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리뷰: 소녀는 따로 자란다*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한들 님의 글입니다.
친구 하기란 서로를 어지럽히기이다. 상대는 다른 층위의 세계에 사는 애이기 때문이다. 다른 부모, 다른 밑천, 다른 성정, 다른 기쁨과 슬픔,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자라왔다는 말이다. 잘 알지도 못할 내 세계의 일을 운운하며 간섭하는 상대를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날들이 있다. 그런데 어느 결정적인 날엔 그것이 절실해진다, 문을 막고 선 나를 밀치고라도 이 세계로 뛰쳐 들어와 줄 내 친구가. 여기에 서로를 끝내주게 어지럽히고 간섭해낸 세 소녀가 있다.
주영과 예지와 성희는, 따로 자라는 소녀들이다. 무엇을 믿고 믿지 않는지, 제 세계를 서로에게는 비밀로 한다. 주영은 ‘내가 하는 일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있으므로. 동시에 부조리로 얼룩진 운동부가 달라질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바뀔 수 있다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을 합쳐 운동선수 되려던 장래를 포기한다.
성희는 자신이 자신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자신의 고통엔 상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믿음만이 심긴 가슴은 척박하다. 그래서 믿지 않는 것과 믿는 것을 엮어 목을 맨다.
예지가 믿는 것은 체념이다. 예지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어떤 말들을 다 삼킨 말이다. ‘너 소년원 학교 다닌다며?’ ‘네.’ 내일부터 일 나오지 마라.’ ‘네.’ 온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없는 청소년이란 이 세상에서 어떤 층위쯤에 속하는지. 그래서 예지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세 소녀가 서로의 세계 앞에 섰다. 비밀은 탄로 났다. 이제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사건은 ‘사랑과 우정’의 이름으로 된 균열이다. 믿음의 지각변동이다. 지금까지 각자가 믿어온 땅은 깨지고 무너지고 넓어진다.
주영이 성희를 대신해 코치를 고발하러 경찰서로 달려갈 때 주영을 막아 세우는 사람은 예지다. ‘아무도 네 말 안 믿어!’ 화를 내는 예지에게,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잖아! 성희 내 친구야!’ 주영은 더 화를 낸다. 주영의 말이 예지에게는 얼마나 어리석고 귀하게 들리는가. 예지는 이쯤부터 새로 믿고 싶어졌을까? 누군가는 남의 고통 때문에 펄쩍펄쩍 몸서리치기도 한다는 걸, 남을 지켜주고 싶어서 나를 돌진시키기도 한다는 걸.
모든 게 절망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성희의 어깨를 붙들고 주영이 말한다. ‘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왜 네가 그만 둬. 내가 도와줄게.’ 주영은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도 그 말을 들었을까. 성희를 일으키며 스스로도 일어섰을까. 그날 이후 주영은 누가 알려준 적 없는 믿음을 스스로 배웠고 운동부의 부조리와 제대로 한판 붙기로 한다.
성희의 경기가 치러지는 날, 도복 입은 소녀들이 대회장 출입문 앞에 일렬로 서 외친다. ‘못 지나가십니다!’ 팔짱을 단단히 낀 소녀들은 코치를 막고 성희를 지키는 바리케이드가 된다. 그날의 경기는 투쟁이다. 금메달을 딴 성희는 언론 앞에 피해자로 당당히 나선다. 어깨 위에 주영의 손길이, 귓가에 동지들의 목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척박했던 가슴엔 새 믿음이 자라고 있다.
주영과 예지는 어떻게 됐을까. 이 둘은 서로의 세계에 자신의 일부를 떼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취하고 지친 예지를 끌어안는 주영의 품은 예지에게 필요했던 한 평이었고. 주영의 일 앞에서 예지는 어느새 체념을 완전히 던져버렸고, 주영은 예지를 예지는 주영을 지키기 위해 서로가 있는 곳으로, 거기가 천국이든 지옥이든 개의치 않고 내달렸다. 살다가 제 세계의 종말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두 사람은 자기 안의 서로를 찾아낼 것이다. 내 세계의 종말을 막으러 가슴 터지게 달려오던 너를. 그를 끌어안는 마음으로 제 세계를 다시 끌어안을 것이다. 그것이 주영과 예지 앞에 놓인 모든 결말과 이어지는 결말이라고 믿는다.
주영과 예지와 성희로부터 알게 된다. 사랑과 우정은 믿음을 바꾸게 하고 바꾸며 이루어진다고. 그 얘기를 달리해서 이렇게도 적고 싶다. ‘소녀는 따로 자란다. 함께 자라기 전까지는.’ 이 문장이 꼭 그들의 증언처럼 느껴진다.
*『소녀는 따로 자란다』(안담)의 제목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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