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마코토 감독에게 바친다
다큐멘터리영화에서 제작자의 역할은 영화를 작품화하고 사회화하는(=제작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특히 전문화된 영화에서 프로듀서에게는 경제적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수지타산을 맞춘다는 것은 영화 제작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에게 만들어진 영화 작품을 배급과 상영을 통해 어떻게 보여주고 제작비를 회수할 것인가를 뜻합니다. 따라서 프로듀서에게 있어 작품의 완성은 영화 제작 전체로 보면 반환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화를 계속 만들기 위해서는 제작비를 회수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프로듀서는 영화를 사회에 개방하고 타자와의 연대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다들 말하듯이 영화는 관객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작품은 봐달라고 스스로 요구하고, 관객 안에서 비로소 작품으로 인정받고, 영화로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죠.
사실 영화를 영화로 완성시키는 것은 실제적인 면에서나 의미면에서나 이렇게 보게 하는 행위이며, 이것은 경제에 의해 크게 제약을 받습니다. 또 영화 작품을 완결시키는 과정에서 프로듀서에게 요구되는 것은 관객의 눈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종종 감독과 프로듀서가 대립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겠습니다. 영화를 시작부터 끝까지 풀어내는 것은 감독이며, 대개 프로듀서는 작품의 하류에 선 관객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그때 감독을 뒷받침하는 것은 피사체인 사람들에 대한 신의와 자신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프로듀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이죠. 신의나 표상이라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개념과 실체가 있는 경제의 대립. 다큐멘터리영화라는 표현에 관한 세계에서는 실체가 있는 경제가 추상적인 개념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프로듀서는 항상 뒤로 물러서게 되죠.
그런데 이것은 사실 다큐멘터리영화에서 제작상의 진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프로듀서는 '책임지고 떠맡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죠. 어떤 영화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책임지고 떠맡는다'는 차원에서, 프로듀서가 작품의 내용에 대한 비평을 한 몸에 '책임지고 떠맡는' 감독과 비로소 대등하게 공범관계=공동성을 맺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거기에 영화감독과 프로듀서라는 관계성의 가장 궁극적인 사랑(愛)이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수지타산을 맞춘다는 것은 영화 제작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에게 만들어진 영화 작품을 배급과 상영을 통해 어떻게 보여주고 제작비를 회수할 것인가를 뜻합니다. 따라서 프로듀서에게 있어 작품의 완성은 영화 제작 전체로 보면 반환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화를 계속 만들기 위해서는 제작비를 회수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프로듀서는 영화를 사회에 개방하고 타자와의 연대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다들 말하듯이 영화는 관객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작품은 봐달라고 스스로 요구하고, 관객 안에서 비로소 작품으로 인정받고, 영화로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죠.
사실 영화를 영화로 완성시키는 것은 실제적인 면에서나 의미면에서나 이렇게 보게 하는 행위이며, 이것은 경제에 의해 크게 제약을 받습니다. 또 영화 작품을 완결시키는 과정에서 프로듀서에게 요구되는 것은 관객의 눈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종종 감독과 프로듀서가 대립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겠습니다. 영화를 시작부터 끝까지 풀어내는 것은 감독이며, 대개 프로듀서는 작품의 하류에 선 관객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그때 감독을 뒷받침하는 것은 피사체인 사람들에 대한 신의와 자신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프로듀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이죠. 신의나 표상이라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개념과 실체가 있는 경제의 대립. 다큐멘터리영화라는 표현에 관한 세계에서는 실체가 있는 경제가 추상적인 개념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프로듀서는 항상 뒤로 물러서게 되죠.
그런데 이것은 사실 다큐멘터리영화에서 제작상의 진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프로듀서는 '책임지고 떠맡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죠. 어떤 영화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책임지고 떠맡는다'는 차원에서, 프로듀서가 작품의 내용에 대한 비평을 한 몸에 '책임지고 떠맡는' 감독과 비로소 대등하게 공범관계=공동성을 맺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거기에 영화감독과 프로듀서라는 관계성의 가장 궁극적인 사랑(愛)이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토 씨, 당신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즐거움이 나에게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이제 와서야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다큐멘터리영화를 제작하면서, 나는 프로듀서로서 항상 당신을 최고의 감독으로 상정하며 작품 구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야마가미 테츠지로 (프로듀서/ SIGLO대표)
사토 마코토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추모하며
이십삼 년 전 거구의 남자가 등을 굽히며 우리 집으로 들어섰다.“니가타에 가면 하타노 씨를 찾아가봐. 술도 마실 수 있고, 잠도 재워줄 거”라고, 누군가에게 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9월 4일 갑자기 돌아가신, 영화 <아가노 강에 살다>를 감독한 사토 마코토씨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무렵 나는 미나마타병환자 운동의 지도자였던 고 가와모토 테루오 씨를 본받아 니가타의 미인정 환자와 함께 행정불복 운동을 10년 넘게 하고 있었는데, 이길 가망이 보이지 않아 아주 형편이 나쁜 상태였다. 그래서 기존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환자 한 사람 한사람의 살아가는 모습과 매력을 일깨울 수 있는 전달 방식이나 실천 방법을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때 사토 마코토 씨는 조감독으로 일했던 <무고한 바다>의 상영을 위해 왔었는데, 다음엔 자신이 감독할 작품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술기운에 “다음엔 아가노에 관한 영화를 함께 만들자”고 부추겼다. 미나마타는 이시무레 미치코 씨를 비롯해 사진이나 영상을 이용해 표현한 사람들이 많지만, 니가타는 없어서 애석하다고 말했다.
환자의 일상생활 전체를 그대로 찍으면 어떨까, 고발하는 식이 아닌 재미있는 다큐멘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등등 나중에 영화에서 명연기를 보여주게 되는 떡집 할아버지나 배를 만드는 목수인 엔도 씨의 이야기도 하면서 두 젊은이와 기분 좋게 술을 꽤 많이 마셨던 것 같다.
그 후 사토 씨는 3년 정도 도쿄에서 기술적인 경험을 쌓았는데, 틈틈이 아가노 강 주변을 다녀가곤 했다. 구체적으로 찍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아 초조해하기도 했다.
이미 2차 소송이 진행 중이던 니가타에서 가와모토그룹인 사토 마코토나 나는 과격파로 경계 대상이었다. 일이 좀처럼 쉽게 진척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작위원회 대표인 오쿠마 타카시 니가타대학 교수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7명의 스태프가 3년간 거주하면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걸작 다큐멘터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국내외에서 상도 많이 받았지만, 출연해준 모든 환자분들이 그 완성을 기뻐해주어서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 해에는 떡집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후에도 다른 분들이 잇따라 돌아가시면서, 추도회가 올해로 15회가 되었다. 사토씨도 매년 와주었는데, 올해는 병으로 오지 못한다며 원고용지 7장 정도에 마음을 담아 보내면서 나에게 추도회에서 읽어달라고 했다.
“저의 15년은 모두와 함께 한 세월이었습니다. <아가노 강에 살다>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제 나이 34살, 지금은 49살입니다. 드디어 오십 줄에 들어섭니다. 최근 영화 5편을 감독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아가노 강에 살다>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새로운 영화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전후 일본을 정면에서 다루어볼 생각입니다. 내년 16회 추도회에서 새 영화에 대해 보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설마 유언장이 되리라고는…….
예순 살, 일흔 살이 된 사토 씨와도 함께 일하고 싶었는데. 즐겁게 술도 마시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간 사토 씨.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 한 잔 들게!
<아가노 강에 살다> 후원회 사무국 하타노 히데토
(1950년 니가타현 출생. 1971년 니가타 미나마타병에 관해 알게 된 후, 본업인 목수 일을 하면서 지역의 환자모임을 지원하였다. 지금은 니가타 미나마타병환자의 모임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 아가노시 거주)
그 무렵 나는 미나마타병환자 운동의 지도자였던 고 가와모토 테루오 씨를 본받아 니가타의 미인정 환자와 함께 행정불복 운동을 10년 넘게 하고 있었는데, 이길 가망이 보이지 않아 아주 형편이 나쁜 상태였다. 그래서 기존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환자 한 사람 한사람의 살아가는 모습과 매력을 일깨울 수 있는 전달 방식이나 실천 방법을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때 사토 마코토 씨는 조감독으로 일했던 <무고한 바다>의 상영을 위해 왔었는데, 다음엔 자신이 감독할 작품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술기운에 “다음엔 아가노에 관한 영화를 함께 만들자”고 부추겼다. 미나마타는 이시무레 미치코 씨를 비롯해 사진이나 영상을 이용해 표현한 사람들이 많지만, 니가타는 없어서 애석하다고 말했다.
환자의 일상생활 전체를 그대로 찍으면 어떨까, 고발하는 식이 아닌 재미있는 다큐멘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등등 나중에 영화에서 명연기를 보여주게 되는 떡집 할아버지나 배를 만드는 목수인 엔도 씨의 이야기도 하면서 두 젊은이와 기분 좋게 술을 꽤 많이 마셨던 것 같다.
그 후 사토 씨는 3년 정도 도쿄에서 기술적인 경험을 쌓았는데, 틈틈이 아가노 강 주변을 다녀가곤 했다. 구체적으로 찍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아 초조해하기도 했다.
이미 2차 소송이 진행 중이던 니가타에서 가와모토그룹인 사토 마코토나 나는 과격파로 경계 대상이었다. 일이 좀처럼 쉽게 진척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작위원회 대표인 오쿠마 타카시 니가타대학 교수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7명의 스태프가 3년간 거주하면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걸작 다큐멘터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국내외에서 상도 많이 받았지만, 출연해준 모든 환자분들이 그 완성을 기뻐해주어서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 해에는 떡집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후에도 다른 분들이 잇따라 돌아가시면서, 추도회가 올해로 15회가 되었다. 사토씨도 매년 와주었는데, 올해는 병으로 오지 못한다며 원고용지 7장 정도에 마음을 담아 보내면서 나에게 추도회에서 읽어달라고 했다.
“저의 15년은 모두와 함께 한 세월이었습니다. <아가노 강에 살다>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제 나이 34살, 지금은 49살입니다. 드디어 오십 줄에 들어섭니다. 최근 영화 5편을 감독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아가노 강에 살다>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새로운 영화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전후 일본을 정면에서 다루어볼 생각입니다. 내년 16회 추도회에서 새 영화에 대해 보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설마 유언장이 되리라고는…….
예순 살, 일흔 살이 된 사토 씨와도 함께 일하고 싶었는데. 즐겁게 술도 마시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간 사토 씨.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 한 잔 들게!
<아가노 강에 살다> 후원회 사무국 하타노 히데토
(1950년 니가타현 출생. 1971년 니가타 미나마타병에 관해 알게 된 후, 본업인 목수 일을 하면서 지역의 환자모임을 지원하였다. 지금은 니가타 미나마타병환자의 모임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다. 아가노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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