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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지옥만세〉리뷰: 그을 수 있는 건 없어

by indiespace_가람 2023. 9. 4.

 

〈지옥만세〉 리뷰: 그을 수 있는 건 없어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이빈 님의 글입니다.

 

 

직사각형의 골목. 관처럼 생겼다.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을 따라 골목을 통과하면 교복 차림의 선우가 주저앉아 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원한 적 없는 케이크와 원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선우를 낳았다. 꺼내진 아이는 반사적으로 울지 않는다. 어서 울어 보자고 보채는 조산사도 없이 덜렁 혼자 남겨진 선우는 몰래 죽는 생각을 한다.

 

폭죽과 포격 소리를 구분할 수 없는 삶이다. 죽는 데 실패해 씩씩거리던 나미는 펑을 쾅으로 듣고 몸을 작게 말았다. 불안정한 지평이라면 죽으려 한 것은 유난이 아니다. 폭죽 퍼레이드가 한창일 때 선우는 나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성공했어?’ 그러면 나미는 토독토독. ‘ㅅㅍ.’ 죽기 위한 작당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다음 장소는 폐허가 된 대중목욕탕이다. 너 가면 나도 갈게. 선우는 목 매달고 있는 나미에게 친구 따라 학원 등록이라도 하듯 그런 말을 한다. 학원 등록과 다른 점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같이 끝내고 싶은 것.

 

 

영화 〈지옥만세〉 스틸컷

 

 

자살 충동은 채린이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점부터 나중 문제가 된다. 나미는 죽어도 채린에게 생채기 하나 남겨야 죽을 수 있게 됐다. 그럼 이제 나미와 선우는 버스 타고 서울에 가서 가해자 채린에게 복수하고 원래 계획대로 죽으면 된다. 죽으면 되는데,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는 쌍방이라고 했던가. 커터칼로 채린의 얼굴을 그어 버리려고 했던 나미는 미안하다 말하고, 너 당 떨어졌지? 하며 젤리를 건넨다. 나미는 채린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가할 수 없게 됐다. 새로 꾸린 사회는 비록 사이비 종교였지만 낙원에 가겠다며 봉사하고 있는 채린의 모습이 이전과 달라 보이기까지 한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계획이 조용히 저무는 동안에 쌓이는 것은 불신. 사실 선우는 나미를 배반한 과거가, 나미는 선우를 방관한 과거가 있다. 홀로 괴롭힘 당하도록 두었고 그래서 해쳤다. 믿음의 축적이 곧 행복이라 믿는 사이비 건물의 옥상에서 선우는 자신의 배신을 고백하지만 나미는 떨어지려는 선우를 붙잡고 싶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배신감은 잠깐일 뿐 믿음 같은 건 솔직히 안 중요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미가 꼼질꼼질 몸을 움직여 선우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일어서는 순간은 사이비 종교가 내세우는 진리를 뒤엎어 버린다. 믿음 없는 연결이라는 폭죽이 머리 위로 펑 터졌다.

 

 

영화 〈지옥만세〉 스틸컷

 

 

너랑 있는데 즐겁더라. 나는 너 하자는 대로 할게. 선우를 따르겠다는 말은 이제 나미가 한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지하의 대중목욕탕이 아니라 거짓된 믿음으로 꽉 찬 강당에서 말한다. 발언은 썩 당당하지도 않고 들은 이도 영 감동받은 표정은 아니다. 서로 우물쭈물한다. 나미와 선우 사이에는 극적인 성장도, 끈끈한 믿음도 없지만 즐거운 시간을 함께 지나왔다는 사실이 있다. 핫도그 먹고 처음 보는 광장을 누빌 때 옅게 들뜨는 마음을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따로 앉아 서울에 갔던 둘은 옆자리에 앉아 있다. 단 음식을 싫어했던 선우는 나미와 젤리를 나눠 먹고 이전에는 지나쳤던 자전거를 주워 탄다. 경쾌한 복수와 말끔한 용서는 사이비 종교의 믿음 강요만큼이나 억지스러운 것이었고, 생채기를 죽 긋지 못한 선우와 나미는 지나온 시간을 애써 도려내지 않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럴 수 없었다는 걸 아는 얼굴. 주머니 속 커터칼은 버리고 자전거 페달을 꼭꼭 밟기로 한다. 이름 불러 주는 이가 있다면 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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