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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빅슬립〉: 무방비가 기꺼운 관계

by indiespace_가람 2023. 12. 4.

〈빅슬립〉 리뷰: 무방비가 기꺼운 관계

 

* 관객기자단 [인디즈] 진연우 님의 글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한 가수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평소에 자주 찾아 듣는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와 내가 청년으로 동시대를 보내기에 빚진 위안들이 있었고, 특히나 에 관한 고백이라면 인상 깊게 새겨들은 기억이 있기에 잔잔하게 물결치는 잠의 감각 안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불면증을 앓고 있다고 밝힌 그 가수는 깊은 잠을 노래하는 곡에 대해 조그마한 기척에도 잠을 설치고 경계하는 어른이 된 것이 문득 슬퍼지는 밤을 담았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인터뷰어가 무엇을 경계하는 것이냐.”고 되묻자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잠드는 것을 경계하는 게 아닐까.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을.”이라고 덧붙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경계하며 그의 노래를 들었다. 귓가에 흘러드는 잔잔한 선율과 사람에 치여 지하철 구석으로 수납되는 몸이 서로 불화하는 순간이었다.

 

어찌저찌 집에 들어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한숨 돌리는 그 순간까지가 노래의 완성이었다. 굳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와 뒤이어 들리는 도어락 소리는 여기서부터는 긴장을 풀고 안심해도 좋다는 집의 확언과 같다. 어깨에 얹힌 무게들을 하나씩 덜어내 가면서 길호뿐 아니라 기영에게도 오랫동안 ‘집’이 부재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공간으로써의 집이 아니라, 잠을 자고 밥을 먹어도 그곳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편안하지 않다면 어떠한 의미에서는 아직 집을 찾지 못한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길호가 들어오기 전 기영은 그곳에서 휴식한다기보다 차라리 연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기 위해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밝아 올 내일을 견인할 수 있을 만큼의 수면량을 주유하면서. 그나마 기영의 집을 집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베란다에 만개한 화분들 덕이었을 테다. 흙이 마르지 않았는지 주기적으로 살피며 물을 주고, 그 앞에서 담배 한 대 태울 때 기영은 잠시나마 휴식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마저도 기영에게 온전한 안전지대가 되어 줄 수는 없다. 베란다는 기영이 아끼는 몇 안 되는 것을 진열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에서 아끼는 것이란 곧 단념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빅슬립〉 스틸컷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영은 경계하는 어른이다. 식탁에 마주 앉은 길호가 잘 가꿔진 화분에 대해서 물어볼 때 무심한 투로 엄마가 유일하게 남긴 유산이라며 너보다 내가 더 불쌍하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만, 정작 기영은 엄마가 머무르던 방은 정리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이부자리를 펼쳐 놓은 사람이다. 본가로 돌아가면 그의 아킬레스건이 가장 연약한 상태로 누워 있고, 의붓어머니와의 서먹한 관계는 삐거덕거리며 윤활유 없이 굴러간다. 생명력 하나 없는 집에서 홀로 고립된 의붓어머니를 바라보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복잡해 잠바 하나 사 입으라며 퉁명스럽게 돈을 던지기도 하고, 바람 쐬고 오라며 아버지를 대신 돌보기도 하지만 그의 최선은 경직된 탓에 자주 고꾸라진다. 회사에서는 그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요구한다. 묵묵히 성실했을 뿐인데 믿음직스럽다는 이유로 그를 피로하게 만들고, 정당하게 분노하면 먹고 살아야 하지 않냐며 자존심을 팔게 만든다. 그런 탓에 그는 늘 뻣뻣하게 굳어 있다. 하나씩 타협하며 자신을 내려놓는 동안 그는 늘 서툰 표현으로 주변인들을 상처 입히고, 의도와 결과가 달라질 때마다 단전부터 차오르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었을 것이다. 기영이 영화의 말미에 길호의 무리를 향해 씹어 뱉듯 포효하던 말을 떠올려 본다. 그 말들이 유독 첨예하게 날카로웠던 이유는 자기 자신을 베기에 가장 쉬운 말들만 골라 뱉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빅슬립〉 스틸컷

 

 

다시 음악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가수는 잠을 노래하는 다른 곡에서 “잠을 잘 자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랑인 것 같다.”고도 말한 적 있다. 기영에게 길호를 재우는 일이 그랬을 것이다. 길호를 돌보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고, 집에 기다리는 존재가 있기에 기영은 비어 있는 냉장고를 채워 넣고 밥을 차리며 집을 집다운 집으로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기영의 전사가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았으나 짐작건대 그 또한 가족 안에서 상처를 입고 방황한 적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그런 기영이 길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다가도 집에 가면 아빠가 때린다는 말에 길호를 집으로 들여 머무르게 해 주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문을 열어 주고 싶은 마음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는 길호의 보호자가 되어 가며 마음을 주고받는 법을 익히는 서툰 수업을 시작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기영의 공간에 침투하여 손때를 묻히고 다니는 길호가 있고, 그제야 비로소 집은 두 사람 모두에게 무방비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간다.

 

영화는 끝으로 기영과 길호에게 방으로 길게 잠겨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선사한다. 기영은 길호의 옆에서 흐트러진 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문득 잠에서 깬 길호는 기영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안심한 듯 몸을 누이며 잠을 청한다. 더 이상 베란다에 줄지어 놓인 화분은 없지만 집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감미로운 안정이 흐르고, 두 사람은 앞으로도 서로의 머리맡을 지키며 따뜻하게 뒤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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