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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기획] 평등한 문화를 위한 움직임 <오목소녀> '더 평등한 영화/현장 제작기' 기록

by indiespace_한솔 2018. 6. 18.



평등한 문화를 위한 움직임

 <오목소녀>  'Special Talk : 더 평등한 영화/현장 제작기' 기록


일시 2018년 6월 6일 오후 2시 30분 상영 후

참석 백승화 감독, 이지민 촬영감독, 김진아 PD

진행 남순아 감독 (연출부)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민기 님의 글입니다.




영화를 '잘'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영화를 '잘 만드는 것'은 귀중하다. <오목소녀> 제작진은 물론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했지만 좋은 제작 현장을 만드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까지 영화 현장에서 고민한 적 없던 것을 고심하는 제작진의 새로운 제작기가 도착했다.

 




남순아 감독 (이하 남순아: 각자의 자리에서 성평등과 비폭력적인 영화 제작 현장을 위해 고민하는 영화인들이 여기에도 많을 것 같아요. 또 영화 일을 하고자 하는 분 혹은 학생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관객으로서 영화계 성평등에 관심을 가지고 오신 분들도 있을 거고요. <오목소녀>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저희 스태프들도 이런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는 잘된 점도 있고 잘되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부 경험들이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공유되고 누적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토크 주제가 <오목소녀> 제작기이기는 하지만 사실 <오목소녀> 한 현장만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성평등을 요구하는 영화계 흐름에 맞춰서 같이 이야기를 해볼 텐데요, 20161021영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운동이 있었고 또 비슷한 시기에 <걷기왕> 제작진들이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슈가 되었어요. 해시태그 운동 후에 페미니스트 영화 영상인 모임 찍는 페미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오목소녀>2017년 가을에 촬영이 들어간 작품인데요, 이 타임라인 속에서 <오목소녀> 제작진들이 어떤 고민을 했으며 어떤 것을 목표하고 성취했는지, 그리고 그 한계점에 대해 탈탈 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각자 돌아가면서 어떻게 영화 일을 하게 되었는지, 현장에서 어떤 불평등과 성차별을 겪었는지,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 말씀해주세요.


 

이지민 촬영감독 (이하 이지민) : 20살에 영화과 입학을 하면서 영화일을 시작했어요. 감독을 지망하고 학교에 들어갔다가 촬영에 매력을 느껴서 촬영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가장 힘든 것은 다들 짐작하듯이 여자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었어요. 또 위계폭력적인 부분이나 성폭력적인 부분에 대해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같이 고민하고, 대안을 얘기해볼 수 있는 동료들을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점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문제가 있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같이 싸워나가거나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3년간, 말씀하셨던 일련의 움직임들을 통해서 어떤 부분이 가시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료들이 많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오목소녀> 현장도 그 중 하나였기 때문에 굉장히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백승화 감독 (이하 백승화) : 아무래도 영화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막내 스태프라는 포지션으로 일을 하게 되잖아요. 예전에 스태프로 처음 영화 일을 시작할 때 당황스러웠어요. 영화 현장 자체가 항상 시간이 없고 빨리빨리 뭘 찍어내야 되잖아요. 이런 현장에서 어떤 사람이 고성을 지른다거나 욕을 하는 상황이 생기면 항상 가장 아래의 스태프가 그걸 겪어야 해요. 내가 나중에 연출을 하거나 현장에서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다른 식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 전에 영화 못하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긴 했는데.(웃음) 만약에 영화를 계속할 거라면 다른 현장을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전작인 <걷기왕>도 그렇고 작업들을 하다 보니 막상 그게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상시에는 정말 좋은 사람도 현장에 가면 갑자기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상황이 생겨요.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 감독으로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현장인가?’하는 고민도 돼요. 그러다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그런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들을 찾게 돼요. <오목소녀>를 찍을 때는 영화 자체의 연출이나 캐릭터 빌딩, 촬영방식도 고민하되 동시에 현장에서의 윤리를 같이 고민해볼 수 있는 사람들과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던 거 같아요.

 


김진아 PD (이하 김진아) : 영화계에서 20년 조금 넘게 일을 했어요. 지금은 프로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마케팅 일을 했습니다. 지금 보면 이상한 일들이 그때는 정말 많았거든요. 사실 저는 문제를 인식한 것도 얼마 안 되었어요. 이번에 작업하면서 배운 것도 많고 실제로 해보면서 느낀 것도 정말 많았어요. <오목소녀> 같은 경우는 감독님과 함께 스태프들이 같이 만들어가는 제작 현장이어서 저로서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 다른 영화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남순아 : 저 역시 고민이 정말 많아요.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 독립극영화 제작수업을 수료하고 영화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 저는 10대였고 그 후 독립 단편영화 작업 위주로 스태프를 했어요요즘 상업영화 같은 경우는 ‘twelve on twelve off’라고 해서 작업시간이 12시간을 넘기면 안 되는데, 여전히 독립영화, 특히 단편 작업에는 이런 규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어요. 다들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현장에 처음 갔을 때 17시간 동안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일을 했어요. 너무 힘들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조명기사님이 이게 힘드냐며 자기는 스물 몇 시간 연속으로 일 한적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면 옆에 사운드기사님이 본인은 서른 몇 시간 연속 해봤다, 그럼 그 옆에 또 다른 기사님이 본인은 마흔 몇 시간을 해봤다 하는 거죠. 그 이상인 분들도 있고요. 그때 제가 했던 생각은 '뭔가 잘못되었다, 이게 바뀌어야 된다'가 아니라 '언젠가 나도 굉장히 나쁜 현장에 가서 저것을 체험한 뒤 불행 배틀에서 일인자가 되리라'라는 생각이었어요. 성폭력뿐만 아니라 위계적인 구조나 대의만을 위한 문화에 대한 질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걷기왕>에서 백승화 감독님을 보며 이 고민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또 감독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 고민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실제 현장에 적용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승화 : <오목소녀> 이전에 <걷기왕>이라는 영화를 연출했어요. 현장의 폭력적인 경험들을 저도 겪었고 남순아 감독 같은 겪어보아서 저희 딴에는 최소한의 방어 대책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남순아 감독이 제안했던 성희롱 예방 교육도 있었고요. 저도 사실 영화 일을 하면서 그런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걸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본 적도 없어서 그런 게 있나 했는데 실제로 찾아보니까 의무적인 교육으로 명시가 되어있더라고요. 그렇지만 영화계에서 아무도 그런 교육을 하지 않고 있었던 거죠. 저희가 처음으로 실시하게 되어서 영화 개봉하고 나서 많이 이슈가 되었던 기억이 있어요.

남순아 감독과 저는 현장에서 성폭력 또는 위계 폭력에 대해 나름의 방어를 해놓자는 시도로써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에 관련된 내용들을 콘티북에 같이 실어서 스태프들이 같이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성희롱 예방 교육 자체가 보통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까 영화 현장 스태프들에게는 맞지 않는 부분도 조금 있었어요. 그래서 아쉬웠던 것들도 있어요.

<걷기왕>이 2년 전 작품인데 그 이후로 영화계 내에서도 목소리들이 많이 나오면서 상업영화 현장에서도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아직도 하라고 하니까 하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어요. 이게 단순히 스태프들 개개인이 추진해서 해야 하는 교육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제작사나 영화 투자사가 더 주도적으로 해야 해요.


 

남순아 <걷기왕>이 제작이 된 게 2016년이었어요.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성평등 위원회가 있어서 1년마다 회원들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실시하는데, 그때 교육을 듣고 이런 걸 교육으로 받을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알았어요. 당시 저의 가장 큰 관심이 임금 문제였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영화 현장에서 야간수당이 포함된 임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 영화노조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재차 물어봤었거든요. ‘저예산 영화도 의무 맞나요?’, ‘독립영화도 의무 맞나요?’, ‘저희가 예산이 5억도 안 되는데 정말 저희도 하는 거 맞나요?’ 그랬더니 모든 영화가 해야 된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의무로 지정된 지 오래됐더라고요. 이미 2007년에 영화노조나 제작가협회 같은 곳에서 임금단체협상사안으로 결정했던 거죠. 그전까지는 영화 현장들이 근로기준법에 적용되지 않다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면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의무가 된 거예요노동권의 의미로 들어갔죠. 2007년에 처음 실시가 되었는데 주요 스태프 몇 명만 교육을 듣거나 페이퍼로만 대체가 되었던 거예요. 제작진 전체에 공지를 하고 교육을 장려한 곳은 저희 현장이 처음이었어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스태프들이 제작 시작단계부터 전부 꾸려지지는 않잖아요. 거의 영화 들어가기 직전에 스태핑이 완료되다 보니까 굉장히 바빠요. 여러 일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막상 교육 날에는 스태프들이 많이 오지는 못 했었던 것 같아요. 2/3 정도가 참여했어요. 또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래도 주로 기업 중심의 이야기들이 있었고요. 다 오지 못한 게 아쉬워서 교육 내용을 바탕으로 콘티북에 성희롱 예방수칙을 실었어요. <걷기왕> 콘티북이라던가 <걷기왕> 성희롱 예방 교육 검색하시면 나올 거예요. 이를테면 촬영장 내 성희롱 예방을 위한 10가지 수칙이라던가 동료를 위한 매뉴얼, 피해자를 위한 매뉴얼, 행위자를 위한 매뉴얼 같은 내용들을 실었죠. 그런데 굉장히 소심하게 맨 뒤에 그것들이 실려있어요. 사람들이 잘 못 볼 수도 있었겠죠.

 


이지민 : <오목소녀> 때는 첫 장에 있었어요.

 


남순아 , 정말 위대한 발전이었죠.

 


이지민 : 그런데 <오목소녀때도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이 되어있었고, 많은 헤드 스태프들이 그것에 동의를 하고 이하 스태프들에게 고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스케줄이 바쁘고 여러 가지 제약사항으로 인해서 모두 참여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남순아 교육 자리에 연출부와 제작부가 있었고요, 키 스태프 중에는 촬영감독님만 있었던 거 같고, 미술팀 한 분이 오셨어요. 영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후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주도로 영화계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 양성을 했어요. 그때 저도 교육을 받고 강사가 되어서 <오목소녀>에서 제가 강의를 했어요. 그날 영진위에 있는 주임님이 왔고, 저는 참석한 스태프가 적어서 눈치가 보였거든요. 그런데 주임님이 굉장히 감동하면서 촬영감독이 있는 교육현장은 처음 봐요라고 하는 거예요.

 


이지민 : 저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로 봐야 하는 걸까요?(웃음) 여성 촬영감독이라서.

 


남순아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마 독립영화에서는 그렇지 않을까요.

 


백승화 성희롱 예방 교육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걷기왕>이랑 <오목소녀>를 굳이 비교해서 보자면, 개인적으로는 남순아 감독이 <걷기왕> 때는 스태프로 교육을 들었고 1년이 지나서 <오목소녀> 때는 본인이 직접 강의를 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남순아 감독의 개인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조금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생각도 같이 했던 거 같아요. 영진위에서 강사를 양성해서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것도요. 영진위가 국가기관인데, 이제 영진위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성희롱 예방 교육을 들어야 해요. 그런 것들을 보면 조금씩 바뀌어 간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목소녀>때 성희롱 예방 교육하면서 좋았던 게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그냥 단순하게 성폭력에 대한 교육만 한다기보다는 왜 그런 것들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말할 수 있어 좋았어요.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에는 올바르지 않은 조직 문화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일상적으로 위계적인 폭력들이 존재하니까요소리를 지르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작업 문화에 대해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할 때 같이 교육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성폭력이 나쁘다는 것뿐만 아니라 왜 그런 것들이 발생하게 되는지에 대해 스태프들도 조직 내에서 같이 고민할 수 있어요. 조심해야겠다는 분위기가 기본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좋았던 거 같아요.

 


이지민 :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하는 것이 모든 것을 방지할 수 있고 만능키로 작용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어요. 저희 현장도 여러 가지의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있었고요. <걷기왕> 때는 어땠어요?

 


백승화 사실 성희롱 예방 교육 2시간 하고 나서 사람들이 갑자기 각성을 하진 않으니까 당연히 바빠지면 교육받은 대로 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겨요.

 


김진아 : 성회롱 예방 교육은 정해진 시간을 마련하고 공간을 대여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를 듣는 거였다면, 작업 초반부터 평등한 조직문화를 위한 약속들을 사무실에 붙여놓은 것이 저는 더 좋았어요.



이지민 : 사무실 문에 붙여 놓은 거요?

 


김진아 . 물론 보는 사람들도 있고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등한 조직문화를 위한 약속들'을 저희가 일찌감치 사무실에 붙였거든요. <오목소녀> 크랭크인하는 첫날, 슛 들어갈 때 감독이 직접 나와서 어떻게 영화를 찍고 싶은지 조직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잖아요. 오히려 그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해서 그런지 더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백승화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교육을 받았다고 현장에서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촬영 이전부터 PD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고민들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또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평등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조직을 꾸리고자 각자 많이 노력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크랭크인 날 강압적인 촬영현장의 문화들을 많이 봤겠지만 우리 현장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저부터 잘하겠다이런 이야기를 했던 거 같아요. 그게 얼마큼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지민 : 효과는 분명히 있었어요. 왜냐하면 현장에서 아직까지는 기본적으로 감독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이 있으니까요. 감독 자체가 우리 현장은 이러한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 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조심하겠다.’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게 이하 스태프들이 주지하고 안심하는 문화를 만들어준 부분이 있었어요. 저는 예방 교육으로 방지가 되는 부분은 사실 굉장히 적을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미 이해가 있고 동의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된 스태프들이 예방 교육을 통해 매뉴얼을 배우는 거겠죠. 실질적으로 모두가 조심하자는 각인이 된 순간은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첫 슛을 찍기 바로 직전, 전체 스태프들에게 감독님이 이야기한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백승화 그때 정말 긴장했거든요. 어느 타이밍에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느라고요. 감독은 그렇게 안 떨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첫 촬영이고 저는 정말 떨었어요.(웃음) '다 준비 마치고 이제 찍으려는데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면 될까?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조금 정신 없는데 하면 안 되나? 좀 있다가 할까?' 하며 떨고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PD님도 그랬을 거 같은데, 막상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될지 굉장히 두려운 부분이 있어요. 이렇게 성희롱 예방 교육도 했지만 만약에 중요한 스태프나 배우가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처리를 해야 될지 현실적인 부분에서 고민되기 때문에 최대한 예방하기 위해서 많은 이야기를 계속 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동시에 저는 사실 이렇게 스태프들이 모든 것을 마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은 계약 관계에서 더 힘이 있는 제작사라던가 투자사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요. 실제로 만약에 어떤 배우나 키 스태프가 이런 문제로 교체가 된다면 제작사나 투자사들이 문제거든요. 비용이 더 들어갈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고민을 많이 안 하는 거 같아요. 성희롱 예방 교육도 일단 하라 그러니까 하는 거죠. 실질적으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예방을 한다는 마음으로 하는 거 같지는 않아요.

 


김진아 크랭크인 들어가면 현장에서는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만 다들 기다리잖아요. 사실 현장에서는 감독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이번에 <오목소녀>에서 감독님의 1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스피치 시간이 촬영 전체 기간 동안 큰 역할을 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실제로 한 스태프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게 정말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번 현장을 통해 자기도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실제로 들었어요.

 






백승화 최근에 남순아 감독이 성희롱 예방 교육 강의를 여기저기서 했잖아요, 최근에 명필름에 강의를 갔는데, 명필름 역시 현장이나 영화 제작에 있어서 힘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현장이 많이 바뀐다는 예시인 것 같아요.


 

남순아 최근에 명필름에서 제작하는 저예산 상업영화에 성평등 교육을 나갔는데요,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게, 저는 주로 독립영화 쪽으로 많이 나가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게 많은 분이 자리에 계신 게 처음이었어요. 제가 교육에 가면 사전에 영화 현장에서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일어났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는지 PD님 입으로 직접 말을 해달라고 이야기를 해요. 스태프들 앞에서 공지를 해달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PD님이 준비를 하겠다고 하셨어요

항상 교육을 가면 주요 키 스태프 들은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이를테면 감독과 주연배우, 촬영감독은 배우 리딩을 가고 나머지 말단 스태프들은 성희롱 예방 교육을 듣는 식으로 진행이 된다고 하더라고요그래서 명필름 측에 "어떤 파트의 스태프들이 주로 강의를 들을까요?" 물었더니 "팀장급 이상, 퍼스트 이상의 키 스태프들은 다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들이 들어야 바뀐다고 생각한다."라고 해서 정말 소름이 돋았어요. 의심을 했죠. 너무 옳은 대답을 하니까요. 여기 뭐지?(웃음) 가보니 정말 많은 스태프들이 있었어요. 이름표를 다 걸고 있었는데, 제가 "어떤 파트의 누구시죠?" 물었더니 한 분이 그립팀장님인 거예요. 그립팀도 주로 남성이 많은 포지션이잖아요. 카메라 장비 등 무거운 것을 많이 다루는 파트죠. 어떻게 보면 마초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파트인데 그곳의 팀장이 제 강의를 듣고 있던 거죠. 전율을 느꼈어요.(웃음) 그리고 어떤 분이 대답을 너무 열심히 하셨어요. ‘이분은 이 현장에서 뭘 맡은 분일까?’했는데 감독님이더라고요. 감독님이 맨 앞에서 열심히 듣고 있으니까 다른 스태프들도 나갈 수가 없죠. 감독, 촬영감독, PD 그리고 제작사 대표인 심재명 대표님도 다 듣고 있었어요. 심재명 대표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센터장이거든요. 임순례 감독님하고 공동 센터장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교육을 더 적극적으로 장려한 거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현장에서 권력을 가진 조직의 리더가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다른 스태프들에게 굉장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인상 깊었던 것이, 백승화 감독님이 스태프들에게 공지를 하면서 특히 헤드 스태프들에게 당부를 했거든요. 정확하게 누가 더 조심을 해야 하는지 지목했다는 게 인상 깊었어요. 각자 위치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지민 남순아 감독님을 찍는 페미에서 만나 <오목소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영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가 만들어지고 그에 공감한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찍는 페미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여러 번 모임이 있었어요. 공감하는 마음에서 저도 모임에 나갔고 거기에서 남순아 감독님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남순아 감독님의 소개 덕분에 백승화 감독님을 만나서 짧은 분량의 영상들을 몇 차례 작업했어요. 아마 그런 작업을 통해 신뢰가 생겨서 저에게 <오목소녀> 오퍼를 준 거겠죠?(웃음) <오목소녀>는 성평등, 위계 평등한 조직 문화를 시도를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모였어요. 그러다 보니 조감독님, PD, 다른 헤드 스태프들도 비교적 그러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로 구성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저도 참 그래요. 한국에서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그렇다 보니 여러 차례 고성을 지르거나 단문장으로 지시를 내리는 일방적인 소통 방식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기는 합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이 익숙하기도 해서 최대한 저희 촬영 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지 않으려고 의식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물론 팀원 개개인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위계 때문에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고 나름대로는 성공적이었던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장이 굉장히 바쁘기는 했어요. 아쉬웠던 지점인데, 예산이 적고 촬영회차도 적지만 찍어야 될 분량은 많았어요. 다른 현장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요. 부끄럽지만 그럴 때 제가 몇 번 큰소리를 낸 적이 있었어요. 상황은 급박한데 제 의도대로 되지 않거나 커뮤니케이션의 오해가 생겨서 답답한 마음에 그런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저는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 그 당시에는 심각하게 생각을 못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이 현장의 촬영감독이지만 저는 늘 여성으로 압박도 느끼고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했어요.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약자라는 것은 아니고요. 어쨌든 간에 피해를 받는 입장에 익숙해져 있다가 촬영감독이라는 포지션에 있을 때 제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정확하게 인지를 못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나중에 들어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 행동이 다른 스태프들에게 간 파장이 컸던 거죠. <오목소녀> 끝나고 다른 스태프분들이 이야기를 해주어서 알게 된 부분입니다. 만약에 말을 안 해주었으면 저는 지금까지 모르고 굉장히 잘 해냈다고 기분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웃음)

그래서 제가 생각한 건 본인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위치에 따라 조직형 문화에서는 권력이 생긴다는 거예요.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발언권과 권력과 영향력이 굉장히 크게 주어지는 거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안 되어야지라는 마음만으로는 조심할 수가 없고, 내게 권력이 있다는 걸 늘 생각을 해야 해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사소한 것들이 다른 의미로 팀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죠. 본인이 권력자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 같아요. 권력자가 되기 싫다고 해서 저에게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잖아요.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오목소녀> 끝나고 많이 고민을 하게 됐어요. 리더가 더 조심해야 하고 본인의 영향력에 대해서 인지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들이요.

 


남순아 저희가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어요현장에서 촬영감독이 갖는 권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저희 둘의 시각 차가 있었어요. 촬영감독님이 현장에서 그렇게 행동했을 때 나는 의견을 말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했죠.

 


이지민 저는 아니다,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이야기를 못 하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본인의 몫이라고 했죠.

 


남순아 이 관계를 저는 포지션의 관계로 본 것 같고 촬영감독님은 우리가 그전부터 맺어왔던 관계로 본 거죠. ‘동등한 관계, 친구 관계, 동료 관계를 맺어왔는데 현장에서 가서 말을 못 할 게 뭐야?’라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프로덕션이 끝나고 나서 촬영감독님도 나름의 성찰을 하지만 저도 저 나름의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고요. ‘왜 현장에서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까?’. 저 역시도 관성적으로 촬영감독 무서워. 말 못 하겠어.’ 했던 것 같아요.(웃음저도 놀라서 말을 못 한 거예요. 그리고 제 안에 고민이 시작된 거죠. ‘저 사람과 같이 일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문제 제기와 노력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나 자신을 너무 피해자의 위치로 두고 있지는 않나 하는 질문도 들기는 했어요.  

이 자리를 만들기 전에도 고민을 했어요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맞을까 싶었지만 애초에 완벽한 현장이라는 게 있을까요영화 현장뿐만 아니라 어떤 조직이든기업이든단체든 완벽하게 성평등한 곳이 있을까요? 우리 조직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에 대해 공유한다고 비난을 받는다면 다들 이런 일들을 무마하거나 덮어버리려고 하겠죠우리의 문제와 해결 방식 자체가 공론화 되고 우리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김진아 사실 감독님이 많이 노력해서 저는 크게 고민은 안 한 거 같고 개인적인 고민이 있었어요. 이번 현장에서 스태프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어떻게 보면 기존 질서에 많이 익숙해진 사람이라서 꼰대처럼 행동할까봐 걱정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어떻게 내가 바라는 것들을 실현할 수 있을지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당황스러운 것도 있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이전에 일 했던 현장은 감독님처럼 직책에 맡게 사람을 부르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반말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희는 다 존댓말하고 누구님하고 이름으로 불렀거든요. 조감독한테 연출팀이 그렇게 부를 때 저는 처음에 조금 당황했어요.(웃음) 그런 것들을 옆에서 바라볼 때 조금 낯설기도 하고 때로는 걱정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근데 역시 저도 현장에서 짜증내고 야단치고 후회하기도 했어요. 스태프들에게 또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웃음) 결과적으로 저는 꼰대 마인드가 아직 여전히 제 몸에 붙어있기도 하지만 이게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현장의 스태프들을 만나면 <오목소녀> 현장 이야기를 해주거든요. 이 경험을 나누는 게 좋아요. 사람들이 정말 신기해하고요.

 


백승화 사실 PD님이 영화를 한동안 쉬다가 제가 제안해서 같이 하게 된 거라 더 그럴 거 같아요. 최근에 어디서 들은 건데, 조직의 리더나 중요한 권력에 있는 사람이 감정표현을 할 때 그에 조직 전체가 좌지우지되면 가부장적인 조직일 가능성이 많대요. 남순아 감독이 이야기한 건가요?

 


남순아 권위주의적인 조직은 조직 리더의 멘탈에 따라 분위기가 좌우된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백승화 그게 비단 영화 현장뿐만 아니라 보통 한국 사회에서 많이 겪는 일이잖아요. 어렸을 때 아버지의 감정에 따라서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학교나 군대에서도 그렇죠. 윗사람의 감정이나 멘탈에 따라서 조직의 분위기가 영향 받을 때 그것에 대해 맞서서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관성적으로 조용히 입다물고 있게 되는 거 같아요. 그 순간에 맞서서 이야기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거 같고 저도 마찬가지로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계속 고민을 하지만 이지민 촬영감독처럼 현장의 어떤 순간에는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는 경우들이 당연히 있죠. 그런 순간에 내가 짜증을 내면 사람들이 당연히 나에게 주목하고, 소리를 질러서 빨리 하자고 하면 사람들이 빨리 할 거거든요. 적어도 뭔가 하려는 척은 하겠죠. 저도 보고 자란 게 다 그렇다 보니까 그걸 절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촬영감독님이 이야기해줬듯 내가 그런 위치에 있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남성, 그리고 감독으로 분명히 권력이 있는 위치에 설 때가 있거든요.

 


남순아 <걷기왕> 때 제가 처음 백승화 감독님한테 이야기하고 감독님이 PD님, 제작실장님과 내용을 공유해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실행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사실 성희롱 예방 교육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기도 했는데, <오목소녀>를 할 때는 오히려 굉장히 다르게 백승화 감독이면 당연히 우리 현장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해야지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근데 문제는 그것이 모두의 적극적인 고민과 합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순아 씨가 교육을 들었고 강사를 할 수 있으니까 순아 씨가 하면 되겠다'는 식으로 가게 됐어요. 오히려 방해는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관심 있는 애들이 알아서 할 거라는 분위기가 내부적으로 있었던 거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나는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고 나는 이 현장의 모든 성폭력과 위계 폭력을 모두 막아야 해.’라는 식의 이상한 부담감이 생겼어요.(웃음) 제가 교육할 때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상황을 목격했을 때 개입해야 한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연출부인 나는 과연 할 수 있을까 고민되더라고요. 그게 초반에는 굉장한 스트레스였어요.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어떻게 나 혼자만의 짐으로 가져가지 않고 여럿이서 같이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며 탐색을 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조감독님에게 누구님이라 이름을 불러보는 거죠. 이게 단순히 제가 맞먹자는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행동했을 때 이 사람의 반응을 통해 선을 어디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지 가늠해봤던 거 같아요. 아무래도 현장에서 악습이 발생하면 일단 PD님한테 ‘PD, 이런 상황이 있었는데 PD님이 개입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PD님이 개입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를 했어요. 그럼 PD님의 피드백이 오잖아요. ‘내가 그걸 해야 되나?’ 혹은 알았어.’ 혹은 그 정도는 너네끼리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피드백이 오면 계속해서 선을 넓혀가는 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자리에 안 계시지만 조감독님도 굉장히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어쨌거나 저보다 상관인 사람으로 그런 고민을 많이 들어주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많이 이야기 나눠주었어요. 만약에 부당한 상황에 처하면 와서 말하라고 했거든요. 저는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실제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이를테면 그 팀의 막내나 직급이 낮은 사람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어렵거든요. 그렇다면 자신의 헤드한테 말을 하고 싶은데 이 사람이 내편을 들어줄지 확신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만약에 제가 촬영팀인데 촬영감독님한테 조명감독님이 나한테 음담패설을 했다고 했을 때 촬영감독님이 우리 때는 더했어.’ 아니면 무시해.’라고 한다면 이 사람에게 원래 있었던 신뢰도 많이 무너져 내리게 될 테니까요. ‘이 사람은 나를 못 지켜주는구나.’라는 걸 확인하게 되죠. 근데 조감독님은 저에게 신뢰를 준 거죠.

 


이지민 예산이 적고 스태프가 적다 보니까 회차 끝날 때마다 모여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내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혹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조감독님이랑 이야기했거든요. '영화를 잘 찍자' 보다는 '이 현장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촬영감독인 저랑 조감독님이랑 굉장히 여러 번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결국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시행착오를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것도 이러한 목적에 동의하는 스태프들이 모여있으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현장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이야기도 없었을 거고, 아마 더 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겠죠.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이전에 여성이 있는 현장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여성 중심인 현장이 기쁘고 좋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조직 문화로 가기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희가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것도 저희가 완벽하게 성취해낸 것들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혹시라도 같은 시도를 하려고 하는 다른 분들이 있다면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저희가 인상 깊게 깨달은 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게 너무 중요해요. 공론화의 흐름이 더 거세져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따라오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걷기왕> 성희롱 예방 수칙 같은 경우도 당시에 굉장히 이슈가 됐잖아요. 이후에 제가 갔던 단편 현장들은 거의 대부분 스크립트 북이나 시나리오 북 첫 장에 그걸 실었더라고요.

 


남순아 저는 그것도 문제의식이 있어요. 물론 매뉴얼을 싣는 건 정말 좋은데 사실은 매뉴얼만 싣는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2시간의 성희롱 예방 교육으로 모든 게 예방되지 않듯이요. 결국 중요한 건 구성원들끼리 어떠한 매뉴얼을 정할지 같이 고민하고 합의하는 일 같아요. 요즘에는 표준 근로계약서를 쓰는 곳은 다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반드시 이수하게 되어있어요.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성희롱 예방 교육을 이수하는데, 별다른 고민은 하지 않죠. 강의 내용도 피해자를 탓하는 식의 안 듣느니만 못한 이야기가 포함되어있기도 해요. 예방 교육 이수에만 초점을 맞추기 보단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같이 어떤 것을 지향하는지 구성원들끼리 고민을 하고 나누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관객 저는 지역 독립영화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저희 협회는 기성 세대와 청년 세대의 비율이 반반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남성 영화인분들이 많고요. 오랫동안 성평등 교육을 전체 회원들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는데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강제성이 없으니 정말 들어야 될 사람들은 어차피 안 온다, 어차피 오는 사람들은 이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고 흐지부지 되거든요. 아직도 성평등 교육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어요.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에 오늘 이 자리가 반갑게 느껴져서 찾아오게 됐습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어느 정도 모두가 성평등 교육에 참여하도록 강제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반 단체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어떻게 말하고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지가 계속 고민이에요.

 


백승화 한독협에 남순아 감독이랑 저랑 성평등 위원회에 있어요. 한독협에서도 그런 비슷한 고민을 많이 해왔거든요. 성희롱 예방 교육을 1년에 한 번씩 하는데 말씀하셨던 것처럼 항상 들으러 오는 분들은 정해져 있고 정작 들어야 되는 분들은 안 오죠. 이런 경험들이 있어서 의무화하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의무화했을 때 회원들의 반발도 있을 수 있고, 의무화라는 건 어떤 페널티를 수반해야 하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해나가려고 해요

 


남순아 사실 강제성을 갖기 어려워요. 올해 3,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오픈했거든요. 영진위에서 지원을 하고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위탁을 받은 단체예요. 겸사겸사 홍보를 하자면 올 3월에 성폭력 실태 조사를 발표했고요, 그곳에서 영화계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를 파견 신청하면 강사료를 지원을 해줘요. 이런 기회를 활용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한독협의 원대한 꿈은 돈을 지원받아 1년에 4번 가까이 교육 횟수를 늘리는 거예요. 그러면 참여할 기회가 많아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은 분에게 페널티를 주기는 어려우니 참여자를 독려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희롱 예방 교육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저희가 <오목소녀> 때도 <걷기왕>에서 어떤 걸 실패했는가 고민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완벽하게 성평등한 현장은 없기 때문에 <걷기왕>에서도 사소하게 문제들이 있었어요. 그럼 이번 <오목소녀>에서는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를 고민했을 때 성희롱 예방 교육은 당연한 것이고, 이를 계기로 스태프들간에 무엇이 폭력인지, 무엇이 성희롱인지 합의가 있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구성원들 간에 논의가 있어야 하는 거 같아요. 아마 속해있는 단체에서도 저희가 했던 평등문화약속문을 부착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논의를 환기시킬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관객 : 성희롱 예방 교육이 법에 의해 명시되어있잖아요. 법에 따르면 실제로 직장 내에서 성희롱이 발생하면 사업주에게 신고를 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사업주는 신고를 받으면 즉시 조사를 하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조사와 함께 피해 신고인과 가해 지목인을 분리시키는 절차들이 나와있는데, 법조항을 읽으면서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업자나 사용자의 참여가 무엇보다 절실한 거 같아요. 성희롱 예방 교육이나 평등한 조직 문화 만들기 운동 자체가 어떻게 보면 고용된 스태프들에게서 나오는 거고 사용자는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잘 되겠지라는 생각인 거잖아요. 영화 촬영 현장 내에서 실제로 성희롱 사건 등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사후처리 부분에서 명백한 한계가 발생할 것이라 추측합니다. 결국에 이건 사업자 혹은 제작자, 회사 대표가 어떤 의지를 가졌는지에 달려 있는 문제일 텐데요, 이런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 방안을 찾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지, 생각한 게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백승화 저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걷기왕> 성희롱 예방 교육이 개봉할 때쯤 이슈가 됐잖아요.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한 게 <걷기왕> 현장이 처음이라는 것도 정말 놀라웠는데, 많은 분들이 실행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칭찬하셔서 저희도 성희롱 예방 교육을 촬영 전에 실시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꼈던 거 같아요.

막상 끝나고 나니까 이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상 제작사라던가 투자사가 해야 하는 일인데,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방관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껏 많은 영화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걸 단순히 영화 현장의 가해자나 피해자 개인의 문제로 떠넘겨 버렸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까 항상 피해자들은 현장을 떠나거나 상처받고요. 저희가 처음 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도 남순아 감독이나 제가 그런 폭력들을 목격해왔기 때문에 방어기제로써 했던 것인데, 이전부터 아무도 이런 문제를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에 스태프들이 하게 된 케이스인 거잖아요. 그걸 했다고 해서 잘했네하고 마는 게 아니라 영화 제작하는 분들이나 투자하는 분들이 더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체계가 자체가 없는 거 같아요. 쉽게 말해서 사실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체계가 없죠.

 


이지민 : 아직 프로토콜이 만들어지지 않은 단계인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런 종류의 토크 자리마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데요, 이건 제작사의 책임이고 제작사가 자신의 책임하에 컨트롤을 해야 되는 문제라는 것 까지는 동의가 다 되어있는 거 같아요. 근데 제작사가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핸들링할 것인가에 대한 자체 매뉴얼이라던지 프로토콜이 없는 거죠. 또 마찬가지로 스태프들도 제작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제작사가 책임을 지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없는 것 같아요. 그걸 이제 문화적으로, 법적으로 라고 만들어가는 것이 다음으로 마주해야 하는 단계가 아닐까 해요.

 


백승화 <걷기왕>이나 <오목소녀>에서는 저희가 제재를 가할 정도의 사건은 없었기 때문에 저희도 문제 해결 방식을 경험해본 적은 사실 없어요. 자연스럽게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는 생각해요이런 자리에서 제작사나 투자사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이런 사항에 대해 계약서에 명시하거나 제도를 마련해야지 스태프들이 해결하는 문제로 남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에요. 스태프들이 평등한 조직 문화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갑자기 주연배우나 감독이 문제를 일으켜버리면 방법이 없잖아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투자사나 제작사가 방안을 만들어야 되는데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어요.

 


이지민 : 상업영화 쪽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흐름상 미투 운동으로 인해서 제작이 무기한 보류가 된다거나 개봉이 미뤄지는 등 실질적인 손해가 생기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에 내부적인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만 해보는데요, <걷기왕>을 통해 성희롱 예방 교육 매뉴얼이 보급이 된 것도 2년 전인데 지금은 보편화가 되어있고,  일단은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하는 것이 기본값이 된 상황이잖아요. 그런 식의 여지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관객 : 최근에 명필름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교육을 다녀왔다고 하셨어요. 저도 성희롱 예방 교육을 들으면서 관련법을 찾아봤는데 예방 교육의 내용에는 성희롱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면 어떻게 처리하고 성폭력 누구한테 상담해야 하고 어떤 절차가 이루어지는지 교육을 하도록 되어있더라고요. 혹시 명필름에서 강의할 때 실제로 상업 현장 내에서 구체적인 처리 방안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꼭 답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생각하는 처리 절차가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남순아 명필름에서 강의할 때는 사실 구체적인 절차까지는 공유가 되지는 못했어요. 일단 사안이 발생했을 때 PD님에게 이야기를 하도록 안내했어요. 그런데 그 현장의 PD님이 남자분이어서 PD님에게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바로 제작사 대표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다고 PD님이 공지를 해주었고요. PD 밑에 제작실장이 있는데 저는 사실 그 사람들이 현장의 고충을 듣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근데 굉장히 많은 PD들이 자신의 역할을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주연배우나 주요 스태프, 감독이 성폭력을 저지른다면 그 사람을 실제로 자를 수 있냐는 질문들을 많이 해요. 무엇이 옳은지는 알지만, 정말 그게 가능하냐는 거죠. 그게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도 정말 중요한데, 저는 애초에 생각을 조금 다르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술자리를 많이 했다면 술자리를 몇 시까지 할 지, 회식을 꼭 술을 마시면서 해야 할 지 등 사소한 것들부터 이야기해보는 거죠. 실제로 처음부터 어떤 강력한 추행이 일어나지 않아요. 소위 사소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PD님한테 말을 할 수 있고, PD가 개입해서 앞으로 그런 행동을 하면 조치가 들어갈 것이다는 식으로 경고를 준다면 반드시 교체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순아 :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해주시거나 어떤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저희에게 다음 스텝이 있어야 하잖아요.

 


백승화 고민하고 있어요. <오목소녀> 현장에서는 제가 고민했던 것들을 실제로 많이 실행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동시에 위계폭력,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영화 현장이 항상 바쁘고, 돈이 없고, 시간이 없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오목소녀>도 잘 했는지 모르겠어요. 적은 예산으로 많은 촬영을 해내야 하는 환경이 해결되어야 다른 문제들이 같이 해결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도 평상시에는 그러지 않아요. 굉장히 바쁜 상황에서 압박을 받는 거죠. 이런 문제의 기반은 사실 적은 예산, 많은 노동량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상업영화는 표준 노동기준을 만들자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독립영화계에서도 이런 고민들을 해야 해요. 어떤 대안이 있는지, 어떻게 찾아갈 건지 고민해 보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다음 스텝인 것 같습니다.

 


이지민 : 페미니즘적인, 위계폭력에 반대하는 인식을 가진 작업자를 더 많이 만나고 싶어요. 그런 자리를 늘 기대했지만 누군가가 나서서 만들어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물론 조직화된 움직임들이 이미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성 촬영자들을 조금 더 많이 알고 싶어요. 더 많은 분들이 모이는 기회를 만들어가면서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싶어요. 저는 <오목소녀>를 작업하면서 내가 실수하거나 잘못하고 있어도 이걸 이야기해주고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어요. 그 덕분에 찾게 된 방향이 있는 것 같아요. 다음 번에도 가능하다면 그런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현장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노력하고 싶습니다.

 


김진아 성희롱 예방 교육 실행뿐만 아니라 즐거운 노동 현장이 되려면 노동 환경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영화계의 많은 숙제가 있는데 일단 제대로 된 임금 없이 무리한 환경에서 일하는 게 해결되지 않으면 이런 문제들이 반복될 것 같아요. 특히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요소들이 영화 현장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가족환경에서부터 극복해야 할 숙제로 다가오거든요. 이런 문제들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남순아 <걷기왕> 때도 그렇고 <오목소녀> 때도 그렇고 스태프들은 성평등 강의를 들었는데 사실 배우들은 듣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음 현장에 참여하게 되면 배우들도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현장에서 다들 성희롱과 성폭력 나쁘다, 해결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까 말씀해주신 것처럼 가해자와 피해자 격리 외에 다른 어떤 옵션들이 있는지, 어떤 절차들을 밟아야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우왕좌왕하게 되거든요. 매뉴얼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끝까지 자리 지켜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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