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즈 기획] 지금, 독립영화
오늘도 독립영화는 우리를 기다립니다. 극장에서, 집에서, 때로는 우리가 뜻을 모아 함께하는 공간에서, 독립영화는 우리와 만나고 있습니다. 여기 독립영화와 좀 더 가까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립영화의 지금을 생생히 경험하는, 인디스페이스의 관객기자단 인디즈 10기가 전해드립니다.
독립영화가 보여주는 ‘여성’에 관하여,
한국 독립영화 벡델 테스트(Bechdel test)
* 관객기자단 인디즈 오채영 님의 글입니다.
지난 2017년 미국의 온라인 사전 '메리엄 웹스터'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페미니즘(feminism)이었다. 해가 바뀐 지 반년이 채 안 됐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혁명적으로,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아주 지겹게 느껴지는 단어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전 우리나라는 강남역 살인사건의 2주기를 맞이했다.
본격적인 페미니즘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을 통해서 한국 사회가 낮은 여성 인권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혹자는 '역차별'이라 호소하며 피해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고 위치지어져 왔는지 알 수 있다. 버디물, 재계 혹은 뒷골목에서 펼쳐지는 느와르물, 히어로물 영화들은 남성 배우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에 모자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도 실존했던 여성 인물들은 지워진 채 남성 주인공들과 남성 중심적인 서사만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평등 이슈가 도마에 오르게 되면서, 최근 남성 배역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내 영화에 대한 문제제기 또한 활발해졌다. 그래서인지 근래에 들어 <소공녀>, <누에치던 방>, <파란 입이 달린 얼굴> 등 여성 감독의 여성 중심 서사 영화의 등장이 잦아진 것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나고 있다. 믿기 힘들지만, 사건이 일어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은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분노 때문이었다’라는 카피와 함께 강남역 살인사건이 영화화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잠시 날아가 보자. 뉴욕필름아카데미(New York Film Academy)가 2007년부터 2012년 사이 개봉했던 할리우드의 500대 영화를 조사한 결과, 대사가 있는 캐릭터 중 여성은 30.8%에 그쳤으며 그 중 1/3이 성적으로 두드러진 옷을 입거나 일부 노출이 있는 옷을 착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에서의 비율을 살펴보면 여성 출연자의 28.8%가 성적으로 두드러진 옷을 입고 출연하였으며 이 때 같은 조건의 남성캐릭터는 7.0%에 그치는 수치를 보였다. 남녀캐릭터의 수가 같은 영화는 전체의 10.7%에 그쳤으며 남녀 배우 비율은 남성 대 여성이 2.25:1을 기록하였다. (출처: 'Gender Inequality in Film - An Infographic 2013' https://www.nyfa.edu/film-school-blog/gender-inequality-in-film/)
그렇다면 다시 한국이다. 한국 상업 영화의 경우는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한국 상업 영화를 위의 경우처럼 구체적으로 분석해놓은 결과는 아직 없으나 언론 매체들은 매년 연말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를 통해 그 해의 흥행작들을 분류하여 한 해에 총 몇 개의 영화가 이 테스트를 통과 했는지를 살펴본다. 매거진 M에 따르면 2016년 흥행 한국 영화 23편 중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총 7편(30.4%)에 그쳤으며 작년인 2017년에는 25편 중 5편이 통과(20%)하여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출처: 매거진M, '2016 한국영화 여성들, 안녕하십니까', http://news.joins.com/article/21063402)
“벡델 테스트라는 게 뭔데요?”
*앨리슨 벡델, <Dykes to Watch Out For>
벡델 테스트는 영화의 성평등 평가 방식이다. 미국의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1985년에 그린 한 만화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는 자신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영화만 본다고 이야기 한다.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해야 하고, 그 둘이 서로 대화해야 하고, 그 대화는 남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인공은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의 부차적인 존재가 아닌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영화를 선호한다는 의미다. 벡델 테스트는 해당 대사로부터 고안되어 작가인 엘리슨 벡델의 이름을 따 오늘 날 영화의 성평등 정도를 체크해보는 지표가 되었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벡델 테스트가 제시하는 기준은 아주 쉬워 보인다. 웬만한 영화들이 모두 이 테스트를 통과할 것만 같다. 하지만 위에서 확인했듯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이 테스트의 결과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 말은 이 테스트를 통과한다고 해서 훌륭한 영화가 되는 것도, 통과하지 못한다고 해서 파렴치한 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 예시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산드라 블록 주연의 영화 <그래비티>인데, <그래비티>는 벡델 테스트의 통과 기준에 부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려내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 영화로 통하기 때문이다. 다만 벡델 테스트는 여성이 남성 중심적 서사를 뒷받침 하기 위해 존재하는 단순 ‘구색용’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영화가 젠더 프레임을 어떤 식으로 구성하고 있는가를 판가름하기에 유효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실제로 영화의 성 평등 수치를 확인하기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는 영화가 많아지면 오히려 영화계에서 남성들이 설 자리가 없지 않을까요?”
천만의 말씀이다! 현재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가 받는 시나리오의 양은 정말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영화가 재현해내는 여성의 모습도 문제지만, 현재 여성 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더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여배우는 오늘도>를 연출한 배우 문소리는 ‘트로피는 많고 배역은 없다’라는 카피를 내걺으로써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메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화가 현저히 적은 우리나라 영화계의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배우 이보영도 한 인터뷰에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남편이 받는 대본과 본인이 받는 대본의 양 사이의 차이가 있다고 언급하며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현실이 뒷받침해 주지 않다는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출처: 스포츠투데이, '이보영, "지성과 공개 열애 후 캐스팅 힘들어..지금도 받는 대본 달라" [인터뷰 스포일러]', http://stoo.asiae.co.kr/news/view.htm?idxno=2018031517050739392)
또한 영화계 성 평등의 문제는 배우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배우나 캐릭터만큼 성평등 문화가 절실히 정착해야 할 곳이 또 한 군데 존재하는데, 바로 제작자의 영역이다. 아까 미국에서 잠시 만나고 왔던 뉴욕필름아카데미는 같은 조사에서 특이점을 발견했는데, 여성이 감독을 맡으면 여성 캐릭터가 통계적으로 10.6% 증가하고 여성 작가가 붙으면 8.7% 증가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남성의 1/5에 그쳤으며 감독 비율은 남성 대비 여성이 9:91, 작가 비율은 15:85였다.
상업영화의 현실은 위에서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영역으로 돌아와보자. 독립영화의 경우는 어떨까. 물론 독립영화의 경우 상업영화에 비해 자본의 투입 규모가 작기 때문에 흥행 공식이 존재하지 않고 장르적으로 유연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이는 단순한 통계만으로도 영화계에 중요한 함의를 던질 것이라는 생각에 독립영화에 직접 벡델 테스트의 기준을 직접 적용하여 알아보기로 하였다.
테스트를 위해 독립영화를 선정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먼저 영화진흥위원회 통합 전산망이 제공하는 역대 박스오피스에서 한국 다양성 영화를 검색하였다. 위 과정을 통해 추출한 국내 다양성 영화 흥행 순위 상위 200개 영화(2018년 5월 12일 기준) 중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하여 2주 이상 스크린에 걸린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 영화 36편을 선정하였다.
(단, 옴니버스의 경우 에피소드마다 감독과 등장인물이 다르므로 각 에피소드를 단일 영화로 집계함)
단편과 장편을 아우르는 총 36개 영화 중 20개 영화가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였고, 이는 58%에 해당하는 과반을 넘는 수치로 나타났다. 한 해에 2-30%만 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상업 영화의 환경에 비해 객관적으로 나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통해 현재 독립영화 속에서 여성 배우가 설 자리가 충분하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이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과반에 임박한 많은 영화에서 여성이 남성 주인공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를 던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의 관계를 리얼하게 담아내어 호평을 받은 <우리들>, 여성 퀴어 영화인 <연애담>,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담은 <눈길>과 <귀향>을 포함한 많은 여성 주연 영화들이 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할 수 밖에 없다. 또 <어떤 시선>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얼음강>과 같이 영화가 입대에 관련된 스토리를 담고 있거나 목록에는 없지만 남성 퀴어 영화, 혹은 <파수꾼>과 같이 남초 집단의 이야기를 다룬 경우라면 영화의 내용과는 관계 없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표본으로 주연배우의 남녀 성비, 여성이 크레딧에 첫 번째로 올라와 있는 경우, 그리고 여성이 성적 유린과 학대를 포함한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 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여성 제작자가 제작에 참여했을 시 여성 캐릭터가 증가한다는 통계에 따라 우리나라 독립영화 시장에서 여성 제작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여성이 제작하거나 제작에 참여한 영화의 숫자 또한 따져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주연배우의 남녀 성비는 포털사이트 네이버 영화 검색을 통해 조사 대상이 된 영화에서 ‘주연’으로 분류된 배우의 성별을 기준으로 조사하였으며 결과는 2.08:1.58로 나타났다. 여성 배우가 크레딧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영화는 16편으로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여성 감독이 제작하거나 제작에 참여한 영화는 6편으로 1/6에 그쳤다. 주목할만한 부분은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는 영화가 거의 64%에 육박했다는 사실이다. 집계된 36편 중 13편을 제외한 독립영화에서 여성이 성적 추행을 당하거나 신체적 혹은 언어적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강간, 살인 등 강력범죄의 대상은 주로 여성이었다. 물론 소재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여성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경우, 가출 청소년의 실태를 현실적으로 반영하고자 한 경우, 일본군 ‘위안부’나 전쟁 일대기를 그린 경우 등이 해당된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영화가 정말로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는 힘이 된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강력범죄 피해자의 88.9%는 여성이다. 2016년 여성의 50.9%는 사회 안전에 대해 불안을 느꼈으며 가장 주된 불안 요인으로는 범죄발생(37.3%)을 꼽았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문화는 힘이 된다’는 말을 곱씹는다. 한국 독립영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최근 영화들은 어떤가요?”
최근 영화들은 비교적 희망적이다. 다음은 2018년 5월 21일 기준, 올해 개봉한 독립 영화 작품들 중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들의 목록이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세 편의 영화 <수성못>과 <눈꺼풀>,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이 모두 크랭크인이 2017년 5월 이전임을 감안하면, 한국 독립영화계가 발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 감독이 제작하는 영화의 추이도 긍정적이다. 2017년 5월 22일 기준으로 올해 4편의 여성 감독의 독립영화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했다. 김수정 감독의 <파란입이 달린 얼굴>, 이완민 감독의 <누에치던 방>, 유지영 감독의 <수성못>,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다. 지난 2016년, 2017년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했던 영화들 중 여성 감독이 참여한 영화가 한 해에 각각 8편, 5편이었다. 게다가 현재 시점인 5월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각각 3편, 2편의 영화가 개봉했는데, 이와 비교하면 올해의 추이는 희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한 작품으로 한정하여 조사한 탓에 정확도에 대한 아쉬움도 많을 것이다. 혹은 벡델 테스트라는 형식 자체에 의구심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지만, 영화 속 성평등은 정말로 필요한 부분이다. 영화 배우와 산업을 위해서도, 그리고 극장을 찾는 여성 관객을 위해서도. 이 기사를 기고하며 지난 해 영화를 보다가 여성 범죄가 일어나는 장면을 보고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는 지인의 일화가 떠올랐다. 모든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기를 쓰고 주연 배우의 성비를 맞추어야 한다며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들을 비난하겠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던 것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달려왔던 길을 돌아 보자는 이야기이다. 여성은 아직도 저 뒤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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