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쌓인 시간을 지나 어른이 되는 우리들 이야기 <소중한 날의 꿈>
개봉 4주년 기념 인디토크(GV)
일시: 2015년 6월 24일(수) 오후 8시
참석: 안재훈 감독
진행: 이현희 인디스페이스 프로그래머
*관객기자단 [인디즈] 전지애 님의 글입니다.
'국산 애니메이션의 자존심'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영화 <소중한 날의 꿈>이 어느덧 네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2011년에 개봉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날의 꿈>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애니메이션으로, 누구나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년에 개봉한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중한 날의 꿈>의 안재훈 감독이 자리에 함께하여 관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현희 프로그래머 (이하 이): <소중한 날의 꿈>이 네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소중한 날의 꿈>의 기획 단계, 그리고 배경이나 등장인물 등을 설정하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해요.
안재훈 감독 (이하 안): <소중한 날의 꿈>은 2003년 3월 정도부터 작업을 시작해서 2011년에 개봉을 한 작품이에요. 2003년만 해도 대한민국의 풍경으로 영화로 만든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어요. 일본의 애니메이션만큼 사랑 받을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고요. 한국의 캐릭터들이 연기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독특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도 했어요. 저 같은 경우 어릴 적부터 일기를 써오면서 계속 성장에 대해서 기록을 했고, 저희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에는 나이가 어린 스태프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소년‧소녀 나이 때의 이야기더라고요.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포기한 관객층이 3-40대 이상의 분들인데 그런 분들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 분들로부터 지금의 정서가 이어진 거니까요. 그 정서를 이어받은 현재의 아이들이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더욱 사랑해줄 수 있겠구나 생각 했죠. 그래서 7-80년대를 영화의 배경으로 하되 세대의 공통된 주제인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게 되었죠.
이: 영화가 일종의 성장 드라마에요. 감독님께서도 어떤 청춘의 시기를 거쳐 오셨을 테고요. 그래서 주인공들을 보면 보편적인 느낌도 들지만 감독님이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거기에 영감을 받아 캐릭터를 설정했을 거라는 느낌도 받았어요. 예를 들자면 감독님의 첫사랑을 여자주인공인 ‘이랑’에게 투영했다든지 ‘철수’의 모습이 감독님의 소년 시절을 닮았다든지요.
안: 처음 영화를 만들 때에는 ‘첫사랑’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단지 관객 분들이 세 명의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통해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에너지를 얻어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랑’이는 누군가에게 지기 싫어서 시합 같은 것들을 포기해버리잖아요. 그런 모습들은 제가 갖고 있던 모습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수민’이 같은 경우는 어릴 때 저랑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실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돌이켜보면 ‘수민’이처럼 저 역시도 어른이 보면 웃을만한 약간의 허영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33살이 되면 자살할거에요” 라는 대사가 실제 제 일기장 속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대사로 썼죠. 그러한 과정들을 모두 겪었기 때문에 보다 근사한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들을 영화에 담으려고 노력했죠. ‘철수’ 캐릭터는 오히려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의 제 성격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이: 원래는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계시네요. 언제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신 건가요?
안: 요즘 학생 분들과 얘기를 해보면 애니메이션을 하기로 마음먹은 시점이 굉장히 뚜렷하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는 그냥 어느 순간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그걸 계속하게 된 거에요.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오히려 오래 하다 보니 계기가 생긴 것 같고요. 오히려 지금에 와서 제 직업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 같아요.
이: 얼마 전에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 다녀오셨잖아요. 그것과 관련된 소식도 전해주세요. 다른 나라의 애니메이션과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안: 2011년에 <소중한 날의 꿈>이 안시영화제에 경쟁작으로 초청을 받아서 갔을 때 그곳에 계신 관객 분들 때문에 상당히 놀랐어요. 축제처럼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소중한 날의 꿈>을 좋아해주셨어요. 이번에는 작품을 만든 후에 간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기 전에 선택이 돼서 간 것이었어요. 제 다음 작품을 안시 관계자 분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였죠. 이번에도 여러 가지를 느낀 것 같아요. 크게 느낀 것은 두 가지 정도에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영화제에 딸이나 아들이랑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이가 없거든요. 그래서 행사 내내 우리 스태프들이랑 다음에 꼭 같이 와서 만든 영화를 함께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두 번째로는, 한국에서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만드는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애써 싸워가고 있는 단계거든요. 싸운다는 것이 나쁜 사람들이랑 싸운다는 개념이 아니라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는 환경에 대해 싸워간다는 것을 말하는 거죠. 이런 측면에 있어서 느낀 점이 좀 많았던 것 같아요. 그곳의 분위기나 환경은 여기보다 훨씬 더 열려있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저희 스튜디오를 알고 있고 굉장히 신뢰하고 있고 나오는 작품에 대해 기대하고 있고요.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근사한 것을 남겨줄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관객: 감독님께서 설정하신 등장인물들의 미래 모습이 어떤지 궁금해요.
안: 작품을 만들 때 TV시리즈를 만드는 경우랑 극장용을 만드는 경우랑 다른 것 같아요. TV시리즈를 만들 때에는 인물들이 나중에 무엇이 되겠지, 까지 생각을 하는데 <소중한 날의 꿈>을 만 때에는 그런 측면들을 생각 못했어요. 지금의 6-70대의 어른들이 몇 십 년 전에 영화 속 아이들이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그 아이들은 지금의 어른들이 되어서 어떤 일들을 해가고 있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사실 아직까지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이: 영화를 보면 판타지의 느낌이 나요. 특히나 공룡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참 아름다웠다고 느꼈거든요. 그 장면은 어떻게 연출하시게 된 건가요?
안: 사람들은 가끔 자기가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해답을 잘 못 말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랑’이도 어떻게든 한 발짝씩 걸어야 발자국을 남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거에요. 공룡이 나오는 장면을 통해서 자기와 똑같은 모습을 한 공룡한테 걸으라고 말하죠. 걷는 것이 곧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라는 해답을 스스로 말하는 거죠. 이미지적으로 보면, 할리우드에서는 할리우드의 방식으로 공룡을 만들었잖아요. 저는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은 어떤 공룡일까, 라는 고민을 했었어요. 실제 해남에 내려가서 공룡 발자국을 보면 되게 뭉클해요. 공룡은 크니까 발자국도 극장만 할 것 같은데 (웃음) 막상 가서 보면 발자국이 되게 작아요. 그걸 딱 보는데 너무 뭉클하더라고요. 한반도, 지구를 다 덮었던 공룡도 고작 누구의 것일지 모르는 발자국 하나 남기고 간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삶을 또 무엇인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발자국을 통해 깨달은 것이 너무 많아서 할리우드 공룡이 아닌 한반도에 살았을 것 같은, 다른 공룡을 만든 거죠. 실제로 한반도에는 육식 동물이 드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반도 공룡의 몸엔 이끼나 꽃이 자랐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작업을 했죠.
이: <소중한 날의 꿈>이 처음 개봉했을 때 국산 애니메이션의 자존심이라는 타이틀을 많이 썼어요. 감독님 말씀처럼 한국적인 것, 우리만의 보편적인 것들이 영화 속에 많이 녹아있어서 그러한 타이틀을 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 가지 더 궁금해진 것은 영화를 만드는 데 10년이 걸리셨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10년의 작업 과정이 상상이 잘 안되거든요. 시나리오가 나와 있는 상태지만 제작을 하다 보면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소중한 날의 꿈>의 긴 작업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안: 항상 말씀 드리는 거지만 10년간 이 작품만 한 게 아니에요. <겨울연가>나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도 했고, 그 외에 많은 게임 애니메이션도 틈틈이 작업을 했죠. 그런 작품들로 열심히 돈을 모아서 <소중한 날의 꿈>을 제작했어요. 그런 측면에 있어서는 당당해요. 최선을 다해 작업을 하고 그것을 통해 얻은 수익을 <소중한 날의 꿈>에 투자한 거니까요. 이 작품을 제작하고 시간이 지난 후 보니까 다른 측면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져요.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 너무 집중을 하다 보니까 행복에 상대적으로 비중을 덜 두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스태프들하고 행복에 더 중심을 두고 작업을 하고 있죠.
이: 너무나 공들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볼 때마다 들어요. 그리고 볼 때마다 새롭고 좋아요. 아까 안시에 초청되었다는 차기작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더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에 이어 한국 단편 문학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계속 만들고 계시잖아요. 그 부분도 얘기해주세요.
안: 다음 작품은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이에요. <소중한 날의 꿈>이 7-80년대 대한민국을 담았다면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은 지금의 서울과 대한민국을 담고 있어요. <소중한 날의 꿈>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어린 '나'와 그러한 어린 시절들을 지나온 어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주는 작품이라면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은 말 그대로 작품을 보면 살아오르고 싶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어요. 원래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은 기획할 때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보다 활발한 애니메이션이었어요. 그런데 <오래된 인력거>(2011)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드신 이성규 감독님이 저랑 동갑인데 돌아가셨고 그 분 회고전을 인디스페이스에서 했어요. 그 때 회고전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사람이 살면서 영화를 몇 편이나 만들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 산업이 나와 어울리는 옷일까, 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근사한 애니메이션 하나를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예쁘게 들어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이라는 작품을 만들게 되었어요. 스태프들이랑 농담처럼 이런 얘기를 해요. <소중한 날의 꿈>이 10년 걸렸듯이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도 아무도 돈을 안대면 또 10년이 걸릴 거라고요. <소중한 날의 꿈>은 숨어서 몰래 만들며 언젠가는 잘 만들어서 선보일 거야, 라고 생각했다면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은 보다 축제처럼 만들고 싶어요. 스태프, 그리고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분들도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영화가 빨리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에서 살아오름을 느낄 수 있도록요.
그리고 1년 마다 개봉을 목표로 하면서 제작하고 있는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이 있어요. 작년에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이 개봉을 했죠. 올해 <소나기, 무녀도>가 개봉 예정에 있고요. 이 작품들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꼭 1년에 한 편씩은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지금의 아이들이 잘 읽지 않는 한국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세대 간의 멀어간 간격을 회복하고 싶어요. 애니메이션을 통해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전 세계 분들이 제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한국 단편 문학을 통해서, 우리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소나기>는 얼마나 풋풋하고 예쁠지 기대가 되고요, <무녀도> 역시 기대가 됩니다.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을 10년을 기다리긴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빠른 시일 안에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년 이맘때쯤에 5주년으로 다시 <소중한 날의 꿈>도 만날 수 있겠죠. 감독님, 관객 분들에게 마무리 인사 말씀 부탁 드려요.
안: 이번 4주년은 크게 신경을 못 썼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알고 찾아와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이 작품이 매년 생일 파티를 하고 독립영화관에서 재상영을 하는 큰 이유가 있어요. 지금 세대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남겨줘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저는 건강함과 당당함을 남겨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건강하지도, 당당하지도 못하잖아요. 극장 환경만 봐도 그렇죠. 멀티플렉스에서 독과점이 발생하니까요.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문화가 자본에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모든 독립영화관들이 항상 건강한 영화들을 상영하고 그 영화관이 관객들로 꽉 차기를 바라요. 대한민국의 모든 영화들이 오락을 넘어선 날이 오기를 꿈꾸면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어요. 저는 저희 스태프들과 작품 생일 파티,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 등을 통해서 역사를 계속 만들어가고 싶어요. 앞으로 많이 독립영화들을 관람해주시고 젊은 감독들을 응원해주시면 좋겠어요. 내년에는 보다 많은 걸 준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해외 애니메이션이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현재, 안재훈 감독은 한국적인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대해 관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의 모습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소중한 날의 꿈>과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이 보다 성숙한 한국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큰 발자국을 남겼다고 생각된다. 차기작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이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어떠한 발자국을 남길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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