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을 부르는 영화
〈보희와 녹양〉 안주영 감독 인터뷰
*관객기자단 [인디즈] 오윤주, 이성빈 님의 글입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어느새 봄이 지나가고 옷이 점차 얇아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그리고 안주영 감독이 첫 장편 〈보희와 녹양〉으로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찾아왔다. 아이들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우리의 과거와 많이 닮아있고, 많이 달라져있다. 매년 더 더워지고 있는 여름을 ‘보희’와 ‘녹양’이처럼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인디즈 이성빈(이하 이성빈): 먼저 간단하게 인사와 영화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주영 감독(이하 안주영): 저는 〈보희와 녹양〉 연출자 안주영이고요. 저희 영화는 밝고 명량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이성빈: 저희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 중 하나가 영화의 시선이었습니다. 최근 영화계에서는 소수자나 아이들, 약자를 중심으로 다룬 영화들이 과도하게 인물들을 괴롭혀서 ‘불행 포르노’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아다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희와 녹양〉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가벼운 소재가 아님에도 극의 톤을 두 아이와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밝게 유지하는데요. 그런 시선이 관객에 대한 배려이자 아이들을 담아낸 감독이 가지는 최소한의 배려처럼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감독님께서는 영화를 찍으며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길 바라셨나요?
안주영: 보희와 녹양이가 마주하는 어른들의 사건은 말하자면 불행한 일이 대부분이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를 밝은 톤으로 이끌어가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어두운 부분도 사회의 일부지만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어른으로서 아이를 보기보다는 저도 어린 시절을 겪어왔으니 제가 어린 시절에 느꼈던 것을 최대한 반영해서 찍어보고 싶었습니다. 한쪽이 위에 서서 바라보면 재미없으니까 조금 낮추어서 나란히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렇게 동등한 시선으로 다가가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밝은 분위기가 나왔던 것 같아요. 어른의 시선으로 봤으면 청소년의 안 좋은 모습이 더 강조되어 영화가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디즈 오윤주(이하 오윤주): 감독님은 단편작인 〈앞구르기〉에 이어서 계속해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찍고 계신데, 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계신 건가요?
안주영: 사실 일부러 그렇게 찍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근데 어쩌다보니 계속해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찍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스스로에게 궁금했습니다. 나는 왜 자꾸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나름대로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이들만이 갖고 있는 자유로움이 좋아서인 것 같아요. 어른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아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제약이 없는 행동들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오윤주: 〈보희와 녹양〉을 보면 젠더에 대한 이야기는 꼭 나올 것 같은데요.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여자다운 남자, 남자다운 여자를 넘어선 더 자유로운 인격체를 창조하신 것 같아요. 캐릭터들이 다채롭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감독님께서는 캐릭터를 구상하실 때 어떤 생각을 갖고 만드셨나요?
안주영: 말씀해주신 것처럼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일대일로 스위치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만약 보희와 녹양이의 성격을 그냥 성별만을 기준으로 바꾼다면 또다시 이분법적인 게 되어버리니까요. 저는 보다 넓게 각자 개인이 타고난 성향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여자, 남자를 떠나 개인의 성향을 인정을 받고 그대로 자라면 안 될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녹양도 보희도 씩씩한 모습도 있고 여린 모습도 있으니까 그걸 다 섞어보고 싶었어요. 어차피 모두가 다 그런 면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두 특정한 면이 더 부각이 되어 보일 뿐이지 여러 가지 성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오윤주: 이건 가벼운 궁금증인데요. 극에서 보희가 신경성 기흉이라는 질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필 신경성 기흉이라는 설정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주영: 사실 그 설정은 제가 아는 분의 모습에서 가져왔는데요. 어릴 때 같이 사진 찍으러 다니던 선배들 중 한 분이 되게 얌전하고 과묵한 스타일이셨어요. 그 분이 기흉을 앓고 계셨는데, 긴장을 하면 더 발생이 잘 되는 그런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하루는 그 분이 좋아하는 여자와 같이 있다가 기흉으로 실려 갔다는 에피소드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긴장하고 소심하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보희에게도 신경성 기흉이라는 설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성빈: 최근에 보희 역을 맡은 안지호 배우님의 또 다른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가 개봉을 했는데요. 〈나의 특별한 형제〉에서는 반대되는 느낌의 캐릭터를 보여주었습니다. 감독님께서 가까이에서 본 안지호 배우님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계신가요?
안주영: 제가 가까이에서 본 안지호 배우님은 보희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것 같아 보였어요. 제가 안지호 배우의 가족이나 친구는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보희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보희보다는 조금 더 장난스러운 아이의 느낌이지만요.
오윤주: 영화를 보면서 성욱과 보희의 관계가 흥미로웠는데요. 보희와 성욱은 둘 다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결핍이 있는 걸로 보여요. 그래서인지 어느 부분에 가서는 성욱이라는 캐릭터가 보희의 바람에서 나온 캐릭터일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극의 초반에 보희가 아버지가 남자다운 사람이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성욱은 그러한 마초적인 느낌도 갖고 있으니까요.
안주영: 사실 성욱은 보희의 아빠를 대신하는 역할이나 그런 남성적인 아버지라는 바람에서 나온 캐릭터라기 보다는 녹양이의 다른 버전이 한 명 더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희 주변에 이런 녹양도 있고 저런 녹양도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성욱이라는 캐릭터는 보시는 분들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게끔 만든 것 같기도 해요. 다만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은 성욱이 보희의 친구처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윤주: 그렇다면 보희와 녹양이는 어떤 관계일까요?
안주영: 둘은 쌍방향적인 관계예요. 영화 속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들이 있어요. 플롯 안에서 중요한 장면은 아니지만, 보희와 녹양이 둘이 같이 있다가 헤어지는 장면들을 좋아해요. 집으로 혼자 가고, 혼자 무언가 하려고 하는 장면들. 둘이 같이 있음으로써 나오는 것들도 좋지만, 사실은 그렇게 혼자 설 수 있기 때문에 둘이 좋은 게 아닌가 싶었어요. 너무 서로에게만 매달려서 의지하는 게 아니라 각자 스스로도 서있을 수 있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이성빈: 보희와 녹양을 둘러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왜 영화의 제목을 '보희와 녹양'으로 정하셨나요?
안주영: 다른 사람들도 서로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보희와 녹양의 관계는 좀 더 동등하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이야기 플롯 자체는 보희가 아빠를 찾아가는 이야기지만, 그 동력은 계속 녹양이 주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 이야기는 녹양이가 없으면 이어나갈 수 없는, 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오윤주: 어떤 장면에서는 녹양이가 보희에게 설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확대적인 해석일수도 있지만 어쩌면 보희의 엄마와 아빠 같은 관계로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요.
안주영: 아, 전혀 그렇지는 않아요. 마지막 결말은 좀 더 열어두고 싶었습니다. 둘의 로맨스는 만들고 싶지 않은데 왜 그런 설레는 듯한 장면이 들어갔냐고 여쭤보신다면, 이 시기에는 친구로서 사랑하는 마음과 로맨틱한 마음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성적인 욕망이 더 커지면 구분짓기 편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감정의 베이스는 나이가 어릴 때에는 아 다르고 어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성빈: 아버지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성정체성이 단순 반전의 도구만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또 보희의 성정체성을 염두해두신 부분도 있으신 건가요?
안주영: 일단은 게이라고 해서 다 섬세하고 여성스럽다는 이야기는 고정관념이잖아요. 되게 마초적인 분들도 있고요. 그런 묘사를 떠나서 아빠를 게이로 설정한 것은, 처음에 보희가 아빠를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쓰다가 어느 순간 굳이 두 사람이 못 만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치만 아빠가 집을 떠나게 된 이유가 불가항력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유나 재고의 여지가 없는 이유는 아니길 바랐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이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조금씩이라도 젠더적인 선을 계속해서 와해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남들과 다른 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시선을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아빠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보희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너무 싫다!’라거나 단순히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식으로 반응하지는 않아요. 단지 한 번 더 아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문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성빈: 젠더 감수성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조금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저는 〈보희와 녹양〉이 페미니즘 영화라는 생각도 함께 했는데요, 감독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해요.
안주영: 일단 제가 여자이고, 그런 제가 영화를 만들었으니 페미니즘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합니다. 여성이 사회에서 위치하고 있는 자리에 대해 생각하고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면 모두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이 영화는 그것을 다루고 있고요. 사실 단순한 것 같아요. 저는 이 영화를 보시는 관객 분들이 타인을 보는 시선에 있어서 관대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조차도 여태까지 학습한 것이 있기 때문에 누가 저보고 남자답다고 하면 싫어하면서, 누군가를 보고 자동적으로 여성스럽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런 것들을 표현하면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그런 것들을 깨려고 하고, 보시는 분들도 그래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노력이 조금씩 진행되면 지금 사회에서 벌어지는 충돌이나 폭력적인 젠더 이분법이 완화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윤주: 영화를 보면서 대안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감독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다양한 구성원들을 그려내셨나요?
안주영: 저는 사실 그렇게 긍정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렇게 그려진 대안가족이 영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웃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게 실제로 가족이든 친구든 아는 형이든 지금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존재들이니까요. 만약 제가 대안가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 씬으로 끝낼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보희라는 개인, 혹은 녹양이라는 개인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더 포커스를 맞춰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성빈: 영화에서 한강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요. 수영을 하지 못하던 보희가 수영을 하게 되는 공간이자 어릴 적 엄마와 추억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니까요. 감독님께서 생각하시기에 한강은 어떤 의미였나요?
안주영: 일단 아이들이 노는 주된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도시에 그렇게 큰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게 되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외국의 어떤 강처럼 사람들이 들어가서 마구 노는 곳은 아니고. 왠지 깨끗한 느낌도 아니고요.(웃음)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데, 말하자면 한강은 되게 가까운데 막상 들어가기에는 겁이 나는 공간 같아요. 저도 사실 한번쯤은 들어가보고 싶은데 못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배우를 대신 뛰어들게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수영은 어릴 때 많이 하게 되는데, 많은 이들이 수영을 하며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 같기도 해요. 보희에게 수영은 자연스럽게 몸이 기억하는 ‘자생능력’ 같은 거예요. 보희는 수영을 원래 할 줄 아는 아이지만 자기가 더 이상 못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사람이 위기에 닥치면 발휘하게 되는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힘,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성빈: 또 〈보희와 녹양〉에서는 영화와 카메라라는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카메라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잖아요. 이 영화는 과거의 한 순간을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영화 속 ‘영화’와 ‘카메라’는 어떤 의미인가요?
안주영: 요새는 다 핸드폰에 카메라가 있으니까 카메라에 대한 느낌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예전에 카메라를 따로 들고 다니던 때를 생각해보면 찍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찍히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또 막상 사진 찍힐 때는 잘 모르는데, 나중에 찍힌 걸 보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많은 감정들이 올라오는 경험을 하게 돼요. 그런 의미에서 녹양이 계속해서 보희를 끌어올려주는 역할인 거예요. 보희는 쟤(녹양)가 왜 저렇게 찍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런 기억은 큰 원동력이 되거든요. 이런 의미에서도 녹양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녹양이가 먼저 아빠를 찾아가자고 말해주고 부추기고 계속해서 보희로 하여금 뭔가를 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이니까요.
오윤주: 첫 장면부터 두 사람이 영화를 함께 보면서 시작해요. 녹양이는 동영상을 찍고, 영화를 통해서 보희가 아버지를 이해하기도 하는데요. 영화는 결국 치유의 의미인 걸까요?
안주영: 치유라고 하기는 거창한 것 같고요. 사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 영화를 많이 이용하죠.(웃음) 근데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같이 공감하고 공유하기를 바라는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영화가 서로에게 치유와 비슷한 감정을 주는 것 같긴 해요.
이성빈: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마무리 인사로 관객분들이 〈보희와 녹양〉을 어떻게 관람하시길 바라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주영: 저희 〈보희와 녹양〉을 보며 지나온 나의 과거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고 공감도 해주시고 즐겨주신다면 굉장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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