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낯섦, 우연과 인연의 모호한 경계 속을 여행하다
<국경의 왕> 임정환 감독 인터뷰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정은 님의 글입니다.
<국경의 왕>이 무브먼트와 인디스페이스 두 번째 개봉 프로젝트로 봄과 함께 찾아왔다. <국경의 왕>은 임정환 감독의 전작 <라오스>(2014)에 이어 익숙한 사람들과 낯선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낸다. 자연스럽고 즉흥적으로 촬영된 장면들을 관통하며 정처 없이 배회하는 마음들과 모호하지만 풍부한 감정들을 마주하도록 한다. 새로이 다가오는 이 계절과 함께 <국경의 왕>은 익숙함과 낯섦, 우연과 인연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선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한 송이 꽃과 함께 관객들을 맞이했던 프리미어 시사회날, 임정환 감독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반갑습니다. <국경의 왕> 개봉을 축하드려요. <춘천, 춘천>에 이어 무브먼트, 인디스페이스와 함께 단관 개봉을 진행하게 되었는데요. 개봉까지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김새벽 배우님과 영화 작업을 진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님이 소속되어 있는 무브먼트 분들과 말씀을 나누게 됐는데요, 사실 영화를 완성하는 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려 개봉을 크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무브먼트에서 인디스페이스와 함께 개봉 진행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개봉까지 오게 됐습니다.
<라오스>에 이어 <국경의 왕>도 해외 로케이션으로 촬영이 진행되었죠. 이번에도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결정하게 된 이유를 듣고 싶어요.
저에게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해온 친구들과 함께 작업을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각자 바쁜 일들이 있다 보니까 여행을 간다는 핑계가 가장 작업하자고 꼬드기기 좋은 핑계여서 그렇게 하게 되었어요. 저한테는 익숙한 사람들이 낯선 공간에 가서 낯선 사건을 맞이하는 걸 실제로 보기는 힘들지만 영화 안에서는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서 공교롭게도 두 편 다 외국에서 촬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영화의 한정된 예산 내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영화는 급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없고 즉흥적인 느낌마저 있어요. 제작 방식이 궁금해집니다. 촬영 및 제작에 있어 어떤 부분을 신경 썼는지 듣고 싶습니다.
물론 김새벽 배우님과 조현철 배우님도 계시지만 출연하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비전문 배우다 보니 너무 잘 짜인 대사나 상황을 쥐여드리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대사와 상황을 꾸며나가는 게 어떨까 싶어서 즉흥적인 느낌으로 작업을 진행했어요. 대사도 제가 완벽히 써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상황만 드렸고, 그 이후의 구체적인 대사나 동작 같은 것들은 그때그때 협의해나가면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 면도 있는데, 동시에 제 입장에서는 덜 각박한 느낌으로 촬영을 했던 것 같아요.
촬영 도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다면 함께 말씀해주세요.
대본이 정해져 있던 게 아니니까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오늘은 뭐하지?’라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스태프와 배우 분들을 지켜보는 게, 이상한 말일수도 있지만 참 흥미로웠어요.(웃음) 매일 아침마다 커피도 마시고 밥도 사오고 각자의 아침을 준비하는데, 제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의 서울에서의 일상적인 삶과 굉장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여행지에 영화를 만들러 온 특수한 상황 속에서 어쨌거나 하루하루의 일상을 꾸려가기는 해야 되는데, 그런 모습들이 그야말로 익숙하면서 낯설기도 한 기대감을 저에게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정하게 어떠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기 보다는 매일 아침 각자의 사이클대로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촬영 나갈 준비를 하는 일상을 관찰하는 게 저는 늘 흥미로웠어요. 아마 참여하는 배우나 스태프 분들도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친해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촬영과 여행을 동시에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원래는 1부 ‘국경의 왕’을 준비하고 촬영을 시작했는데요, 말씀드렸던 대로 즉흥적인 요소들이 작용하고, 저 또한 어떤 변수가 생긴다면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제가 큰 변수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원래 하고자 했던 방향으로 밀고 나가느냐, 그 사이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시점이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지점이었어요. 완성된 영화가 거의 촬영 순서대로 편집이 되어 있는데, 2부부터는 제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어나가게 된 부분입니다. 사전에 준비했던 것이 아닌, 여행을 와서 특수하게 겪고 있는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더 즉흥적으로 나아가고자 마음을 먹게 되면서 새롭게 2부를 이어가게 된 것 같아요.
인물이 등장하기 전부터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까지 지긋이 응시한다는 인상을 주는 장면이 많이 등장했던 것 같아요. 공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아마 카메라 촬영 방식의 영향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한테 익숙한 사람들을 관찰한다는 느낌이 들다 보니까 어느 한 사람을 클로즈업을 한다거나 가까이서 디테일한 표정들을 촬영하는 것보다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분들이 여러 면에서 작용하는 상황들을 지켜보는 것, 그러니까 연출자가 아니라 동료로서 혹은 친구로서 함께 촬영하러 간 사람들을 대하는 거리가 촬영에 반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서 촬영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멀리서 상황을 관찰하는 듯한 앵글이 영화에 많이 들어간 것 같아요.
공간과 함께 전반적으로 인물들을 거리감을 두고 관조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주변의 소리나 서로의 말소리가 섞여서 자연스러우면서도 흐릿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이렇게 연출을 하신 의도가 궁금해요.
정말 솔직하게, 사운드는 사실 더 좋아야 하는데 품질이 좋지 않은 부분도 있고요.(웃음) 제가 선택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즉흥적으로 촬영을 하면서, 기획이나 계획으로는 얻어질 수 없고 지금이 아니면 나오지 않을 결과물을 그때그때 가져가고 싶으니까 차가 지나가더라도, 녹음이 잘 안 되더라도 어떤 순간이 괜찮다면 그 장면을 영화에 쓰게 됐어요. 또 어떤 면에서는 배우들이 대사를 굉장히 많이, 적극적으로 하지만 별로 중요한 대사가 많지는 않습니다.(웃음)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경향도 있고요. 그래서 제가 배우들을 관찰했듯 보시는 관객 분들도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이 의미부여하지 않더라도 멀리서 그들을 관찰할 수 있게끔 오히려 대사는 들릴 듯 말 듯한 느낌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동철과 유진은 영화를 공부했던 사람들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그들의 전사가 궁금해요. 여행을 오기 전 둘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둘은 영화를 공부하면서 서로 동료로서 좋아했던 관계였을 수도 있고 연인이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영화 안에서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고요. 어쨌거나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고 약간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애매한 관계인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간지러운 말이긴 해도 제가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하면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돈독하지만,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애증이 섞인 감정이죠. 동철과 유진은 서로에게 그런 감정이 있는, 한때 친밀했다가 멀어진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기 전에 동철은 해외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고요. 유진은 영화를 준비하다가 잠시 취재차, 혹은 단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렇게 오게 되었다고 가정했어요.
동철과 유진의 곁을 맴도는, 낯설면서도 코믹하고 어쩐지 위험해 보이기도 하는 인물들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개성이 강한 인물들을 어떻게 구상하고 캐스팅하셨나요?
캐스팅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요.(웃음) 같이 간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해야 하니까 그분들께서 출연해주셨죠. 다만 의외의 인물들이 등장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행을 할 때도 그렇고 영화 작업을 할 때도 그렇고 계획대로 안 되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 같거든요. 사실 배우들도 준비가 안 되어있고 저도 준비가 안 되어있었지만 함께 작업하면서 어떻게든 즉흥적으로 흥미로운 상황을 만들어서 영화에 반영된다면 낯설면서도 재미있는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한국에서 출발할 때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 아무래도 제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분들 위주로 꼬셨습니다.(웃음)
캐스트가 연출 스태프를 겸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사실상 김새벽 배우, 조현철 배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프로듀서, 스크립터, 동시녹음 등의 역할을 겸했습니다. 임정환 감독님도 영화에 등장하고요.
사실 제가 출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다른 스태프 분들은 처음부터 배우로 등장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출발을 했어요. 사전에 요청을 자세히 하지는 않았지만 본인들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웃음) 그래서 크게 거부하지 않고 등장해서 개인기를 펼쳤습니다.
그럼 감독님의 연기는 계획에 없었던 건가요?
예. 저는 마지막까지 나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하다 보니까 나오게 되더라고요. 누군가 부족한데 지나가는 배낭여행객을 모셔서 ‘잠깐 출연해주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네. 그러게요, 제가 왜 출연을 했을까요?(웃음)
영화에서 마음을 이야기하는 대사가 기억에 남아요. 게임을 하면서 “마음이 좋다, 마음이 편하다”라는 대사나, 전도를 하면서 “원래 마음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감독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촬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프리 프로덕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애초에 즉흥적인 장면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영화다 보니까 정말 변화무쌍했거든요. 로케이션이 정해져 있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의도했던 것들, 처음에 찍고 싶었던 영화가 계속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연출자는 결단을 내려야 하잖아요. 결단을 내린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마음이 제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건, 연출자로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변화무쌍한 상황 속 제 이야기로부터 출발했지 싶어요. 동시에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건 일반화할 수 있는, 모든 분들이 평소에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해서 영화에 등장시킨 것 같고요. 우선 제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안 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저한테 중요했습니다.
1부와 2부에 걸쳐 꽃과 종, 그리고 묘지가 꾸준히 등장하는데, 이러한 소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영화의 끝에 등장하는 바르샤바에 있는 공동묘지에 여행을 갔을 때 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어요. 묘지가 산꼭대기에 있거나 한적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도심지 한 가운데에 공원처럼 예쁘게 꾸며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 묘지인지 모르고 들어갔거든요. 꽃이 많이 펴있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공원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묘지였어요. 약간 우리나라의 정서와는 다르다고 느껴졌어요. 평소의 생활공간이 죽음과 가까이 있는, 딱히 을씨년스럽지도 않고 공원처럼 꾸며져 있는 예쁜 묘지와 함께 있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묘지는 처음부터 등장을 시켜야겠다고 다짐을 했고요. 종이나 꽃은 묘지 근처에 많이 팔더라고요. 전반적으로 꽃가게가 우리나라보다 많았던 것 같고 아무래도 묘지 근처다 보니까 종교적인 물건들을 많이 판매하는 곳이 많았어요. 묘지 근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사물들이 꽃과 종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택하게 된 것 같아요.
감독님에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인지도 듣고 싶어요.
영화를 계속 만들고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제 꿈인데요, 여행이 되게 설레고 즐거운 일이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힘들고 피곤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항상 가고 싶어요. 그리고 저한테 영화를 만든다는 일이 여행처럼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차기작으로 <수나라 황제>를 구상하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현재 기획 중에 있으신지, 이후에 국내 로케이션으로 영화를 찍을 계획도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제목이 <수나라 황제>라 국내에서 찍기 참 애매할 것 같아요.(웃음) 사실 후보 제목만 한 열댓 개 있는 것 같고요.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우와 스태프 분들을 계속 꼬드기기 위해서 허황된 제목을 몇 개 지어놓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수나라 황제>고요. 제 영화는 항상 인상적이었던 여행의 공간에서 출발을 했던 것 같아요. 로케이션은 국내나 국외를 가리지 않고 제가 인상적이었던 낯선 공간이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지금 예상으로는 다음 촬영 로케이션도 외국이 될 것 같습니다.
관객 분들이 <국경의 왕>을 어떻게 보았으면 좋겠는지, 어떤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재미있다는 말이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영화가 모호한 구석이 있고 정확하게 결론지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요, 그래서 영화를 당혹스럽게 보시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해요. 영화 속에 계속 등장하는 단어를 써먹자면, 마음 그대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를 보면 아름다운 느낌도 있고 쓸쓸한 느낌도 있고 모호한 느낌, 두려운 느낌도 있을 것 같아요. 어느 한 단어로 단정 짓고 싶지는 않고요. 다양하고 풍성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거든요. 관객 분들께서도 하나의 획일화된 마음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을 영화 속에서 함께 느껴주시고, 극장을 나서면서 많은 감정을 가지고 집에 가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디스페이스에서 <국경의 왕>을 만나게 될 관객 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인디스페이스는 광화문에 있을 때부터, 제가 영화를 공부할 때부터 자주 찾았던 극장이라 제 영화를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단지 개봉하는 것 그 이상으로 기쁩니다. 독립영화를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러 오시는 관객 분들도 제 영화를 좋아해주신다면 너무 감사할 것 같고 더 나아가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하고 있는 다른 한국독립영화에도 많이 관심 가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경의 왕>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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