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십칠 세의 초상
〈그 여름날의 거짓말〉 (감독 손현록)
김한들 /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관객기자단 인디즈
망가지고 망가트리고 망쳐지는 일은 서로의 꼬리를 물며 벌어진다. 망가져놓고 망가트리지 않기 어렵고 망가트린다면 망쳐지고 마는 것이다. 살다보면 꼭 한번쯤은 그 굴레를 온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된다. 그 체험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 그딴 나이란 없을 것 같은데, 하는 우리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와 나 이상을 파괴하는 사건은 결국 저질러진다. 어떤 애는 그걸 열일곱 살에 겪기도 하더라.
열일곱, 첫사랑을 하기에 알맞은 나이일까? 아마도 그렇다. 망쳐지기에도 좋은 나이일까? 아마도 아니다. 첫사랑을 하다가 망가지고 망가트리고 망쳐진 열일곱 살이 있다면 어떨까. 〈그 여름날의 거짓말〉은 17세 소녀 중에 첫사랑의 추미를 단연코 가장 강렬하게 깨우친, 다영의 이야기이다.
다영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상처를 받아서다. 그리고 자기가 상처 받은지를 알아채지 못해서다. 영화가 시작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다영은 남자친구 병훈에게 차인다. 학원에서 만나는 누나랑 바람이 났다며 눈물을 흘리는 병훈을 도리어 다영이 달랜다. 사귄 지 28일밖에 안 된 사이이니까 괜찮다고. 그러자 병훈은 '나만 엉망 됐네. 나만 좋아했던 건가 싶어'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던지고 사라진다. 병훈이 이별을 통보하고 휴지를 펑펑 써가며 울고 상처까지 알차게 받아 떠나는 동안, 다영은 멀뚱하다. 일은 여기서부터 잘못되었다. 다영은 그날 저녁 기혼자인 과외교사와 잠자리를 갖는다.
〈그 여름날의 거짓말〉에는 거짓말쟁이가 대거 등장한다. 다영, 병훈, 과외교사, 담임교사까지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 없다. 그 중에서 제일 도발적이고 돌진적인 거짓말쟁이는 다영이다. 다영이 망쳐진 것은 첫사랑 때문이기도 하고 거짓말 때문이기도 하다. 28일밖에 안 됐으니까 이렇게 헤어져도 문제없다는 병훈을 향한 위로는, 다영 스스로도 미처 거짓인 줄 모른 첫 번째 거짓말이다. 정체를 감춘 다영의 마음은 다영을 폭주하게 만든다. 병훈이 떠난 뒤 거짓말들은 과외교사를 향해 이어진다. 어쩌다보니 숙제를 다 했다는, 집에 엄마 친구들이 놀러왔다는, 오늘 수업을 듣고 싶다는, 종국에는 안아달라는, 사랑해달라는, 그리고 그렇게 내지른 과외교사와의 잠자리는 병훈을 붙드는 볼모로 쓰일 뿐이다. 병훈을 상처 입혀 되돌아오게 하고 싶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다영에게 없다. 그런데 정말 이 거짓말의 쓰임이 다영과 병훈의 어여쁜 재회'에 까지만 미칠 수 있을까?
“야! 나 쌤이랑 잤어!"하는 다영의 한 마디에 병훈은 그만 아득해진다. 새로 사귄 '누나' 같은 건 까맣게 잊는다. 자기가 먼저 다영을 배반하긴 했지만 이건 다른 문제다. "난 그래도 안잤다고 항변하는 병훈 의 목소리가 떨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훼손된 소유감 속에서 병훈은 “여기 안이 너무 아프다며" 가슴을 쥐어뜯는다. 다영의 바람대로 병훈은 다영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뭔가는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고 뭔가는 되돌리기에 늦어버렸다.
과외교사의 신혼집 침실을 침범한 그날 밤은 다영이 영원히 건너버린 강이다. 병훈의 미더운 사랑이 필요했던 다영은 오히려 그날로부터 여러 가지 믿음과 헤어지기 시작한다. 첫째로는, '어른'과의 믿음이다. 과외교사는 다영을 꾸짖는 듯하다가 다영과 잤고, 그 끝에는 “오늘 일은..."하며 친절한 투로 말끝을 흐린다. "말 안 할게요."라며 그 문장을 마저 완성하는 사람은 다영이다. 또한 과외교사는 잠자리를 요구하는 다영을 말리는 동시에 다영의 목소리를 전부 녹음했다. 그걸 들은 다영은, "선생님도 속으로는 그쯤부터 나랑 잘 생각을 했던 건지" 묻지 않는다. 다만 세상의 어떤 진실 하나를 알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둘째로는, '병훈과의 믿음이다. 다영이 믿음을 갈구하며 울먹이면 이제 병훈은 도대체 어떻게 믿느냐며 같이 운다. 아무래도 병훈이 다영만으로는 다영을 믿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셋째로는, '자신'과의 믿음이다. 누군가에게 버려졌다는 감각에 떠밀려 몸을 엉뚱한 곳에 누이는 미련함을, 죄책감에 맞닥뜨리자 어물거리며 본인 과실을 모른 척하는 간사함을, 새롭고 불쾌하게 제 것으로 새겼을 것이다. 다영은 그 여름날에, 병훈보다도 과외교사보다도 먼저 다쳤다.
여름이 무르익는 동안 다영과 병훈은 재회하고 임신하고 유산한다. 이 어리벙벙해질 정도로 다이내믹한 첫사랑에는 아름다운 순간도 있다. 병훈의 방에서 병훈이 우쿨렐레를 치고 다영은 침대에 되는대로 널브러져 있다. 다영이 태몽을 꾼 것 같다고 말하면 병훈이 동물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동물을 알면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있다고. 또 어느 날의 다영과 병훈은 둘뿐인 계곡에서 헤엄치고 포옹한다. 풍선으로 펜션을 꾸미고 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은 다시 혹독함으로 이어진다. 병훈의 방은 다영의 집으로 바뀌고 병훈은 다영의 엄마에게 뺨을 맞는다. 펜션의 시간이 낮에서 밤이 되면 다영과 병훈은 계획대로 유산을 시도한다. 망가지고 망가트리고 망쳐지며 때때로 푸릇푸릇하게 빛나기까지 하는 다영과 병훈을 바라보다가 정신이 아찔해진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한 가지, 두 사람이 서로를 약간씩 배신하고 서서히 고통스러워지는 동시에 서로 곁에서 그 일을 오롯이 견딘다는 것만을 알겠다.
〈그 여름날의 거짓말〉은 다영의 방학숙제에서 시작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쓰라는 발문 아래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때, 다영의 서술이 여러 번 반복되고 변형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특별해진다. 어떤 시점에 다다라서는, 담임교사가 다영을 믿지 못하듯이 병훈이 다영을 믿지 못하듯이 스크린 밖에서 보는 이도 다영을 믿지 못할 수 있다.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는 다영만이 알 것이다. 뙤약볕 같은 불신과 추궁 아래에서 최선을 다해 여름을 통과하는 이 아이에게 거짓말의 기회를 주고 싶기도 하다.
영화의 끝 장면은 그 처음과 비슷하게 시작한다. 다영이 흰 종이 앞에 앉았다. 달라진 점도 있는데, 다영 앞에 병훈이 마주 앉아있다는 사실이다. 둘의 이야기가 어긋난다면 불리할 것이라는 선생님의 협박이 책상 위에 놓인다. 이제부터 다영이 만들어둔 실제와 허구의 공백은 메워질까. 그렇게 다영과 병훈의 방학숙제는 진실만으로 채워질까. 어쩌면 더 높은 차원의 진실과 거짓에 관한 싸움이 남았을지 모른다. 우리의 진실을 쓸까 거짓을 쓸까, 여름의 내용을 논의하다가 둘의 진실과 거짓은 상대방의 그것과 부딪힐 수도 있겠다. 이건 내 말이 맞지, 아니 네 말이 틀렸지. 망가지고 망가트리고 망쳐진 것들에 주석을 달 듯 자세한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다.
병훈을 향한 다영의 한 문장이 이 첫사랑 이야기를 관통한다.
"너도 방학숙제 했니?"
우리의 이 흉하고 아름다운 일을 넌 잊을 거야? 기억할 거야? 추억이라고도 불러줄 거야? 그 물음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함께 찾은 두 사람은, 마침내 헤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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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비평전문지 『독립영화 54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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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영화 54호』는 사단법인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가 기획 및 제작하였으며, 독립영화 소식, 정책 그리고 기획 ‘저작권을 둘러싼 운동들’ 및 독립영화비평상 수상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 54호는 기획 ‘저작권을 둘러싼 운동들’에서 독립영화의 공정이용 문화 형성 및 저작권법과 창작 활동을 둘러싼 담론을 탐구하고, 여러 필자의 비평을 통해 주목할 만한 독립영화를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그 외에도 독립영화 지원제도 상황을 포함해 2024년 독립영화계의 주요 소식을 다룬 글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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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영화협회 홈페이지: https://kifv.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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