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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강변호텔>: 불화의 무대, <강변호텔>

by indiespace_한솔 2019. 4. 22.






 <강변호텔>  한줄 관람평


최승현 | 유머는 여전하지만 갈수록 먹먹해진다

승문보 | 동어반복이라는 비판을 비웃듯이 홍상수 감독은 태연하게 진화한다

송은지 | ‘죽을 것 같다’에서 ‘죽어도 좋다’고 말하게 되기까지

성혜미 | 불화의 무대, <강변호텔>

이성빈 |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말하는 이의 영화

김윤정 | 하나의 공간, 분리된 인물들, 하나의 영화







 <강변호텔>  리뷰: 불화의 무대, <강변호텔>






 *관객기자단 [인디즈] 성혜미 님의 글입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불화무대화에 비유해 감성의 분할을 설명한다. 여기서 불화는 공동체 구성원 각각에 배분된 자격, 지위, 역할, 시간과 공간 등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뒤섞이며 빚어내는 갈등과 대립을 의미하며, 곧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적인 것이란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특정 구성원을 배제하는 치안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앞선 배제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해 논쟁을 일으킴으로써 불화를 유도한다. , 배제되었던 구성원들이 등장하여 보이지 않던 자신의 존재를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자신의 말을 들리게 할 때 불화가 연출되는 것이다.[각주:1] 이 글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여 <강변호텔>이라는 불화의 무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환(기주봉)이 전화를 받으며 호텔 방바닥에 앉아있다. 창문으로 다가간 영환의 모습 너머에는 상희(김민희)가 보인다. 한 화면 안에 분리된 채 자리하는 두 사람은 방을 나선 후에도 만나지 못한다. 영환이 계단 아래를 내려가면 카메라는 옆으로 돌아서 복도에 서 있는 상희를 비춘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 인물들 각각의 세계는 마치 닿지 못할 것처럼 펼쳐져 있다.

그런 영환에게는 두 아들,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가 찾아온다. 그러나 세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조우하지 못한 채 어긋남을 반복한다. 기다림으로 시간을 보내던 영환은 새하얀 눈밭 위에 있는 두 여인을 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말을 건넨다. 그러나 경수와 병수는 후경에 배치된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하나의 프레임 안에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발견할 만도 한데, 투명한 유리창은 이들을 각자 다른 세계에 있는 것 마냥 분리시킨다. 이야기를 마친 영환이 호텔 레스토랑 근처에 다가와 두 아들을 발견하고 나서야 겨우 세 사람은 만나게 된다.

 

이들과 달리 상희와 연주(송선미)의 세계는 순조로우며 평화롭다.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아무런 장애 없이 만나 함께 하며, 서로의 아픔에 공감한다. 이때, 이들의 눕는 행위는 꽤 중요해 보인다. 처음 침대에 두 사람이 눕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상희가 쉬고 싶다고 먼저 눕는다. 그 후 연주는 상희에게 등을 보이며 눕지만, 이내 곧 상희를 바라보는 자세로 고쳐 눕는다. 이후의 장면에서도 서로 바라보고 누워있는 두 사람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의 세계는 하나의 온전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들을 위해, 잠시 눈을 붙인 사이 수북이 쌓일 만큼의 눈이 내린다.





여전히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머물고 있는 영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환은 시들어버린 식물을 보며 물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두 아들에게 꼭 죽을 것만 같다고 말한 후, 다시 식물을 보며 이거 물을 안 줬나보다. 많이 말랐네.”라고 이야기한다. 곧이어 병수의 이름에 대해 언급하는데, 잠시 후 대화는 보이스 오버되며 호텔 주변을 걷는 영환의 모습이 등장한다. 하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살아도 죽은 것이며, 이는 땅을 걷는 마음처럼 사람다운 행동과 공존해야한다고 말한다.

영환은, 꼭 죽을 것만 같다고 말하는 영환은, 하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살아도 죽은 것과 같은 상태로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일까.

 

이번에는 두 아들을 집에 빨리 보내고 싶어진 영환이 잠시 자리를 떴던 장면을 생각해보자. 방으로 올라온 영환은 두 아들에게 줄 것을 찾다 이내 인형을 들고 나온다. 그 인형을 들고 바로 내려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영환은 호텔의 여러 방 문 앞에 다가가 귀를 대보기 시작한다. 그러다 곧 상희와 연주가 머물고 있는 호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끊임없이 아름답다고 말했던 두 사람의 방을 찾아내려는 듯 서성였던 그 시간은 마치 낯선 세계를 유영하는 듯한 기시감을 주면서 또 한편으로는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그 뒤에 바로 잠자고 있는 상희와 연주의 모습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담아내면서 유연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 앞에 서있을 영환이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후 레스토랑으로 내려간 영환은 두 아들에게 인형을 건네주며 꽤 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호텔 사장의 호출로 영환은 다시 자리를 비운다.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보여주지는 않지만, 순두부집에서 나눈 세 사람의 대화로 짐작해볼 수 있다. 영환이 말한다. “사장이 마지막에 나한테 말하길, 덮어두겠다는 거야.”, 이에 아들은 아버지가 거기서 뭐 실수하신 거 있으세요?”라고 묻는데, 왜인지 인형을 들고 서성였던 그 장면이 떠오르며 다시 한 번 불편함이 스친다.

 




그 순두부집으로 상희와 연주가 들어온다. 영환과 경수, 병수 이 세 사람은 이미 술이 꽤나 취한 상태다. 영환이 화장실을 가겠다며 자리를 뜨고, 경수와 병수 또한 일어나 계산을 마친다. 그러다 이내 먼저 걸어간다는 아버지의 문자를 받고 그 공간을 벗어난다.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영환이 다시 등장해 아직 식사를 마치지 않은 상희와 연주에게 자신이 직접 쓴 시를 읽어준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할 점은 그 시를 낭독하는 공간에서 또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다. 인적 없는 주유소를 혼자 지키는 소년은 그 주유소 앞을 서성이거나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 분명 그 소년을 보고 있지만 도무지 그 소년에 대해 알 수 없다. 영환의 낭독과 그가 만들어낸 세계 중 우리는 어떤 곳으로의 진입도 망설여진다.

이후 낭독을 마친 영환은 두 사람에게 저 죽어도 됩니다. 두 분만 있으면이라고 말한다. 이에 상희는 너무 아름다운 말이네요.”라고 답한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일까, 죽어도 된다는 말이 아름답다는 것일까. 전자라면 한 박자 늦은 타이밍으로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후자라면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인가 하는 의문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의문을 갖게 한 채 영화는 다시 호텔로 돌아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순두부집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경수와 병수의 모습이 아니라 영환이 처음 자리를 뜨겠다고 했던 레스토랑의 그 장면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리를 비운 채 오래 나타나지 않는 아버지가 걱정이 된 두 사람은 아버지의 방을 찾아간다. 한사코 알려주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의 방호수를 어떻게 알고 그 둘은 찾아간 것일까. 어떻게든 찾아간 그 곳에서 두 사람은 아버지, 영환의 죽음을 목도한다.

 

필자가 불쾌하다고 말했던 그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새롭게 영화를 봐야할 필요가 생겼다. 마치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전부 진짜가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의 감성을 분할한다. 다시 말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인물 각자의 세계가 평행선을 이루듯 펼쳐지는 이 영화 안에서, 순서를 따라가던 시간은 재배열되고, 죽음을 통해 앞선 사건들의 의미를 다시 조직화하며 영화는 곧 불화의 무대로 바로 선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화의 무대가 또 다른 조화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 이 무대는 반드시 이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눈밭이 될 것이다.





  1. 이사민, 「자크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본 연극의 정치성 – 로버트 윌슨의 연극을 사례로 -」,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학위논문, 2016.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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