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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단평] 〈돌핀〉: 남겨진 것과 남겨둔 것

by indiespace_가람 2024. 4. 2.

*'인디즈 단평'은 개봉작을 다른 영화와 함께 엮어 생각하는 코너로, 

독립영화 큐레이션 레터 '인디즈 큐'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남겨진 것과 남겨둔 것

〈돌핀〉 〈가리베가스〉 

 

*관객기자단 [인디즈] 조영은 님의 글입니다.

 

 

나영은 충남 소도시 서천에서 지역 소식지를 만드는 일을 한다. 그에게 집은 평생이 담긴 공간으로, 낡은 수납장에 페인트칠을 하고 새로 커튼도 달아 집을 지키려고 하지만, 더 이상 모두의 쉼터 같은 집이 될 수 없다. 떠나려는 사람과 머무르려는 사람, 하나둘씩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소수의 남은 사람들의 시간도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다. 변화하는 주변 관계 속에서 나영이 짊어진 무게를 기댈만한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의 사람들과 이야기는 보여지는 장면 밖에서 상상되기보단, 눈앞에 그려지는 세계 속에서 홀로 모든 짐을 떠안듯 가라앉는다. 〈돌핀〉은 집이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와 터전이 되는 지역이 사라지는 것, 지방소멸이라는 화두 속에서 가만히 견뎌낸다.

 

 

영화 〈돌핀〉 스틸컷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남는 지점은 나영과 미숙의 관계였다. 취재차 볼링장에 방문한 나영은 처음으로 공을 손에 잡아본다. 사람들은 볼링장 사장 미숙에 관해 쉽게 떠들고, 그런 냉대와 비웃음은 아무도 동네의 외진 볼링장을 찾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외면되는 공간에서 두 사람이 공유하는 시간은 쇠퇴하는 마을 공동체 속에서 남기로 선택한 자들이 가진 마음 나누기의 여정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잊힘과 사라짐, 남아있는 자들을 향한 시선에서 〈가리베가스〉의 풍경을 이곳에 남겨두고 싶었다. 〈가리베가스〉의 카메라는 인물과 함께 움직인다. 터전에 새겨지는 빛의 감각은 새벽의 뿌연 연기로 빼곡했던 하늘 아래의 삶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리봉동에 자리 잡았던 구로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면서 공단 노동자의 삶은 사라졌다. 노동으로 일궈진 터전은 높게 솟은 크레인이 막아서고, 영화에는 그들의 일상을 책임졌던 가리봉동의 모습이 지나간다. 가려진 전철역, 새로 쌓아 올린 고층 빌딩, 연변 거리와 주변 상가의 중국어 상호들, 벌집이라 부르는 좁은 골방에 들어서는 외국인 노동자들, 가리봉 벌집촌에는 더 이상 기계와 재봉틀 소리가 아니라 공사장, 오토바이의 소음, 키보드가 타닥이는 소리로 채워진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밀려나고 이주노동자들로 교체되던 시기였다. 노조 탄압 공장이라는 문구와 공단 노동자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가는 컷들에서 변화하는 오늘의 풍경과 내일의 풍경은 함께 머무를 수 없음을 안다.

 

 

영화 〈가리베가스〉 스틸컷

 

 

주인공 선화는 회사 이전으로 멀리 떠나게 된다. 그의 옛 동료이자 이웃인 향미는 선화와의 이별이 섭섭하다. 이삿짐을 정리하는 하루의 시간에 영화가 찍는 내밀한 풍경은 선화를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소외된 나와 당신이 바라보는 무수한 풍경이다. 동시에 같은 풍경을 상실한다. 동료를 떠올리며 “잘 살겠지”라는 선화의 말과, “근데 여기 사람들 다 어디로 갔나 몰라”라는 트럭 기사의 말은 다르지 않다. 선화가 먼 풍경을 바라볼 때 거대한 크레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그 안에 담긴 것을 찍는다. 주인 없는 집의 내부를 훑는 시선과 의자에 올려둔 쓰레기봉투를 바라보는 시선, 수년간 붙어있던 장롱을 들어내니 밑에 박혀있던 것, 하나씩 해체되는 부품들, 장롱의 부서진 자국 같은 것들일 테다.

 

가리봉동을 벗어나는 시간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쪽방에 새로 살게 될 이주 노동자들에게 남기는 선화의 편지다. 창문에 달린 블라인드, 하수구에 둔 테니스공, 여름에 덥고 습하지만 가리봉에서 해가 제일 잘 드는 옥상. 그 “외딴방”을 떠나는 선화가 남겨둔 것이다. 남겨둔 것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다. 부디 꿈을 꼭 이루고 가라는 말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하는 선화의 당부다. 문질러 닦은 방바닥에 앉아 눌러쓴 마지막 문장에 시대의 애환이 함축된 것만 같다. 카메라는 트럭 뒤 칸에 가득 얹어진 이삿짐을 가리킨다. 가리봉을 떠나는 선화의 얼굴이 나온다. 영화가 끝나도 이곳에 가득 찬 소음들이 이어진다. 이 소리가 밀어낸 시대의 목소리들이 어디로 사라졌을지 알지 못한다.

 

 

영화 〈가리베가스〉 스틸컷

 

 

아랫집 아주머니는 선화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떠나는 연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용달차를 타고 떠나는 선화를 바라보는 이웃과 배웅하며 손에 꼬박 먹을 것을 쥐여주는 향미, 여기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선화의 시점 쇼트가 주어진다. 떠나는 순간에 선화의 시선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뜻하지 않은 이별은 하루하루 변해가는 풍경과 동시에 역사적 맥락의 슬픔을 떠올리게 만든다. 선화는 들어낸 장롱 밑에서 빛바랜 사진을 봤고, 케케묵은 먼지를 털어냈고, 방바닥에 앉아서 향미와 그 사진을 봤다. 선화와 향미, 동료와 함께 찍은 모습이 담겨있다. 사진 속 여성 노동자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그들이 연대했던 가리베가스의 꿈들, 영화를 만든 김선민 감독을 비롯하여 역사 속의 선화들이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작품 보러 가기: 〈가리베가스〉 김선민 감독 ('스트리밍 신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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