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들〉리뷰: 들려오는 침묵 너머로
* 관객기자단 [인디즈] 정다원 님의 글입니다.
그 온갖 소리가 응축된 침묵 앞에서, 우리가 쉬이 말하는 ‘안다’는 말의 무게는 아마 너무도 가벼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어떤 무게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70여 년을 넘어 이제서야 우리에게 닿은 ‘목소리들’은 어떤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음을 일러준다. 스크린에 시선을 맞추어 가만히 앉아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침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겨우 텍스트 몇 줄로 쓰인 역사책 속의 문장들이 무색하기만 하다.
영화는 매년 150여 명이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주의 모습을 보여주며, 가족이라는 그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입을 열기 시작한다. 이렇듯 한 사람의 삶에 깊숙이 자리한 과거의 비극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제주 4.3사건의 이 무참한 아픔을 점차 인정받게 되었음에도, 여성들이 겪은 수모는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영화 〈목소리들〉은 여성 생존자의 목소리를 따라 흘러가며 침묵 속의 아픔을, 흙 속에 묻힌 슬픔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이를 듣다 보면 여러 세대가 중첩되어 입을 모아 고통을 말하는 목소리를 볼 수 있다. 살아남은 여성들의 침묵은 곧 그를 보고 자란 자손의 목소리로, 이것은 다시 제주 4.3사건 연구자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어떤 목소리와 침묵은 또 다른 소리로 연장된다. 영화의 배급이 관객 참여형 배급으로 이어진 것은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뒤에도 제주 4.3사건을 향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고통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그 고통에 ‘공감’하게 만드는 쪽을 택한다. 이를 위한 애니메이션 연출은 보다 더 그 아픔에 동조할 수 있게 만든다. 영화는 과거 개인이 겪은 아픔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직접 재현하는 대신 추상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다. 이는 관객이 그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상상하여 메우게 하고, 그렇게 개인화된 이미지는 한 개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이는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아픔이 되는 것이자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목소리가 될 수 있도록 한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 삽입된 제주의 풍경은 괜히 미운 마음이 들 만큼 고요하고 아름답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개의 처’, ‘아무개의 딸’로 대체되었던 이름들이 새겨진 바다의 모습도, 마지막 장면의 유채꽃도 모두 다 원망스러울 만큼 아름답다. 이 풍경들은 이 영화가 그저 아픔만을 그리기보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음을 알게 한다. 그 모든 아픔을 겪고, 상처가 나을 새도 없이 삶을 견뎌야 했던 여성들. 그들이 슬픔을 흙에 직접 파묻었던 그 손으로 일군 밭은 폐허가 된 땅을 재건했다. 그들에게 제주는 아픔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이지만 그들의 손으로 다시금 세운 아름다운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제주 바다에서 길어 올린 이 침묵은 영화가 끝나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단지 말하지 않음이 아닌, 살아남은 이들의 울음이자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침묵을 비추고 그 안에 켜켜이 쌓인 기억을 그저 꺼내 보여준다. 우리는 그 침묵 너머의 오랜 시간 묻혀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해야 할 목소리이며 우리가 내어야 할 목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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