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라는 세계
[영화를 말하다] 윤성은이 이돈구를 말하다
이돈구 감독과 〈봄날〉의 아이러니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5월 25일(토) 오후 5시 30분 상영 후
참석 이돈구 감독
진행 윤성은 평론가
* 관객기자단 [인디즈] 서민서 님의 기록입니다.
〈봄날〉은 이상하리만큼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고장 난 내비게이션처럼 관객을 낯선 경로로 안내한다. 이돈구 감독은 이러한 아이러니가 주는 혼란과 쾌감, 그 사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영화적 세계를 단단하게 쌓아 올렸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이번 대화의 기록은 이돈구 감독의 영화가 처음인 이들에게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안내서가, 그 반대에게는 감독이 앞으로 그려 갈 작품 세계를 슬쩍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윤성은 평론가(이하 윤성은): 감독님과 저는, 제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님의 첫 장편인 〈가시꽃〉의 GV 모더레이터를 하면서 처음 만나게 됐고요. 그때 이후로 항상 응원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늘 감독님의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는 관객이기도 합니다.
먼저 〈가시꽃〉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2012년도에 정말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져서 베를린까지 가게 된 정말 입지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야기와 캐릭터의 힘으로 어디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때 당시에 모더레이터로서 〈가시꽃〉을 봤을 때, 러닝타임 내내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날까, 이후에 감독님과의 대화가 얼마나 즐거울까’를 무척 기대했던 것 같아요. 보통 시나리오를 쓸 때, 스토리 중심인지 혹은 캐릭터 중심인지가 중요한데요, 감독님의 작품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절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이면서도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캐릭터의 상황에만 그치지 않고 액션이나 사건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밀고 나가시기 때문에 앞으로 이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관객들이 궁금하게끔 끝까지 이야기의 힘을 유지해 나가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각본을 구상해서 완성하고 또 영화로 관객들에게 선보일 때까지의 감독님의 머릿속이 항상 궁금해지는 그런 분이세요.
토크의 제목에 ‘아이러니’라는 말을 써서 먼저 단어의 정의를 짧게 말씀드리면, 영화 같은 서사 예술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않거나 예상과는 정반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를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가 감독님의 모든 영화에 조금씩 다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토크의 제목에 ‘아이러니’를 쓰게 됐습니다.
다시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로 돌아가 보자면, 〈가시꽃〉부터 시작해서 이번에 개봉한 〈미지수〉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다섯 편의 영화가 극장 개봉을 했어요. 아시다시피 독립영화는 제작비라든가,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준비하는 데에 굉장히 많은 시간이 들잖아요. 작품이 중간에 엎어지면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러가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감독님께서 정말 부지런하게 작업을 해오셨기 때문에 12년 동안 영화가 다섯 편이나 개봉할 수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강연을 하기 위해서는 〈가시꽃〉, 〈현기증〉, 〈팡파레〉 그리고 〈봄날〉과 〈미지수〉로 이어지는 영화의 계보에서 볼 수 있는 작품 스타일에서의 일관성이나 작가론적인 포인트를 집어내야 하는데요, 그런데 사실 감독님의 영화들은 이런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관심사도 사회적인 문제였다가 굉장히 개인적인 부분까지 파고들기도 하고,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드셔서 관객들이 영화의 장르를 이야기했을 때,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들이 있어야 되는데 감독님의 영화는 그런 부분들도 조금 적거든요. 그래서 〈미지수〉를 감독님 영화의 첫 번째 멜로드라마라고 하지만, 사실상 비장르적인 속성이 굉장히 많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예측 불가능한 특징들 때문에 감독님의 영화를 하나의 키워드로 묶거나 특징짓는 데 어려운 부분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래도 일련의 죄책감이나 트라우마가 만들어내는 인물의 심리적인 변화와 이런 변화가 결국 초래하게 되는 파국의 맥락에서 〈가시꽃〉과 〈현기증〉이 조금 연결되어 있고요. 다른 맥락에서 〈팡파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봄날〉은 참 애매한 영화인데요. 만약에 누군가가 방금 여러분들이 보신 영화의 장르가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웃음) 굉장히 애매하죠. 예를 들어, 〈봄날〉을 가족 멜로드라마로 이야기한다면, 굉장히 다양하게 내용이 예상이 되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분명히 있는 거죠.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이야기인데 코미디도 약간 섞여 있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완전히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가 이 장르 안에서 명확하게 설명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요, 물론 감독님이 잔혹 블랙 코미디로 말할 수 있는 〈팡파레〉 같은 영화를 만드셨기 때문에 이분은 언제 어떤 장르로 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계속해서 다른 장르에 넘어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봤을 때, 〈미지수〉의 다음은 어떤 작품일 것인가, 감독님 영화의 관심사나 장르가 또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예상해 보는 이 시점에서 〈봄날〉이라는 영화를 한 번 더 조명해 보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봄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해 볼 텐데요, 일단 〈봄날〉과 감독님의 다른 영화들과의 연관성부터 말해보자면, 주인공인 호성의 두통에서 비롯된 현기증을 관객들도 함께 느끼게 하는 음악의 사용은 〈현기증〉을 연상하게 하고요. 〈현기증〉에서 현기증 때문에 자기 손주를 죽게 만든 할머니의 심경이 드러나는 장면과 할머니의 실수로 인한 손주의 죽음 때문에 집안에서 벌어지게 되는 여러 사건사고들이 호성의 두통과 착시현상으로 연결됩니다. 사용된 음악이나 편집에서도 연출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인물들의 강박, 불안장애, 편집증이 〈미지수〉에서 총을 구비해 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현기증〉에서의 엄마와 〈팡파레〉에서의 동생, 그리고 〈봄날〉의 호성에게도 조금씩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죽음이 등장합니다. 〈봄날〉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죽음이 기본적인 세팅이지만, 다른 영화에서는 주로 사건으로 죽음을 많이 볼 수 있어요. 또 감독님의 영화에는 관객에게 서스펜스를 주려고 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해요.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러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호흡을 연출하는 데 굉장히 뛰어난 감독님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봄날〉에서도 계속해서 누군가가 자신의 험담을 하는 모습이 우연히 목격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오죠. 화장실에서 호성의 험담을 했다가 들키는 동생 종성이나 안 씻어서 냄새나는 양말을 신고 온 피디를 험담하는 여러 장면들이 코믹하게 표현이 됐지만, 그중에서 가족 간의 갈등을 가장 고조시킬 수 있었던 장면이 딸이 엄마의 전화를 받는 장면이었어요. 밖에서 딸이 엄마에게 아버지 때문에 너무 짜증이 난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분노와 짜증을 폭발시키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계속 딸의 뒷모습만 비추기 때문에 ‘설마 뒤에서 호성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돼요. 보통 이후에 딸이 자기를 이렇게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서 호성이 받게 될 상처 같은 걸 이후에 관객들이 예상할 만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봄날〉에서는 그 이후로 더 이상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고 신이 끝나버립니다. 이런 장면들에서 앞뒤 영화들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고요.
그리고 이 영화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더 파고들어 보자면, 8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던 호성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 상황에서 하필 출소합니다. 어떻게 보면, 호성은 가족들에게 짐만 되고 창피한 아버지예요. 그런 아버지가 얌전히 상주 노릇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는 정반대로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요. 특히 이 인물은 실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또 앞으로 다가올 운명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기대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금연이라고 쓰여 있는 장례식장을 담배 연기로 자욱하게 만들고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서 가장 고요해야 하는 자리에서 비즈니스를 만들고 그 비즈니스조차도 본인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서 결국엔 받았던 부조금까지도 거의 다 날리게 되는 상황까지 치닫는 이런 서사가 바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봄날’이라는 제목 자체도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이 가족이 짧은 대화로 서로의 마음을 조금은 확인하고 끝에 가서는 딸에게 선물도 보내는 이런 과정들에서 봄날의 따뜻함, 찬란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난장판이 되어버린 빈소의 모습이나 결국에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려고 했었던 어떤 의도와는 정반대로 가버린 결말을 생각해 본다면, ‘봄날’이라는 제목 자체가 ‘죽기 좋은 날’ 같은 〈신세계〉의 대사처럼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는 제목으로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호성에게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어떤 안타까움이나 슬픔을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장례식장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들어보면, 아버지한테 맞기만 하고 아버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냐는 식으로 아버지가 자기한테는 아버지로서 할 역할을 제대로 못 해줬다고 기억하고 있죠. 하지만 그도 역시 지금 이 자리에서 자녀들에게는 굉장히 불안하고 언제 어떻게 사고를 칠지 모르는 존재잖아요. 결국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던 본인조차도 결국 자녀들에게는 그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오죠. 그래서 아들도 참고 참았다가 결국 호성에게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하게 되고요. 이렇게 모든 인물이 바라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들의 연속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역할에 부적합한 인물로서의 호성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살인자인 호성도 가족들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살인조차도 조폭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서 본인이 희생하게 된, 의리 있고 좋은 사람처럼 포장이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친하게 지냈던 조폭 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슬픔 때문에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거지 원래는 좋은 사람이라고 변명까지 해 주고요. 살인자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포장되는 이런 상황들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호성이 그래도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딸 결혼식에 보태줄 자금을 늘리기 위해 게임판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돈도 잃고 자녀들에게도 더 신임을 잃는 그런 결과를 낳게 되는데요. 난리가 조금 진정되고 종성이 왜 이런 일을 벌였냐고 호성에게 추궁하는데 호성이 ‘은옥이가 시집가잖아’라고 딱 한 마디를 해요. 그리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면서 호성의 뒷모습이 같이 화면에 잡히는데요, 저는 그 장면을 볼 때 가슴을 탁 치는 감동이 있더라고요. 이 사람이 살인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기 딸을 생각하고 아버지 노릇을 하려고 하는 모습들에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양가감정이 피어 올 수밖에 없는 거죠. 한편으로는 ‘저렇게 망나니짓하고 아버지의 빈소를 엉망으로 만드는 아버지가 차라리 없었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참 애쓴다는 연민의 감정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 거죠. 조금 냉소적인 면이 있는 〈팡파레〉를 제외한 다른 영화들에서는 모두 이런 상반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 있고 그런 부분의 연출이 참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성이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는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빈번히 실패하고 나중에 혼자 쓸쓸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마무리되는데요, 저는 이런 것들이 〈미지수〉라는 영화를 만드는데 분명히 하나의 디딤돌이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지수〉는 헤어진 연인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인물들의 상실감을 그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거든요. 친구의 이야기도 나오고 누군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의 이야기도 나오면서 어떻게 보면, 감독님의 초기작과 또 연결되는 부분도 있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감독님이 해왔던 이야기들이 모두 한곳으로 조금씩 모이면서 나오게 된 영화가 바로 〈미지수〉라는 생각이 들어요. 〈미지수〉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이 나오게 될지 모르지만, 오늘 제가 말씀드린 감독님의 작품 간의 연관성과 〈봄날〉이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 그리고 우리에게 전달되는 양가감정 같은 포인트들을 기억해 두신다면, 감독님의 다음 작품을 우리가 예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감독님을 앞으로 모셔서 〈봄날〉에 대해 더 심층적으로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이돈구 감독(이하 이돈구): 안녕하세요. 〈봄날〉 연출한 이돈구입니다.
윤성은: 〈미지수〉가 개봉한 후에 다시 보는 〈봄날〉은, 분명 개봉 당시와는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지금 시기에 다시 보는 〈봄날〉은 감독님께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이돈구: 제가 오늘 정말 같이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돼서 못 봤거든요. 다시 봤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를 조금 더 유연하게 찍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제일 먼저 드는 것 같아요.
윤성은: ‘유연하다’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돈구: 사실 영화를 콘티 그대로 엄청 빽빽하게 찍었거든요. 그래서 ‘숨통을 조금 열어서 더 자유롭게 찍었으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들도 더 즉흥적으로 연기할 수 있게끔 하고요.
윤성은: 제작비라든가, 시간의 제약 때문에 조금 더 빽빽하게 진행하신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이돈구: 그런 것도 있기는 한데, 원래 스타일이 변수를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제 현장에는 사건사고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조금 더 널널하게 진행했으면 배우들도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미지수〉에서는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훨씬 더 재미있고 유연해지는 부분이 실제로 있더라고요.
윤성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났죠?
이돈구: 일어났어요. (웃음) 〈미지수〉에 치킨집이 나오거든요. 그때 장소를 하루밖에 못 빌렸는데 갑자기 비가 왔어요. 그래서 계속 딜레이가 되는 상황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을 제대로 못 찍으니까 너무 스트레스받는 거예요. 그렇게 계속 다시 찍다가 다행히 동이 트기 전에 촬영이 끝났어요.
윤성은: 〈미지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미지수〉가 4000만 원 정도의 예산으로 찍은 작품이라면 〈봄날〉은 되게 블록버스터급이잖아요. 9억 정도 들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제작비 조달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건가요? 그때는 어떻게 9억을 구하셨어요?
이돈구: 〈봄날〉은 제작사가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때가 제작사 대표님도 조금 힘들 때여서 9억 구하는 것도 엄청 힘들었어요. 원래 〈봄날〉이 〈현기증〉을 찍은 후에 바로 들어가려던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메이저 제작사들을 계속 돌았는데도 캐스팅이라든가, 투자에 문제가 생겨서 우여곡절 끝에 거의 5~6년 뒤쯤부터 촬영에 들어가게 됐죠.
윤성은: 이 영화 속 대부분 장면의 배경이 장례식장이잖아요. 장례식장 장소는 어떻게 구하셨나요?
이돈구: 여기 장례식장이 진짜 장례식장으로 보이셨나요? (웃음) 사실 세트장인데요, 장례식장을 빌리는 게 세트장을 짓는 것보다 더 비쌌어요. 그리고 실제 장례식장은 상이 들어오면 촬영을 멈춰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거의 모든 장례식장의 조건인데요, 촬영하고 있는데 갑자기 멈추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그냥 통으로 100평짜리 세트를 지어서 촬영했습니다.
윤성은: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또 다른 부분이 보조 출연자들이에요. 대략 총인원이 몇 명 정도 됐나요?
이돈구: 정말 많았죠. 조문객들, 조폭들 다 합치면 70~80분 됐던 것 같아요. 특히나 조폭으로 나오는 분들은 원래 조연급 배우분들이세요. 그런데 작은 역할인데도 감사하게 다 참여를 해주셨어요. 그냥 액션만 하는 게 아니라 표정을 다 지어주시고 담배 피우거나 도박할 때도 자기들끼리 어떻게 카드를 던지고 하는 것들을 다 계산해서 연기해 주신 거예요. 그래서 너무 감사했죠.
윤성은: 감독님은 본인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영화를 쓰신다고 알고 있거든요. 이 영화는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 있나요?
이돈구: 저희 아버지가 손현주 선배가 연기했던 호성과 결이 비슷하세요. 실제로 되게 거치셔서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저희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기괴한 일들이 조금 일어났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다 싫어했어요. 그러다가 새벽에 분향소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봤는데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엔딩도 마지막에 호성을 비추면서 끝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모두가 싫어하는 그 사람을 제가 응원하고 싶었고 저도 저 자신이 호성 같아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호성이 겨울 끝자락에 서 있고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 인물이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윤성은: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는 저도 항상 저 나름의 해석을 해보는데요. 감독님은 ‘봄날’이라는 제목을 어떤 의미로 지으신 건지요?
이돈구: 제목은 제가 지은 게 아니에요. (웃음) 후보가 굉장히 많았는데요, 원래 제목은 ‘12월의 봄’이었어요. 그런데 이건 너무 예술 영화 같아서 ‘봄이 오면’으로 한번 바뀌었어요. 저는 인물들에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또 너무 고루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치열한 논쟁과 양보 끝에 결국 ‘봄날’로 정해지게 됐죠.
관객: 마지막 장면이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요, 호성이 나이가 든 모습으로 마지막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영화가 끝나요. 저는 마지막 장면이 제목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호성이 항상 불안해하고 무서워하고 공격적으로 날을 세우다가 마지막에 웃으면서 끝나는 게 호성에게 봄날이 왔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돈구: 맞습니다. ‘봄날’이라는 제목이 알맞겠다 싶었던 게 마지막 장면에서 제가 호성에게 바라는 바랑 ‘봄날’이라는 제목의 뜻이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윤성은: 저는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마지막 장면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잖아요. 누가 복수하러 왔나. (웃음) 총소리가 갑자기 들릴 것 같아서 긴장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돈구: 사실 열려있는 결말이어서 다양한 해석이 있었어요. 강아지 복실이가 왔다, 바람 때문에 문이 열렸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고요.
관객: 천륜을 끊기 어렵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영화에서 감독님이 전하고자 했던 것 중에 천륜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건지 궁금해요. 호성이 정말 아버지로서는 자격이 없는데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끝으로 갈수록 호성과 가까워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정도의 연민을 전달하고 싶으셨던 건지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돈구: 천륜을 끊기 어렵다는 개념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췄어요. 정말 용서받지 못한 인간이 있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가족이라면 한 번쯤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혹여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삶을 응원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 가족, 아버지의 프레임을 다 빼고 인간으로서 지켜봤던 거죠. 그랬을 때, 사람한테 느껴지는 페이소스가 있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마음이 움직였던 거 같아요. 저도 이 영화를 만들 때 가족 영화이고 싶지 않았어요. 가족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영화, 블랙 코미디이기도 하면서 장르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윤성은: 또 영화를 굉장히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인물이 양희잖아요. 이 캐릭터가 약방의 감초처럼 웃음을 주는 캐릭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여러 사건을 유발하거든요. 본인이 마치 상주인 것처럼 행동하는 장면들도 있고요. 그래서 이 캐릭터를 어떻게 구상하셨고 어떤 포지션으로 생각하신 건지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돈구: 양희는 되게 착한 사람이죠. 왜 그렇게 오지랖을 떠냐고 보기보다는 되게 귀여운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잖아요. 저는 몰래 숨어서 다른 생각하는 사람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한테 더 마음이 가거든요. 그래서 양희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캐릭터인데요, 사실 실제 동네 아저씨를 보고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그분도 영화처럼 빨간 잠바를 입고 봉분하는 곳에 올라가서 계속 막걸리 드시면서 ‘잘 가라, 아이고’하고 곡소리를 내셨는데요, 그게 너무 인상 깊어서 인물을 가져다 쓰게 됐어요.
관객: 영화에서 잊을 만하면 나오는 개그 포인트들이 있잖아요. 이런 코믹한 요소들이 중간중간에 섞여 있는데 다 감독님의 아이디어인가요?
이돈구: 대부분은 다 대본에 있었고요. 유일한 애드리브는 양희가 봉분 위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 그거 하나예요. 배우들이 연기로 다 살린 거죠.
윤성은: 영화 배경이 충청도에요. 저는 충청도 사투리도 너무 재밌었거든요. 그리고 보통 조폭이 나오면 전라도나 경상도가 배경인 경우가 많지, 충청도 조폭은 잘 안 쓰는데 그럼에도 지역을 충청도로 설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이돈구: 일단 제가 충청도 사람이어서 사투리가 자신이 있었고 충청도 사람들이 웃겨요. (웃음) 어렸을 때부터 저는 친척들이 모였을 때의 그 모습이 너무 웃겼거든요. 그래서 이거 그대로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배우들이 조금 고생했어요. 배우들이 경상도나 전라도 사투리는 어떻게든 하겠는데 충청도 사투리는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연기도 해가면서 모든 대사를 다 녹음해서 드렸어요. (웃음)
윤성은: 저는 또 궁금했던 게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작은 외할아버지예요. 사실 작은 외할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았어도 큰 무리가 없었던 존재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 역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면요?
이돈구: 기본적으로 장례식장에 인물들의 각자의 조문객이 다 오길 바랐어요. 그런데 할머니만 아무도 안 오셨잖아요. 그리고 장례식장의 본질에 대해서 한번 고민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조하는 단순한 개념을 떠나서 정말 고인을 추모하는 본질적인 부분이 존재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진짜 어른이 한번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들어진 캐릭터예요.
윤성은: 작은 외할아버지가 본질을 이야기해 줄뿐더러, 영화 속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진정한 위로를 해줄 수 있는, 할머니의 조문객으로 등장하는 존재였다는 게 정말 좋은 설정이었네요.
관객: 저는 이 영화를 오늘 두 번째 봤습니다. 작은 외할아버지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게 철없는 아들이었던 호성이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꼭 뭔가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 철은 없지만 그래도 자식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람도 결국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작은 외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안아줄 때 호성이 그걸 보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다시 영화를 되돌아봤을 때, 호성을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준 사람이 누가 있었나? 싶었어요. 그래서 그게 되게 외로웠을 것 같았고 그런 상처들이 계속 쌓이면서 결국에는 철없는 아들이 아빠의 모습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성이 그걸 보는 장면을 감독님이 의도하신 건지 궁금했어요.
이돈구: 우선 영화를 두 번이나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이거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지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맞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작은 외할아버지가 오셔서 할머니를 안았을 때, 호성이 분향소에 앉아 있잖아요. 사실 제가 연출한 대로라면 호성에게 그 두 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앞이 막혀있어서 호성은 혼자 독도처럼 떨어져 있거든요. 더 마음을 열지 못하고 외로워 보이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호성을 떨어트려 놓은 건데 그 모습을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보셨다고 하면, 조금 슬퍼지네요. 진짜 누구 한 명 호성을 토닥여주는 사람이 없어요. 이 영화는 끝까지 아주 외롭게 한겨울로 끝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관객분들이 또 얘기해주시니까 제가 만들었는데도 영화가 참 외롭다는 생각이 드네요.
윤성은: 이렇게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마지막 장면을 따뜻한 봄날이 다시 올 것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있을 거 같고 조금은 쓸쓸하게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있을 거 같고요. 결국 마지막에 호성의 모습을 비추고 사운드로 효과를 주면서 영화가 끝나는 건 ‘열려있는 여러 해석을 위한 게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돈구: 네, 그렇죠. 마지막 장면은 사실 어떤 장면을 넣어도 뭔가 이상해져요. 갑자기 은옥이가 선물 세트를 들고 찾아왔다든지, 판타지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들어온다든지. (웃음) 그래서 뭐를 더 보여줄 수가 없어서 그냥 결말을 열어놨죠.
윤성은: 감독님께서 이 영화는 가족 영화로 읽히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영화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현기증〉이나 〈미지수〉를 보면 가족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가족끼리 가질 수 있는 감정들, 미워도 미워할 수 없고 싫어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또 사랑이나 애정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인물을 잘 표현하시는 것 같아요.
이돈구: 지금까지는 가족 영화를 찍어보려는 생각 자체를 안 했는데요, 사실 〈현기증〉 빼고는 영화 속에서 거의 가족 관계가 안 나와요. 〈현기증〉도 가족 간의 화합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붕괴하는 영화고 어떻게 보면 〈봄날〉도 또 다른 붕괴거든요.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 그런 방식도 인정하고 한번 받아들여 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족끼리는 서로 너무 집착하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도 쉽게 받아버려요. 그래서 가족 간의 화합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해와 혹은 분열이나 비극에 대해서도 우리는 고민하고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가족 관계가 더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관객: 아버지 장례식 장면에서 호성이 완장을 처음에는 왼쪽에 차고 있다가 종성이 위치를 다시 왼쪽으로 고쳐주는 장면이 있는데요, 나중에 어머니 장례식을 치를 때는 완장을 다시 오른쪽에 차고 있더라고요. 혹시 옥에 티인지, 아니면 감독님께서 의도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이돈구: 굉장히 디테일하게 보셨네요. (웃음) 그게 지역마다 다른데 어머니 장례는 오른쪽에 완장을 차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도 ‘영화 보시는 분들이 저거를 옥에 티라고 받아들이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런데 몇몇 분들은 또 저게 호성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거 아니냐, 호성을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완장을 또 오른쪽에 잘못 차고 있는 거 아니냐고 해석해 주셔서 그 해석도 너무 좋다고 생각했었어요. (웃음)
윤성은: 감독님들은 본인이 의도한 거 외에 다른 해석이 나오는 걸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이돈구: 특히 이번에 〈미지수〉는 엄청 많은 해석이 나왔어요. 제가 GV 때 쓰려고 몇 개는 적어놨는데요. (웃음) 요즘 관객들은 수준이 정말 대단하세요. 그래서 정말 정신 차리고 영화 만들어요.
윤성은: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려고 하는데요, 〈봄날〉 다음에 〈미지수〉, 그리고 이제 여섯 번째 영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지금 어떤 장르 혹은 소재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요?
이돈구: 일단 시나리오는 다 썼고 지금 수정하고 있어요. 복싱 선수랑 스포츠 분석관이 나오는 스포츠 분석관에 대한 영화입니다. 스포츠 분석관에 대한 영화가 아마 거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몇 달 동안 분석관들 만나서 공부하는 시간을 보냈고요. 제작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윤성은: 오늘 너무 유쾌하게 말씀 많이 나눠주셔서 감사드리고요, 감독님의 다음 작품도 꼭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끝까지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개봉한 〈미지수〉도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이돈구: 오늘 와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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