아계시면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또 기타를 가르치면 좋을 것 같다 해서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 친해졌어요.
관객: 감독님이 이때까지 만드셨던 다른 작품하고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슬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자전거를 타고 남자주인공이 정말 열심히 달려가는데 달리는 것에 비해 자전거가 너무 안 나가는 느낌이었어요. 의도를 가지고 연출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윤: 그 장면에서 박종환 배우가 멋진 표정을 보여주죠. 사실 대사도 없고 맥락도 없잖아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관객은 알지도 못하는데 저 배우의 표정만으로 청량감을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원래 계획은 종환씨와 비슷한 속도의 차 뒤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종환씨가 일정한 속도로 따라오는 거였어요. 근데 종환씨가 너무 청량한 표정으로 페달을 밟으니까 제가 장난끼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갔어요. 원래는 종환씨가 당황을 해야 되는데 저한테 디렉팅을 받은 게 있으니깐 계속 웃으면서 오고 카메라는 멀어지고. 망원렌즈를 쓰니깐 물체는 계속 이동하고 있어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느낌이 생기거든요. 저는 그런 장면이 좋더라고요. 거기에 음악을 깔고. 우리 생각에는 너무 단순한 사고방식과 감정의 비약을 가진 남녀들이 예쁘고 건강하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제가 그런 것에 대한 반감이 좀 있었나봐요. 영화를 저도 굉장히 많이 보고 영화라는 장르를 매체 중에 제일 사랑하거든요. 결국 내가 할 것은 (웹 드라마를 하든 TV 시트콤을 하든) 결국 영화고, 영화로 위로 받고 만들고 싶어요. 평자들이 영화 볼 줄 모르는 대중들에 대해서 혀를 차는 게 너무 싫어요. 지금 삶의 조건 속에서, 이 생태계 속에서 영화가 자기한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영화 하나하나에 대해 비평을 할 수 없는 분들이 많거든요. 영화를 남다르게 보고 리뷰하고 내 삶의 또 다른 레이어로 삼을 수 있는 게 굉장한 행운인 거지, 지금 당장 영화를 영접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경스런, 경박한 대중으로 취급하는 것이 싫었어요. <해적>을 보고 <명량>을 보는 게 그날의 선택인 사람들,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기호로 소비하는 분들에게 혀를 찰 순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하고 싶고 부둥켜 안고 싶어하는, 조금은 어리석은 듯한 행동들이 페달을 밟아도 공회전이지만 얼마나 예쁘냐, 그 노력들이 얼마나 건강하냐는 식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장면 하나로 생각을 참 많이 했네요. 근데 진짜 그 장면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부러 길게 늘린 것 같아요.
관객: <오늘영화>라는 큰 제목을 붙이신 이유는 뭔가요?
윤: 저는 반대를 했었는데 (웃음) 결과적으로 재미있는 것 같아요. 지금 당장 검색 안 된다고 툴툴거렸지만 사실은 10년 뒤, 20년 뒤, 당장 5년 뒤 생각해봐도 묘한 제목이죠. 확실히 웹 드라마를 많이 해서 ‘이런 제목으로 하면 보겠어? 웹 드라마를? ‘출출한 여자’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웃음) 그런데 ‘오늘영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오늘 영화, 오늘의 젊은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 이런 식의 서브 텍스트가 있었어요. 마침 제가 인상 깊게 봤던 게 ‘서울연애’잖아요. 아마 서울독립영화제가 4음절로 계속 가려는 것 같아요. 브랜드로 삼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계속 하다 보면 잘 될 수도 있겠죠.
관객: 전작들과 비교해서 스타일이 바뀐 이유가 궁금해요.
윤: 스크린에 심플한 것을 올리고 싶은 것에 대한 갈증, 그리고 옴니버스 영화 전체의 균형을 봤을 때, 앞부분을 심심한 듯 담백한 듯 시작하고 싶었어요.
관객: 두 남녀가 영화를 보러 가지만 정작 영화를 보지 않고 나오잖아요. 이 <백역사>라는 작품 안에서 영화, 영화관이 어떤 장치로 사용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윤: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한테 “극장 가야 되는데. 극장. 극장.” 하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그런 아지트로의 극장을 말한 것 같지 않아요. 그냥 입에 말할 거리가 필요하잖아요. 이게 요리를 주제로 한 거였으면 아마 “파스타. 파스타.” 이랬을 것 같아요. 그리고 파스타를 안 먹는 걸로 끝냈겠죠. 다시 말해 뭐든 상관 없는 거죠. 또 영향 받은 영화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들 각자의 영화관>(2007)이라는 걸출한 옴니버스 영화에요. 칸느 영화제 60주년 기념으로 전세계 훌륭한 영화감독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에요. 이 영화는 칸느에서 정확히 3분으로 제한을 하고 세계 감독들이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 대한 얘기를 해요. 그 중 피날레를 장식하는 단편이 켄 로치라는 감독이 만든 영환데, 아들하고 아버지하고 영화관에 줄을 서서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끝에 축구나 보러 가자면서 끝나요. 제 생각엔 영화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라 어쩌면 이런 게 영화다, 영국의 이런 사람, 그냥 축구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 아버지와 아들이 밀고 당기는 살아있는 시선을 담은 것이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이런 걸 따라 했죠. 둘이 지금 뭘 볼 지가 중요하겠어요? 둘이 영화 찍는 게 중요하지. 그 생각으로 표현해봤습니다.
관객: <은해해방전선>을 봤는데 주인공에 감독님을 많이 투영을 시켜놓은 것 같더라고요. 개는 주인을 닮고 영화는 감독을 닮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은해해방전선>도 그런 것 같았어요. <오늘영화> 중에서는 구교환 감독님의 영화가 가장 그런 것 같았고요. 예전의 윤성호 감독님과 지금의 윤성호 감독님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나요?
윤: 악기 처음 배우면 장난을 치고 싶잖아요. 그때는 제가 그런 거에 신나있었던 것 같아요. 매체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그런 장난치는 시기가 지나면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주는 것에 관심이 가죠. 고민하는 나, 너무나 표현할 게 많은 나를 표현하고 싶어지는데 저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제가 관찰한 사람들의 귀여움을 표현하고 싶고 저를 빼고 싶어져요. 그래서 여자 이야기를 많이 하겠죠. 또 참을성이 없어졌어요. 나이는 먹어가고 세상에 볼 콘텐츠들은 늘어가고. 내가 리듬을 놓치는 순간 지금 만들고 표현하는 정도의 공간도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변화하는 매체나 콘텐츠나 플랫폼의 속도를 따라가고 싶고 개발하고 싶고 그래요. 이건 이걸 봐주는 사람들의 리듬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거거든요. 자꾸 앞에 있는 사람들을 소비자로 생각하게 돼요. 소비자들이 불평하지 않을 상품, 대박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구매할 상품을 만들어야 되는데 자꾸 조바심이 나요. 그래서 지금은 창작한다기보다 프로덕팅을 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근데 영화는 참 좋은 게 그 영화를 10명이 보든, 100명이 보든, 10분이든, 100분이든, 재미있든, 재미없든 일단은 보려고 오잖아요. 어둠 속에서 원하는 장면이 아니더라도 기다려주거든요. 연애상대라고 치면 이 연애상대랑 진짜 연을 맺지 않더라도 데이트를 감당하고 같이 동행하는 수고를 해주는 것이죠. 그래서 이에 대한 그리움이나 간절함이 점점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벌려놓은 일들이 있어서 쫓기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고. 스크린에 내가 드러나지 않아도 같이 객석에서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돼가는 것 같아요.
<오늘영화> 중 가장 짧은 러닝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백역사>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심각하거나 대단한 멜로는 아니지만 저잣거리에 있을법한 소소한 로맨스와 영화에 대한 윤성호 감독의 철학이 담겨있는 예쁘고 건강한 영화다. 가을, 로맨스가 필요하다면 이런 톡톡 튀는 재기 발랄한 로맨스 영화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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