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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홈그라운드〉: 누군가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고

by indiespace_가람 2023. 12. 18.

 

〈홈그라운드〉 리뷰: 누군가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고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윤정 님의 글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경험이나 존재를 대할 때, 그것을 여타의 것들 중에서 특정할 수 있도록 이름 붙이는 걸 좋아한다. 마치 인간의 고유한 의식이자 놀이인 것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처음 등장하는 것들은 각자의 이름을 부여 받는다. 너의 신체적인 특성을 보니 너는 여자야, 그리고 너는 남자야. 너는 여자니까 남자를 좋아하고, 너는 남자니까 여자를 좋아해. 보이는 것에 따라 이름을 붙이고 그에 따른 성질을 부여하는 과정은 쉽고 간편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붙여진 이름이 없다는 이유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은 모순적이게도 항상 어딘가 존재해왔다. 세상의 일반원리를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현상들은 그 이름과 특성을 모두 빼앗기고 단지 비정상 혹은 이상현상 같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채로 존재를 빼앗겼지만 그건 언어적인 역사와 맥락 속에서 였을 뿐, 특유의 감출 수 없는 존재감은 공간을 통해, 목소리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국내최초로 문을 연 레즈비언 바(bar) ‘레스보스’와 그 공간의 지배인인 ‘윤김명우’는 언어로부터 배제됐던 역사 속에서 세상의 기준에 의해 수동적으로 구분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당당히 선언하며 능동적으로 세상에 나온 존재들이다.

 

 

영화 〈홈그라운드〉 스틸컷

 

 

명동의 샤넬다방에서 시작해 신촌과 신촌공원, 지금의 이태원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장소와 공간을 공유하고 점유해온 역사는 그저 순리에 따라 흘러온 시간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상징적이고 동시에 숭고하다. 〈홈그라운드〉는 명우형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인생과 함께 그가 만들어낸 궤적 속에서 흩어지고 지워지는 퀴어의 역사를 다시 세운다. 명우형의 인생은 이내 세상에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내가 거기에 있었고, 너도 거기에 있었지. 그러니 우리 존재는 말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이미 존재해왔지. 세상이 우리를 떨어트리고 지워도 절대 사라질 수 없는게 있지.

 

충분히 이해 받지 못하고 어느 때는 지나치게 오해 받으며 결국엔 대상화 되고 타자화 되는 존재들은 그 과정에서 너무나도 쉽게 조각나고 수만 번 지워지며 괴로운 자기 증명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우리 모두 몸소 깨달았다. 집합금지 명령과 함께 모일 공간이 사라진 모든 퀴어들은 외롭고 힘들었으며 그건 명우형도 마찬가지였다.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과 시간 위에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피해갈 수 없는 시간들은 명우형을 병들게 하지만 공간의 의미와 기능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고달픈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감내할 수 밖에 없다. 그건 아마 레스보스의 불을 밝히는 직접적인 연료로 오랫동안 타올라왔을 것이다.

 

 

영화 〈홈그라운드〉 스틸컷

 

 

혐오와 차별은 그저 단절로 이어지지만 사랑과 이해의 명맥은 끊어내려고 해도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명우형의 개인적인 인생과 퀴어 역사에서의 흔적과 궤적들은 서로 뒤섞여 수많은 장소와 공간들을 파생시켰다. 레스보스에서 위안 받은 당사자가 운영하는 댄스 스튜디오 루땐이나 서울과 지방을 구분하지 않고 생겨나는 퀴어들을 위한 공간들이 그 예시이다. 공간과 장소는 가해자로서 언어에게 상처입은 사람들을 말 없이 위로한다. 그들이 모여 만든 공간은 동성을 사랑하는, 비정상적인, 역겨운, 쫓겨난, 손가락질 당하는, 매일을 외로워하는, 성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갈 곳 잃은, 술과 담배를 즐기는, 미숙한 청소년,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곳에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함께 존재할 것이다.

 

이따금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왔다고 느끼거나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현재의 공간이 언제까지나 타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또다른 낯선 얼굴을 보여주며 나를 밀어낼 때가 있다. 내 모습이 흐릿해지고 거울 속에 낯선 내 모습만 비칠 때. 고향을 떠나온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장소와 공간에 대한 기억을 마음 한 켠에 고이 간직하며 살아갔으면 한다. 그래도 사무치게 외로워질 때면 이태원 어느 거리 2층 상가에 있는 레스보스의 외로운 불빛이 망망대해를 비추는 등대처럼 바다를 표류하는 외로운 배들을 이끌어주었음을 생각하자.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고 앞으로도 등대를 밝혀 줄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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