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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행복의 나라>: 삶과 죽음의 방랑자

by indiespace_한솔 2018. 8. 8.







 <행복의 나라>  한줄 관람평


박마리솔 행복의 나라는 없을 수도

임종우 | 빗겨나간 죽음의 고통스러운 귀환

윤영지 | 살기 위한 맹렬한 눈빛, 통렬한 몸짓

최대한 | 삶과 죽음의 방랑자






 <행복의 나라>  리뷰 : 삶과 죽음의 방랑자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대한 님의 글입니다. 

 



최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비롯하여 2관왕을 달성하며 호응을 받은 <행복의 나라>가 곧 이어 극장에 개봉했다. 이 영화를 관람한 다수의 관객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2008)를 떠올렸으며, 두 영화의 서사에 유사점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극의 서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유사점이 존재한다. 두 영화에서 민수요시오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구원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민수와 요시오가 그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은 명백히 다르다. 또한 <걸어도 걸어도>에서 준페이의 죽음이 영화 속 인물들을 아우르는 결합의 매개체라면, <행복의 나라>에서 진우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인물들을 결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들을 와해시킨다. 이처럼 이 두 영화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삶과 죽음의 방랑자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구원자의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요시오는 준페이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시오는 극중 한 장면에 잠시 등장할 뿐이다. 이에 대한 과정과 묘사는 생략되어 있으며, 영화 또한 준페이의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기리기 위해 모인 가족들의 관계에 집중한다. <행복의 나라>는 민수를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서사의 과정에서 민수는 자신을 구원한 진우의 죽음을 수없이 마주하며, 이 조우를 통해 발생하는 감정과 충돌이 극을 이끌어간다.

 

민수를 대신해 진우가 죽은 지 8년이 흘렀다.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날의 기억은 민수를 억누른다. 진우의 제사가 다가올수록 압박은 커지고 그의 신경쇠약은 점점 심화된다. 이는 마치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 죽음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진우의 제사에 참석한다. 그리고 제사 당일, 추상적이었던 죽음의 그림자는 실체를 나타내고 민수는 죽음과 삶의 경계 사이에 위치한다. 민수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이제부터 그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더 이상 죄책감과 도덕적 윤리는 그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다.

 

그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쫓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삶은 중요치 않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를 파괴자로 변모시킨다. 그는 진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옷가지를 훔치고 불태우며 거동이 불편한 진우의 아버지를 내팽개치고 진우의 어머니를 돌로 내려찍기도 한다. 그는 타인을 파괴하면서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맞이하고, 영화는 장례식장의 영정사진만으로 그의 죽음을 설명한다.


 

 



생명의 잉태와 파괴자 사이의 경계

 

<행복의 나라>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랑하고 있는 민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이와 동시에 미약하지만 한 아이의 부모가 되기를 준비하고 있는 민수와 진선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크게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이 두 이야기는 영화의 엔딩에서 정확하게 교차점을 형성한다.

 

극의 초반부는 진선이 임신한 상태이며 출산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관객들에게 수시로 전달한다. 아이의 출산, 즉 새 생명의 출산이 점점 가까워짐과 동시에 민수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운다. 그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쫓기고 있으며, 필사적으로 이를 벗어나고자 한다. 죽음에 대한 극한의 공포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지경까지 그를 몰아세우며, 이 과정에서 민수는 새 생명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것조차 점점 망각한다.

 

그에게는 양면의 얼굴이 존재한다. 한 쪽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파괴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한 면에 새 생명의 출산을 준비하는 아버지가 존재한다. 마치 제로섬게임처럼 하나의 영역이 커질수록 나머지 하나의 영역은 점점 줄어든다. 그를 죽음으로 옭아매는 진우의 흔적과 그 가족의 모든 것을 파괴했을 때, 그는 비로소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해방되었다. 그가 파괴자로서 절정에 이른 순간이기도 한데, 그 순간 새 생명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는 임신한 진선이 쓰러진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임신한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생명의 향방에 대해 추론할 수 있으며, 이 추론의 형상은 꽤나 구체적이다.

 


 



얄궂은 죽음의 속박

 

민수는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투하며 생명을 잉태한 부모와 파괴자의 경계에서 파괴자로서 자리 잡는다. 영화가 제시하는 흔적들을 쫓아갔을 때 새 생명은 죽음을 맞이했고 민수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이 새 생명의 죽음은 또 다시 그를 죽음의 영역으로 몰아넣었으며 장례식장의 영정사진이라는 결과를 도래한다.

 

얄궂은 죽음의 속박은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이 속박으로 벗어나기 위해 사투했지만, 무기력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간의 윤리마저 집어치웠다. 마치 거친 풍랑 속에서 발가벗은 채 필사적인 제자리 헤엄을 치는 인간을 보는 듯하다.

 


<행복의 나라>는 민수를 끊임없이 죽음의 그림자로 몰아넣는다. 민수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서사를 이끄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행복의 나라>를 통해 이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이 체험의 과정은 죽음을 마주한 우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그 형상은 꽤나 뚜렷하게 그려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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