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리뷰: 용포를 두른 여자들
* 관객기자단 [인디즈] 안소정 님의 글입니다.
씨름에서 천하장사란 모든 체급의 선수가 맞붙어 판가름 난 단 한 명의 최강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천하장사가 된 선수는 조금 전까지 있는 힘껏 몰입했던 시합의 열기를 품은 채 용포를 두르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
2009년도에 최초의 여자 천하장사가 탄생한 이래로 많은 여성 선수가 천하장사를 꿈꾸며 정진한다. 영화는 최초의 여자 씨름 실업팀 콜핑에서 말 그대로 한솥밥을 먹었던 선수 한 명 한 명의 포부와 꿈, 씨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비춘다.
씨름은 균형이 중요하다. 순간적인 힘으로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상대 선수로부터 자신의 균형을 지켜내면서 두 다리를 단단히 바닥에 내디뎌야 한다. 여자 씨름 선수로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모래판 안과 밖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찾으려 한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균형에 도움을 주는 것은 다른 선수들이다. 연승 무패의 기록으로 모든 여성 씨름 선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도전의 대상이 된 천하장사 임수정 선수와 새로운 천하장사가 되고자 하는 신예 최희화, 김다혜, 양윤서 선수, 그리고 천하장사의 자리에 올랐었고 은퇴 이후 여자 씨름에 보탬이 되는 길을 찾고자 하는 송송화 선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북소리가 울리고 선수들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된다.
씨름은 예와 도가 있는 살가운 스포츠라는 송송화 선수의 말처럼 콜핑에 속했던 선수들은 팀을 이적하고 모래판 위에서 서로를 상대 선수로 마주하더라도 응원과 지지를 멈추지 않는다. 같은 팀이 아닐 때도 하루에 한 번씩 영상 통화를 하고, 상대에게 패했더라도 많이 성장했다며 인정한다. 계속되는 슬럼프로 고민에 빠진 존경하는 선배 선수에게 애정과 안타까움을 담아 쓴소리를 하기도 한다. 씨름이 모래판 위에서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게 맞닿는 스포츠인 만큼 선수들은 서로의 성장과 주저함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챈다. 이런 선수들의 모습은 천하장사라는 호칭과 증명도 중요하지만, 모래판 안과 밖에서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함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사회에서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삶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진정 가치 있는 걸 찾아내려 할 때, 씨름 선수인 동시에 어머니이자 며느리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할 때, 한 번 천하장사를 하고 반짝 사라지는 선수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모래판 위에서 균형을 잡는 선수들의 모습은 그들의 삶 전체로 이어진다. 각자 고민과 불안을 안고 균형을 잡으며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여성 선수들의 모습은 오랜 전통 스포츠인 씨름 안에서 빛을 발한다. 전통과 균형, 그리고 새로운 길이라는 여자 씨름의 키워드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요소들이 한데 묶여 선수들의 삶으로서 그 존재를 증명하고 영감을 불어넣는다. 땀을 흘린 채 용포를 두른 여자 씨름 선수들의 이미지는 단순히 강인한 육체로 이뤄낸 성취가 아닌 여러 겹의 맥락이 쌓인 채 다가온다.
치열한 동시에 살가운 스포츠인 여자 씨름. 치열하고 살갑게 두 선수가 모래판 위에서 만날 때, 둥글게 원을 그리며 힘차게 모래바람이 분다. 여성 씨름 선수들이 일으키는 모래바람이 불 때마다, 두 다리를 땅에 힘껏 내딛고 무언가 치열하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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