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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_기획] 순응과 대항 사이에서, 김응수 감독의 <오,사랑>과 <초현실>

by indiespace_한솔 2018. 4. 28.


[인디즈 기획] 지금, 독립영화


오늘도 독립영화는 우리를 기다립니다. 극장에서, 집에서, 때로는 우리가 뜻을 모아 함께하는 공간에서, 독립영화는 우리와 만나고 있습니다. 여기 독립영화와 좀 더 가까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립영화의 지금을 생생히 경험하는, 인디스페이스의 관객기자단 인디즈 10기가 전해드립니다.





 순응과 대항 사이에서

 김응수 감독의 <오,사랑>과 <초현실> 




* 관객기자단 인디즈 임종우 님의 글입니다.






지난 3월 김응수 감독이 만든 세월호의 영화 <, 사랑><초현실>이 영화관, 영화제, DVD 등을 거치지 않고 온라인 배급과 IPTV를 통해 서두르듯 관객을 찾았다. 아래의 글은 두 작품의 존재를 알리고 영화를 거쳐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고자 쓰였다.

 

세월호가 깊은 바닷속에 잠겼을 때 독립영화의 임무와 운명을 직감했다. 끊임없이 세월호 사건을 말해야 하고, 동시에 세월호 사건이 가지는 이미지의 그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말이다. 전자는 임무고 후자는 운명이었다. 모든 것이 죽음을 향했다. 바다의 존재는 곧 재난이었고 교복 입은 청소년을 보면 곧장 단원고 학생들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노랑은 슬픔의 색상이 되었다. 이 괴로운 연상 작용이 사람들을 휘감았다. 이 긴장이 조금 느슨해진 오늘, 관객 앞에 등장한 김응수의 <, 사랑><초현실>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여기에 질문 하나 더하자면, <, 사랑><초현실>은 왜 함께 세상에 나왔을까.





 

<, 사랑>은 버스에서 한 남성을 보고 우연히 세월호를 떠올린 J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J의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진정성을 지적하는 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가 사건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사랑>은 버스 안에 있는 J를 재현하지 않는다. J가 마주한 의문의 남성 또한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영화는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단 한 사람만큼은 보여준다. 왜 영화는 관객에게 그를 바라볼 것을 지시하고 있는가. ‘지시라고 표현한 것은 영화의 요청이 꽤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이동의 이미지가 과연 J의 시점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확신할 수 있는가. 이미지의 크기를 보면 오히려 운전자의 시선에 가깝다는 점을 인지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 슬픔의 공간으로 운반하는 노동자다. 그의 노동은 세월호 사건 이후에도 지속, 반복될 것임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애도할 수 없다. 세상은 노동자에게 건조해질 것을 요구한다. 영화는 감정의 문을 닫아야 하는 운전자의 상황을 암시한다. 이 상황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노란 리본을 가게에 부착한 이유로 고객의 협박을 받은 J의 이야기다. J와 운전자는 생계와 노동의 고리 안에서 망각을 강요받는다. 또한 운전자의 형상은, 다소 조심스럽지만, 세월호에서 홀연히 탈출한 또 다른 운전자를 떠올리게 한다. 버스 운전자를 폄하하거나 세월호의 선장을 동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선장의 나약함이 너무 친숙한 감정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김응수는 지금 우리가 가진 감정을 곤궁함이라 부른다. 세월호 사건을 말하고 싶지만 선뜻 발화할 수 없는 이름의 무게와, 동시에 이 슬픔을 외면하고 싶은 감정인 것이다. <, 사랑>J의 목소리를 경유해 침묵한 채 버스 앞만을 바라봐야 하는 평범한 진도행 버스 운전자의 눈동자에 무엇이 담기는지 살펴보는 영화다.


다시 버스 운전자 장면으로 돌아오자. 해당 장면은 J의 시점에서 재현된다. 옆에 앉은 남성을 차마 바라볼 수 없는 J는 그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밖으로 풍경이 펼쳐지고 그 위로 창에 의해 반사된 운전자의 모습이 겹친다. 운전자의 모습은 창이 비춘 일부에 불과하다. 작가는 세월호 사건 이후의 세상을 직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추모의 숲에 도착해서도 동일한 선택을 반복한다. <, 사랑>에서 거울과 창은 곤궁함을 물질화한 것이다. 한편, 김응수는 <초현실>에 이르러 이 창과 거울 으로 들어간다. <초현실><, 사랑>에서 진입할 수 없었던 봉쇄된 내부, 다시 말해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의 세계를 보여준다.





 

<초현실>은 세월호 사건 희생자 김건우 군의 아버지 김광배 씨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는 우석대학교 상담심리학과에 영혼입학을 한 아들을 대신에 MT에 참가한다. 영화는 그 현장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동시에 텍스트를 통해 김광배 씨가 김건우 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여준다. <초현실>에서 눈여겨볼 점은 관객이 영화, 이중 특히 텍스트를 수용하는 방식에 있다. 국가의 폭력과 재난을 다루는 기존 영화의 목적은 사건을 공동의 기억으로 전화시키는 데 있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영화는 관객을 사건의 유가족이나 생존자의 자리에 앉히려 했다. 최근 소개된 영화를 예로 들자면 김일란과 이혁상 감독의 <공동정범>, 안정윤 감독의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짓을 합니다. 제가>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와 사카이 코우 감독의 파도 시리즈(<더 사운드 오브 웨이브스>, <파도의 목소리 게센누마편>, <파도의 목소리 신치마치편>) 등이 그렇다.


 

그런데 <초현실>은 조금 다르다. 영화는 김광배 씨의 목소리를 소거한 상태로 편지 내용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렇다면 편지를 읽는 관객은 김광배 씨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는 것인가, 편지의 수신자인 김건우 군이 되어보는 것인가, 아니면 이를 목격한 제3자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인가. <초현실>은 이 세 가지 모두를 영화적으로 구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학생만을 담은 쇼트들을 생각해보자. 이 기록은 현장 내부에 있는 김광배 씨의 시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영화 초반에 삽입된 일련의 쇼트와 같은 시간성을 가지고 구도가 흡사한 이미지가, 김광배 씨가 MT 현장을 떠나고 난 뒤에 반복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영화는 그가 떠난현장을 응시한다. 그렇다면 이 이미지는 누구의 것인가. <초현실>은 김건우 군의 존재를 영화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이미지의 반복은 그가 비록 보이지 않아도 오래도록 김광배 씨의 곁에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열망이다. 이렇게 보면 <초현실><, 사랑>의 결합이야말로 세월호 사건을 모두의 기억으로 바꾸는 가장 구체적이고 영화적인 방법인 셈이다.

 





<, 사랑> 안에 <초현실>이 있다. <, 사랑>을 통해 죽음과 기억의 운명에 순응하되 <초현실>에 도착해 순응의 경험을 발판 삼아 대항을 도모한다. <, 사랑>이 어떤 의문 혹은 질문이라면 <초현실>은 그 대답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존재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희생자가 여전히 세상에 머물고 있다고, 사랑이야말로 기억의 원동력이라고, 여전히 사랑의 힘은 건재하다고. 그리고 아직 우리에게 힘이 남아 있다고 영화는 증언한다. 지금 세상의 모든 것에서 죽음과 재난을 생각하는 잔혹한 상상력은 곧 슬픈 자를 편안하게 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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