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벚꽃한줄 관람평

송희원 | 뮤지션 장범준, 그의 다음 음악을 앵콜 

이현재 | 모든 불행은 그 자신만의 방법으로 불행하지만, 행복은 모두 비슷하다

박영농 | 곧, 더워짐

이지윤 | 벚꽃 연금 수혜자의 본격 봄맞이 귀호강 영화

최지원 | 봄의 마음으로

김은정 | 장범준, 그라는 벚꽃이 피기까지




 <다시, 벚꽃> 리뷰: 봄의 마음으로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어떤 계절을 떠올리기만 해도 연상되는 노래를 부른다는 건 가수에게 어떤 의미일까.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은 발매된 이후 매해 이례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입춘이 아니라 ‘벚꽃 엔딩’이 음원 차트에 진입하는 때를 봄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동시에 이런 현상을 두고 ‘벚꽃 연금’, ‘벚꽃 좀비’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일종의 밈화 현상은 아마도 버스커 버스커의 활동 중단 이후, 솔로 1집 앨범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던 장범준의 행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시, 벚꽃>은 장범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들려준다. 처음 버스킹을 시작했던 캠퍼스를 걸으며 이 노래는 벚나무 아래에서, 저 노래는 전 애인이 살았던 골목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동시에 배경으로 그의 음악을 재생한다. 장범준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장면들일 것이며 그렇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영화 중반 이후에는 버스커 버스커의 장범준이 현재의 장범준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그려진다. 성적이 부진했던 솔로 1집 이후 장범준이 택한 것은 ‘더 많은 고민’이었다. 어떤 가수가 되어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야 할지, 계이름을 모르는 자신이 다른 뮤지션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그는 영화 내내 스스로에게 자격이 있는지를 고민하며 서슴없이 흔들린다.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음악을 찾는다. 자신의 가능성은 채찍질하고 방향성은 신뢰하면서 착실히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실제로 20대 청춘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식과 너무나도 닮아있어 동세대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단지 아쉬운 점은 영화가 장범준의 노력, 음악에의 애정을 솔로 2집의 성공으로 연결시키고 결국엔 희망찬 마무리를 보여주는 것이 크게 놀랍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시간들이 거짓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서사가 으레 그렇듯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진부한 열정 드라마로 비춰질 가능성도 있으며 현재 청년세대가 공유하는 실제적 문제를 희석시킬 여지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벚꽃>은 관객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문제를 모른 체하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봄이라는 계절감과 특유의 감성, 백 그라운드에 깔리는 장범준의 노래가 더해져 탄생한 매력은 영화의 단점을 금세 가려준다. 그러니까, 봄이라는 계절이 이렇게 또 장범준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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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해변에서 혼자한줄 관람평

송희원 | 나답게 살려면 솔직해져야 해

이현재 | 나에게도 당신을 아파할 여유가 있다면 좋으련만, 헿

박영농 | 히치콕과 고다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홍상수

이지윤 | 수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해변으로 밀려드는 무용한 문장들. 한데 모이는 아득한 고독

최지원 | 고독에 닿은 사랑. 홍상수식 고백적 문법의 경지

김은정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 리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태도는 사뭇 달라진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된다. 공포 영화의 공포는 배가 되고 범죄 영화의 잔혹함은 더욱 깊숙이 다가온다. 영화는 더 이상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우리의 흥미를 끄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영화 시작 전에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문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관객은 자연스레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탐색하기 위해 한시도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이것은 두려움에 떠는 공포 영화도, 마음 졸이는 범죄 영화도 아니다. 얼마 전 영화계를 뜨겁게 달군 두 사람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두의 흥미를 끌기는 충분하다. 

이 영화를 논하기에 앞서 김민희라는 배우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둘의 호흡. 먼저 감독이 김민희라는 배우에 대한 이해력과 표현력이 정말 뛰어나다는 점이 느껴진다. 그 배우를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알고 있고 어떤 힘을 뿜어내는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다. 특히 지인들과의 술자리 장면에서 영화 자체가 ‘영희’라는 인물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고 관객은 그 존재감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김민희 배우는 영희라는 인물 그 자체가 되어 매우 호소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그의 연기에 매혹 된 것인지, 영희라는 인물에게 빠진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배우인 영희는 한국에서 유부남 감독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와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외국으로 간다. 이후 영희는 한국에 잠깐 방문해 지인들을 마주한다. 그리곤 말한다. 아무도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세상에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그는 불륜관계로 손가락질 받는 자기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기 위해 저렇게 말한 것이었을까. 사랑이란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자격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고, 단지 자신은 사랑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한탄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던 걸까. 영희의 지인들 또한 그를 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영희와 감독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거냐고. 영화 내에서 영희와 감독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물들은 그들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영희와 감독 자신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유부남 감독과 여배우의 불륜이 아니라 두 사람 간의 사랑이라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사랑이 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지에 대해 묻는다. 끊임없이 관객에게 호소한다. 이 관계는 사랑이 아니냐고. 

영화에서 영희가 해변에 혼자 누워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알고 보니 우연히 만난 감독과의 일은 그의 꿈에 지나지 않았고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약속했던 대로 그를 찾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영희가 꾼 꿈에서 마주하게 되는 감독의 모습, 그리고 지인들과의 대화로 관객은 그가 오지 않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영희가 한국에 와서 지인들에게 사랑에 대한 푸념을 털어 놓고, 해변가에서 감독과의 조우에 관한 꿈을 꾼 이유가 감독이 그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라면. 그는 사실 감독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영희와 감독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유지했을 그 둘의 삶. 어쩌면 그 꿈은 그가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아쉬움의 토로가 아니었을까.



영희는 이 세상에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자칫 피로하고 느슨해 보이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열정적으로 외친다. 우리를 인정해달라. 그러나 설득 당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이었다면, 관객들에게 영희와 감독의 사랑을 호소하려는 목적이었다면,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너무 솔직하고 필사적이기에, 천진한 아이 같은 모습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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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폴로지한줄 관람평

송희원 | 더 늦기 전에 사과를 요구한다

이현재 | 발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동행한다. 앞서나가지 않는 것의 미덕.

박영농 | 위안부 문제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접근법. 박수를 보냅니다.

이지윤 |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영화, 간직해야할 책임.

최지원 |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멈춘 적 없는 목소리

김은정 | 아픔으로 연대하는 우리 모두의 가족의 이야기




 <어폴로지> 리뷰: 더 늦기 전에 사과를 요구한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어폴로지>는 캐나다 국적의 여성 감독 티파니 슝이 6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가 된 길원옥 할머니(한국), 차오 할머니(중국), 아델라 할머니(필리핀)의 현재 모습과 증언을 가까이에서 담는다. 차오 할머니와 아델라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수치스럽다며 가족에게까지 함구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가족에게 용기 내어 고백한다.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 극우 혐한 시위대에게 “수치스러운 한국 할망구들”, “꺼져, 한국 매춘부들” 같은 갖은 모욕을 들으면서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세계 방방곡곡을 다닌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이다. ‘너무 늦기 전에’ 받아내려는 사과(사죄)는 어떤 의미인 걸까?  


‘어폴로지’(apology)는 사과(謝過), 사죄(謝罪)를 의미한다. 사과에는 사과를 받는(또는 요구하는) 주체와 사과를 하는 주체가 있다. 사과를 요구하는 주체는 역사의 증언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고 사과를 해야 할 주체는 당연하게도 일본 정부이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시민들은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공식 사죄, 법적 배상”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일본이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버티며 오히려 할머니들을 모욕하는 것을 보면 사과해야 할 사람과 받아야 할 사람의 입장이 뒤바뀐 듯한 착각마저 든다.  



영화에서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기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2011년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 1,000차 수요시위(1992년부터 시작된 시민단체와 시민들과 피해 할머니들이 함께하는 정기 시위)에서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역사적인 진실을 밝히길 촉구한다. 2013년에는 “전시에 성노예가 필요하다”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규탄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다. 2014년에는 스위스 유엔인권이사회 공식 석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증언하며 천오백만 명의 서명을 전달한다. ‘위안부’ 피해자의 범위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여러 국가 및 네덜란드 여성들에게까지 이른다. 이 문제가 비단 한일양국으로 축소될 사안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것이 길원옥 할머니가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세계 시민을 대상으로 역사의 증언을 반복하고 전 세계의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일본의 법적 배상은 마무리가 아니라 출발일 뿐이고 공식적인 사과를 통해 앞으로 미래의 후손들에게는 이런 가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눈물을 흘린다. 


김욱 교수는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서 정치적 사과는 개인적 사과와 다르며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이며, 끊임없이 진화·진보하는 현재의 투쟁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정치적 사과는 진정성 없는 사과라 할지라도 일단 역사적 전투에서 승리한 승자의 전리품이며 미래의 역사를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사과는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차원에서, 자발성보다는 강요에 의해서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 정부는 일본에게 ‘정치적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 정치적 사과가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차원에서 얻어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폴로지>에서 한국 정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2013년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규탄하기 위해 일본 공항으로 떠나는 길원옥 할머니를 따라간다. 한 언론사는 그를 인터뷰하며 온 국민이 기대하고 있다고 그에게 각오 한마디를 요청한다. 공항에서는 수많은 취재진이 할머니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할머니는 휠체어를 탄 채 탑승구 앞에 홀로 있다. 취재진과 한국 정부의 마중은 딱 거기까지이다. 가상의 포토라인이 처져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곳에 서서 할머니를 떠나보낸다. 과거에 그들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을 때처럼 말이다. 정부(국가)가 아닌 할머니(개인)가 자력으로 사과를 받으러 떠난다. 길원옥 할머니는 말한다. “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라고. 영화 속 그녀의 작은 뒷모습, 작은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되었다. 그 이후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이 계속 이어져 왔다. 그들의 증언이 가능했던 것은 그 말을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증언에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관심을 가졌기에 공식적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다. 차오 할머니, 아델라 할머니는 오랫동안 사랑하는 가족에게조차 증언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홀로 아픔을 묻어놓았다. 그들이 증언하지 못한 이유는 사람들이 무관심했고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 귀를 닫아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파니 슝 감독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와 시민들, 양심 있는 학자들이 그들의 증언에 귀 기울였다.  


역사에 대한 이해와 진실 해명은 그것을 추구고자 하는 이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가능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빛을 보기 위해서는 상처를 공유하고, 그 아픔을 치유해 주기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서울독립영화제, 『21세기의 독립영화』, p.114) 


<어폴로지>는 시종일관 성치 않은 몸으로 많은 국가를 방문하며 피해 사실을 알리고 증언하는 길원옥 할머니와 그 곁의 사람들을 비춘다. 먼 곳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며 지지와 연대의 힘을 보내는 차오 할머니와 아델라 할머니, 그리고 영화에서 항상 그의 곁을 지키는 정대협 윤미향 대표와 수요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할머니들의 지속적인 활동은 연대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뒤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티파니 슝 감독은 할머니에게 자신을 카메라로 찍어 달라고 한다. 이 장면처럼 <어폴로지>는 끝났지만 이제 카메라는 우리의 모습을 찍게 될 것이다.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할머니들이 길거리에 서지 않아도 우리의 목소리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게 촉구하는 모습을 말이다. 그들이 고통스러운 상처의 기억에서 조금이라도 놓여날 수 있게,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어폴로지> 포스터에 클로즈업된 소녀상의 두 주먹처럼 이제 우리의 두 주먹을 불끈 쥐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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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한줄 관람평

송희원 | 예술, 예술가 '진짜'로 거듭나기

이현재 | 고유성이라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

박영농 | 블랙코미디 - (스릴러) - 멜로드라마

이지윤 | 허상과 본질 사이에서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최지원 | 더 이상 내가 아니게 설계된 예술 속 '나'와 그 속에서 버텨내는 진짜 '나'의 블랙코미디

김은정 | 고상한 예술가인 척 하기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리뷰: 고유성이라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재 님의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젤’(류현경 분)의 첫 모습은 당황스럽다. 덴마크에서 귀국했다는 그는 행인에게 담배를 빌리며 들고 있는 아메리카노에 대해 비판한다. 아메리카노의 기원을 알고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에스프레소를 마셔보라고 권유한다. 행인은 본인의 담배를 다 피우자마자 그 자리를 떠난다.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탄 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택시기사의 수다와 음악취향에 ‘다른 걸로 틀어주실 수 있냐’고 불만을 보이던 그는 본인이 입을 열 기회가 주어지자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낸다. 오늘날의 미술계는 예술가가 멸종하고 사기꾼들만 넘쳐나는 오염된 곳이라 이를 정화할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택시 또한 그가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떠난다. 그렇게 도착한 집 앞에서 그가 처음 마주하는 것은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 받은 미술대회 장려상 상장이다. 이후 어머니와 친구를 만난다. 이 만남들에서 그가 확인하는 것은 그의 능력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젤의 첫 모습은 곤궁한 자신의 상황을 환상으로 합리화하려는 유아적인 에고이스트로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입사하려던 회사로부터 거부의 제스처를 확인한 그는 (비록 환상 속이기는 하지만) 그 제스처에 답한다. “저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전생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아티스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첫 대답이다. 그의 대답은 ‘나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한 가지 주장을 은연중에 형성하고 있다. 그는 앞서 본인이 제시한 주장을 몸소 증명해보이겠다는 듯, 미술계 인사들이 모인 회식자리에서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 ‘박중식’(이순재 분)에게 귓속말로 “선생님 그림 되게 과대평가 받은 거 아세요? 쪽팔린 줄 아세요.”라고 면박을 준다. 그러자 박중식은 “그런가?”라고 답한다. 이 대답은 그의 말을 반박하진 않지만, 참/거짓의 문제를 그에게 되돌림으로서 주장을 닫아버리는 기능을 한다. 결국 참/거짓의 문제는 그 안에 머무르고 발화되지 않는다.


그의 진술은 왜 그 안에만 머무르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필자는 그가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재범’(박정민 분)이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작품으로 인해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작가인 지젤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그의 작품들을 자신의 갤러리로 가져온다. 재범은 그를 미술계 인사들의 공적인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박중식 앞에서 그를 “그림은 좋은데, 작가가 좀 그래요.”라고 평가한다. 이에 박중식은 “작가가 중요한가? 그림만 좋으면 됐지.”라고 답한다. 그리고 곧바로 그림을 산다. 이는 박중식이 지젤의 그림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재범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후배 양성”이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가르침이 타자의 변화를 일으키는 목적을 가진 행위라 생각하고 박중식의 대답에 접근해보자.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에게 필요한 변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양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가?



유일무이한 존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은 누구와도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누구도 이해할 의지가 없는 상태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유일무이한 존재는 누구와도 같이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발화는 혼잣말이 된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발휘되어야 할 그녀의 재능이 기능 부전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그녀의 말이 그녀 안에 머무는 이유이다. 박중식이 지젤의 그림을 산 정확한 이유는 재범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재범은 박중식에게 지젤의 그림을 소개하며 ‘갤러리 비지팅도 끝난 상태’라고 말한다. 박중식에게 지젤은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한 작가인 것이다. 박중식이 지젤에게 원했던 것은 본인의 고유성을 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후배 양성’으로, ‘돈’울 주고 그림을 산 것이다. 박중식은 극중 지젤을 가장 정확히 이해한 인물이다. 그리고 돈은 그들의 언어이다.


그 이후는 지젤이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를 견딜 수 없던 재범과 ‘제임스 곽’(문종원 분)는 ‘오인숙’을 죽이려는 시도를 반복한다. 표면적으로 작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시도로 그려지나 그들의 대화나 태도에서 경제적인 가치창출을 바라는 것 이상의 잉여가 보인다. 특히 이는 재범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가 지젤을 발굴한 첫 인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어릴 적, 진품인 줄 알았던 물건을 가품이라고 판단하는 감정사가 멋있게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제임스에게 하는 것과 같이 그의 욕망은 작품에 진릿값을 붙여서 고유성을 창출하는 데 있다. 그가 오인숙을 살해하려 한 이유는 그의 고유성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임스 곽은 극적으로 지젤이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또한 벌어진 사태를 어찌할 바 몰라 지젤의 그림을 기증하는 결말에 이른다.



모두에게 욕망의 대상이었던 고유성. 지젤의 그림은 결국 공적인 장소인 길거리로 나온다. 이 때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인지 판별할 수 없다. 길거리 위 지젤의 그림은 사람들로부터 전과 같은 고유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외부의 자리에 어색하게 놓이고 고정된 자리 없이 떠도는 존재가 된다. 지젤의 그림은 어쩌면 영화라는 대중매체가 지닌 고유성에 대한 자기 파괴적이고 모호한 욕망에 대한 우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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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화중이야한줄 관람평

송희원 | 사랑하기에 간직하고픈, 평범한 순간들의 REC

이현재 |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홈 무비 사이에서 나는 파열음

박영농 |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윤리

이지윤 | 삶이 정지되었음에도 재생되는 수많은 순간들

최지원 |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머무름'을 이야기하다

김은정 | 끝을 향해가는 보편적인 사랑이야기



 <녹화중이야> 리뷰: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윤리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영농 님의 글입니다.


영화 <녹화중이야>는 말기 암 환자 ‘연희’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페이크 다큐멘터리형식으로 담았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등장인물들이 직접 촬영한 것으로 설정되어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이라면 아마 첫 장면에서 실제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고인(故人)의 영상을 취합하여 만든 것이며 그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내용의 추모사를 던지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극영화와는 다르게 초점이나 구도가 맞지 않도록 연출된 장면은 흡사 홈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실제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엔 너무 짜임새 있는 플롯 탓에 진짜라고 착각하던 관객들은 이내 페이크 다큐멘터리임을 알아채고 말았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흔히 봐온 신파-멜로드라마의 장르적 문법을 차례로 밟고 있음을 직감하는 순간, 관객의 자세는 흐트러졌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지점에서 <녹화중이야>가 품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영화는 고등학생 시절 암 선고를 받고 몇 년 째 투병 중인 인물을 중심으로 하며, 도중에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접근한 것은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방식은 이야기의 사실감을 극대화했으며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데에 성공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이미 성취한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갔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앞서 언급한 첫 장면의 추모사에 대한 윤리적 문제이다. 다큐멘터리적 연출을 완성하기 위해 고인에 대한 추모사를 영화의 첫 머리에 꼭 삽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영화에서 탄생시킨 캐릭터를 영화 안에서 떠나 보내며 그 정도의 애도는 충분히 수사적으로 가능한 표현이지 않겠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지적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화두를 던지는 이유는 어쨌든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렸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이하 <뚜르>)을 떠올려보자. 이 영화도 <녹화중이야>와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말기 암 환자가 되어 투병 생활을 이어가는 인물을 다룬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뚜르>는 실제 인물 故 이윤혁 씨의 삶을 좇았다는 것이다. 이 두 영화의 첫 장면을 같이 놓고 비교한다면 <녹화중이야>의 그것은 결코 ‘수사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게 된다. 연희에 대한 추모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특수성 안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녹화중이야>가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한 것은 결국 관객들이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 이야기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효과를 거두기 위함이다. 초점이나 구도가 맞지 않는 장면들처럼 첫 장면의 허구적 추모사 역시 그런 목적을 기저에 둔 장치에 해당한다. 즉 실제 이야기처럼 보이기 위한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그로 인해 관객은 영화 속 캐릭터와 상황에 더욱 몰입하게 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추모행위를 소비시킴으로써 본질 그 자체의 의미는 사라지게 만든다. 실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미 고인이 된 출연자를 추모하기 위해 첫 머리에 띄우는 자막은 영화 내부에 어떠한 효과를 기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차용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 속 그것의 고유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이며 윤리성을 따져보아야 하는 지점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르.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기까지 다양한 시도와 노력은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지 고민지점에 대해 얘기하고 (상호)보완해간다면 낯선 영화, 새로운 영화들이 보다 풍성하게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격려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 연장선에 이 글의 목적이 있다. ‘좋다/나쁘다’, ‘재미있다/재미없다’의 구분을 떠나 모든 영화는 우리에게 이미 어떤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대답하는 것은 영화를 보는 큰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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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발한줄 관람평

송희원 | 성 밖에서 소년, 소녀 덫에 걸리다

이현재 | 정갈한 클리셰와 기시감들

박영농 | 땅과 하늘은 닿아있지 않다

이지윤 | 무너져 버린 돌담 한 귀퉁이에 흩날리는 눈발

최지원 | 단단한 성벽과 구덩이 안, 눈이 내리듯 따스한 빛도 닿을 수 있기를

김은정 | 비겁하게 도망쳤던, 과거 그리고 현재의 나



 <눈발> 리뷰: 눈이 오지 않는 마을에 눈발이 흩날리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마을이 있다. 하얀 눈의 흔적이 없는 탓에 햇살이 가득한 마을의 풍경은 어느 봄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성’(固城)이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마을에 불길한 기운을 막아주는 견고한 성벽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바람과 햇살만이 감도는 마을에는 고요한 평화가 존재한다. 어느 날, 겨울이 봄처럼 느껴지는 평화롭고도 낯선 마을에 한 소년이 온다.



소년은 이방인이다. 마을에 적응하려 노력하지만, 모든 것이 녹록치가 않다. 평화로운 분위기와 상반된 날 선 일상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소년의 눈에 한 소녀가 들어온다. 소녀에겐 살인자의 딸이라는 낙인이 있다. 충분치 않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버지는 살인자로 몰렸다. 그 무엇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소녀는 살인자의 딸이라는 낙인과 함께 마을 사람들의 비난과 동급생들의 가혹한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상처투성이의 소녀에게 소년은 손을 내민다. 머뭇거리던 소녀는 이내 소년이 내민 손을 맞잡는다. 견고한 마을 안에서 상처 받은 그들은 교감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차가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길을 잃고 구덩이에 빠진, 자신들의 처지와 꼭 닮은 작은 염소를 보살피기도 하고 마을 외곽을 둘러 싼 높은 돌담을 따라 걸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과 소녀는 무너져 내린 돌담의 한 귀퉁이를 발견한다.


그들이 발견한 허물어진 돌담의 한 귀퉁이는 완성형이라 믿고 있던 공동체의 허점을 연상시킨다. <눈발>의 마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약자에 대한 날 선 어조와 배타적인 분위기, 폭력을 용인한다. 지속되는 약자에 대한 가해는 ‘불길한 기운을 막아준다’는 성벽 그 자체로 둔갑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상처와 자기혐오, 눈물과 트라우마는 자연스럽게 묵인된다. 공동체의 구성원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그의 잔재를 짓밟고 올라 평화를 가장하는 모습은 위선적이고 아이러닉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비단 작품 속 세상만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작품은 이런 공동체의 위선과 아이러니를 한 시간 반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고스란히 드러낸다.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외치면서 소녀를 외면하는 교회의 모습은 작품 속에서 틈틈이 등장하며 사회의 위선을 꼬집는다. 소년이 건강을 위해 꼬박꼬박 챙겨먹던 보약은 그가 애정을 담아 보살피던 염소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살인자로 통하는 남자의 딸은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희생시키며 삶을 영위하는 아이러니, 가해자와 피해자의 얄팍한 경계와 뒤바뀜에 대한 아이러니는 영화에서 주되게 다뤄지며 관객들에게 어떤 기시감을 안긴다.



작품 밖의 사회까지 흐르는 아이러니와 위선은 결말부에서 인간 본연의 나약함과 결부되며 비극적인 여운을 남긴다. 카메라는 소녀를 등지고 견고해 보이는 성벽 안으로 숨어버린 소년을 비춘다. 그리고 그 위로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 12장의 한 부분이 고요하게 흘러간다.

성 안의 천장 꼭대기는 하늘에 닿은 듯이 까마득한데 허엽스럼한 연기 같고 안개 같은 것이 잔뜩 서려 있다. 자세히 보니 아래서부터 까마득한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칸칸이 모두 벌집처럼 뚫린 방인데 다스리는 소리와, 다그치는 소리에, 대답하는 소리, 때리는 소리에, 비명 지르고 흐느끼는 소리들이 온갖 야수가 모여 울부짖는 깊은 밀림에 들어선 것 같다. 나는 가슴이 미어져서 쓰러질 것만 같다. 이번에는 까막까치의 도움말 없이 품안에 손을 넣어 넋살이 꽃을 꺼낸다. 그리고는 허공중을 향하여 힘껏 던진다. 꽃송이가 위로 오르더니 바람을 타고 천천히 맴돈다. 꽃이 펑하고 가볍게 터지면서 수만 개의 꽃잎이 흩어져 눈송이처럼 흩날리다가 밝고 흰 빛으로 변한다. 나는 저절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노래한다.



마지막 신에서 휘날리는 눈발은 분노와 저항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비극적인 현실에 지쳐버린 많은 이들을 위로한다. 눈발은 꽃잎이 흩어지는 것처럼 바람을 타고 맴돌다 무너져버린 돌담의 한 귀퉁이를 포근하게 덮는다. 어디론가 떠나버린 소녀의 마음속에서도 눈발이 흩날리다 밝고 흰 빛으로 변한다. 온갖 죄책감이 울부짖는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는 표정으로 쓰러진 소년 위로도 눈발이 흩날린다. 눈이 내리지 않던 마을에 그렇게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은 쌓이고 쌓여 모두를 위로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로는 마법 같은 변화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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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길한줄 관람평

송희원 | 일본군 ‘위안부’, 잊지 않아야 할 '우리'의 과거와 현재

이현재 | 모두가 알고 있는 고통을 굳이 전시하지 않는다. 필터링의 좋은 예.

박영농 |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소녀상마저 보전할 수 없는 우리

이지윤 | 과거에 맺혀 현재까지 흐르는 눈길, 그리고 죄책감

최지원 | 위태롭지만 단단하게

김은정 | 치유하기 위해 마주해야 할 커다란 아픔



 <눈길> 리뷰: 위태롭지만 단단하게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소녀들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얼음 위를 걷고 있다. 한 소녀는 죽기 위해, 한 소녀는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상처가 가득한 소녀들의 모습과 배경이 되는 설산은 더없이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연상케 한다. 아슬아슬 눈길 위를 걷고 있는 이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에 대한 이야기, 영화 <눈길>이다.  



‘위안부’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분명 여타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부담감을 가진다. 지금까지 사회적 이슈로 남아있는 문제인데다 전쟁 성범죄라는 소재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눈길>은 같은 일제 강점기를 다룬 영화일지라도 <암살>(2015)과는 다른 종류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눈길>은 <귀향>(2015)과도 다른 길을 택했다. ‘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 막연한 분노와 슬픔으로 결론짓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 눈에 보이는 영화이다. 이나정 감독은 “끔찍한 폭력의 순간을 '영화적 스펙터클'로 이용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 폭력으로 아픔을 겪은 분들이 계시고, 그것이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생각은 영화 내에서 섬세한 연출로 구현되었다. 생존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희석시키지 않으면서 수용소에서의 생활적 면모와 그들이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게 했던 연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눈길>은 노골적인 피해 장면은 축소시킨 반면 수용소에서의 삶, 예를 들면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간식을 나눠먹는 장면들과 같이 구체적인 생활의 현장을 보여준다. 또한 수용소 벽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고 어둠 속 등불에 의지해 같이 책을 읽으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모습에서 우정과 연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애틋하고 눈물겹지만 과도하게 슬픔을 끌어내지 않는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평면적으로 소비해왔던 기존의 미디어 방식과는 분명 다르다. 수용소에서도 삶이 있었고 생존자들은 서로 연대를 통해 위로받으며 버텨왔다는 사실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이해의 방식을 권유하는 것이다. 과거 시점과 현재 시점을 교차시켜 보여주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할머니가 된 ‘종분’은 계속해서 ‘영애’의 환영을 보면서도 나름의 생계를 책임지고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의 삶 또한 보통의 삶처럼 지속되고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소녀였던 종분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위안부’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분이 영원히 소녀로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 사건을 과거의 일로 치부, 생존자들을 어리고 여린 소녀로서 소비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시점의 종분과 ‘은수’가 보여주는 연대도 주목할 만하다. 종분이 은수를 보호하는 방식은 결코 연민이 아니다. 경찰서에서 종분이 은수를 감싸는 장면에서 두 인물 모두 권력을 가진 남성에 의한 폭력의 피해자라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종분과 은수의 연대는 영애와 종분의 그것과 연결된다. 수용소에서 서로를 견딜 수 있게 한 것이 서로였듯, 노인이 된 종분은 다시 한 소녀를 견디고 살아갈 수 있게 돕는다. 이들은 고통스럽고 위태로울지라도 연약하지 않다. 연대로 서로를 치유한다. 서로를 구원하는 연대를 이룬 이들을 우리는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가. 이들이 걸어야 했던 ‘눈길’과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에 대해서 재고할 수 있는 영화, <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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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한줄 관람평

송희원 | 꿈을 이루고 있는 순간에도 꿈을 꾸는

이현재 | 공동체로서 영화 만들기와 순진함(idiocy)으로 만든 정직함. 죽음과 재난 앞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기

박영농 | "좋아도 가고, 안 좋아도 갈 겁니다." 뚜르, 애니웨이

이지윤 | 절망을 품어낸 희망, 희망이 빚어낸 아름다운 49일의 여정

최지원 | 윤혁의 마지막 열정에 바치는 뜨겁고 예의 있는 전기영화

김은정 | 연민이 아닌 죽음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리뷰: 연민이 아닌 죽음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윤혁’은 말했다. 자신이 이렇게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런 꿈을 꾸지 않았을 것이라고. 죽음이라는 것은 개인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일까. 우리 모두 삶의 끝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 지키는 비밀도 아니고 누군가가 알아서는 안될 금기도 전혀 아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면서 일상의 문제들에 치여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밀려나고 마치 오늘이, 우리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죽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일상의 문제로 놓이지 않는 한 좀처럼 그것을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끝이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만들기를,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내도록 독려한다. 윤혁의 경우에는 이 일이 프로 선수도 두려워하는 ‘뚜르 드 프랑스’ 완주였다. 모든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49일간의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런 결심을 함에 있어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칫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시한부 환자’로서의 ‘이윤혁’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이룩하려 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이윤혁’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에 흔하게 등장하는 내레이션을 생략하고 흐름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몇 가지 정보들만 자막으로 간결하게 제공함으로써 외부의 목소리를 최대한 배제하고 관객이 윤혁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동류의 많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환자의 비극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환자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성취는 뒤로 미루어두고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바쁘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전개방식이 환자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한다. 윤혁이 자신이 암환자라는 사실보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성취에 집중해서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전을 강행했듯이 이 영화는 억지 감동을 뒤로 미루어 두고 그의 여정에 집중하면서 관객이 윤혁의 입장에서 영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성공적인 구성은 영화를 보는 내내 ‘암환자’라는 자극적인 소재보다 한 젊은이가 꿈을 향해가며 겪는 갈등과 고난의 과정, 즉 윤혁의 시선에 집중하게 한다. 



이렇듯 영화는 비극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며 더욱 사실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했다. 현실에서 누군가가 불행을 마주한다면 우리는 그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할 수는 있지만, 항상 그 불행을 마주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불행을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두고 웃고 떠들고 대화하다 어느 순간 불현듯 다시 불행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갑작스레 다가오는 불행의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윤혁은 세 번 눈물을 보인다. 레이스 중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서, 레이스를 완주하고 나서, 레이스가 끝나고 아픈 자신을 병문안 온 지인을 끌어안고서. 이 지점들에서는 눈물을 참기 힘들다. 그렇지만 그에게 연민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 무례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윤혁의 입장으로 영화를 따라가고 나면 그의 죽음에 대해 대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그도 그렇지 않았을까.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마지막을 어떻게 떠나 보내야 할지. 영화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윤혁을 통해 윤혁을 보게 하고, 관객들에게 죽음을 향한 통상적인 시선의 변화를 화제로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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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영한줄 관람평

이다영 |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다

상효정 | 먹먹한 여운 속에서 남는 ‘희수’의 질문과 ‘문영’의 답변

이형주 | 침묵 속에 빛나는 표정, 눈빛, 몸짓

최미선 | 상처를 동여매고 카메라 밖으로

홍수지 |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소리 없는 하모니

전세리 | 여성의 연대를 그린 또 하나의 수작



 <문영> 리뷰: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다영 님의 글입니다.


‘문영’(김태리 분)은 결핍이 많은 캐릭터다. 엄마는 어릴 적 집을 나갔고 폭력적이고 알코올 중독인 아빠는 없느니만 못하다. 반복되는 불행하고 무료한 현실 가운데 카메라를 통해 뭔가를 찍고 만드는 과정은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막연한 무언가를 찾고 소망하게 한다. 그러던 중 문영은 남자친구와 다투는 ‘희수’(정현 분)를 몰래 찍다가 들키게 되고 그렇게 둘의 기묘한 관계는 시작된다.  



만남과 관계는 항상 어려운 법이다. 중요한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도 어렵지만, 그 만남이 만남이라는 한 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라는 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눈이라는 카메라로 일상에서 마주하는 얼굴들을 담는다. 마치 문영이 지하철에서, 등하굣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담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희수는 문영을 발견하고 그 뒤를 좇는다. 시작이 좋았다가도 씁쓸한 마지막을 남기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시작이 너무나 강렬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인연 또한 있다. 문영과 희수의 만남은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누군가의 삶과 마음에 깊이 침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극히 깊고 폭력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랑의 과정이 아닐까. 가장 보여지고 싶지 않은, 또 스스로도 보고 싶지 않았을 희수의 나약하고 찌질한 모습부터 희수의 자잘한 일상 속의 모습, 솔직하고 유쾌한 마음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는 문영과 상처로 인해 말을 잃어버린 문영에게 그녀가 어떻든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해대는 희수와 술에 취해 문영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퍼붓지만, 그런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을지 모르는 문영의 아버지와 또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결국은 병실에서 조용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문영. 서로의 관계와 그 행동 속에서 이들은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모두가 사랑을 갈구하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아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 받기 원하는 이 세상에서 결국 그 사랑이라는 감정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결핍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닐까. 마치 문영이 형체 없는 ‘엄마’라는 사람을 끊임없이 찾지만, 결국은 엄마 한 사람을 찾는 일보다 그 과정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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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길이 있다한줄 관람평

이다영 | 공허함의 소리

상효정 | 어쩌면 붙잡을 누군가가, 붙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이형주 | 빙판 위 위태롭게 내민 손과 위로

홍수지 | 낭만적 죽음과 구원

전세리 | 시나리오의 몇몇 부분은 다른 길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다



 <다른 길이 있다> 리뷰: 공허함의 소리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다영 님의 글입니다.


자살 사이트를 통해 동반자살을 계획하는 ‘흰새’ 정원(서예지 분)과 ‘검은새’ 수완(김재욱 분). 장소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고, 방법은 잔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원의 원대로 둘은 어느 겨울날 춘천에서 만나 함께 자살하기로 결정한다. 아버지를 도와 행사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픈 어머니를 수발하는 정원, 어릴 적 어머니의 자살하는 모습을 본 이후로 그 아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완.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이 둘의 모습에는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다른 길이 있다>에서 살아있는 자들은 말이 없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말과 눈물을 꾸역꾸역 욱여넣고 ‘공(空)’의 상태로 유령처럼 이곳 저곳을 떠다닐 뿐이다. 살아있지 않지만 끊임없이 날갯짓하는 검은 비닐봉지에서, 꽁꽁 언 멈춤의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소리를 내며 숨을 쉬는 한겨울의 강에서, 온전히 살아있지 못한 자들은 그 생의 흔적들을 찾아 헤맨다. 끊임없이 죽음을 갈구하면서도 사물들에게는 끊임없이 생명력을 부여하는 수완의 모습에서 마지막 그의 결정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결국은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초점없는 이들의 시선 끝에는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다. 동반자살을 위해 만나기로 한 춘천에서 조금 일찍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표면적이면서도 깊은 조우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어떠한 계기로 비로소 서로를 알아볼 때, 이들은 그 때까지 담담히 눌러왔던 감정을 내비친다. 무거운 소재로 시작되는 <다른 길이 있다>의 전반적인 느낌은 소재와는 반대로 오히려 ‘공’의 느낌이 강하다. 정원과 수완의 텅 빈 시선과 절제된 감정선, 추운 겨울의 풍경은 무언가로 가득 채우기보다 오히려 공허와 허무함, 쓸쓸함으로 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비워지고 사라진 공허의 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비록 아무것도 아닌 빈 비닐봉지일지라도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를, 그 얼음이 깨어지길 원하면서도 이내 두려움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를 망설이는 것과 같은 삶의 모순을 누구든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 공허함의 한 켠에 작은 새가 날아드는 영화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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