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2. 새로운 미디어 운동, 아시아의 연대
일시 / 2008년 9월 28일(일) 오후 2시 30분
초청자 / 츠치야 유타카 (<새로운 신> 감독)
발표 / 허경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간사)
사회 / 조동원 (미디어문화행동 활동가)
츠치야 유타카
일본의 활동에 대해 연대별로 설명하겠다.
60-70년대는 일본에서 사회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이 굉장히 활발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는 영화 자체도 뜨거운 시대였고,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극영화에서도 정치, 사회문제에 관한 영화가 많이 나왔다.
60-70년의의 흐름 속에 미디어 액티비즘에서 가장 주요했던 것은 자주상영이다. 상징적인 예로 <적군>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버스를 이용하여 자주상영 운동을 했고, 이것은 미디어 운동의 역사에서 굉장히 특별한 일이다.
7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은 활발함을 잃는 반면, 개인이 만든 영화, 실험영화, 비디오아트의 움직임이 새롭게 시작한다. 1978년에 “도쿄비디오페스티발”을 시작되었는데, 이 축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것은 시민들이 만든 비디오, 개인이 찍은 비디오 영상을 사회 속에서 넗혀 가는 역할을 했다. 이 영상물들은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장르로 새롭게 확산되게 된다.
그러나 70년대는 비디오의 값이 비쌌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들어 더 활발해졌다. 85년에 만들어진 <당하면 복수하라>는 영화가 있는데, 도쿄의 일용직 노동자가 모여있는 산야지구에서 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지원자들이 스스로 만든 영상이다.
89년에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시작되어 다큐멘터리, 비디오아트, 실험영화를 다 포함한 영화제로 시작되어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다큐멘터리 영화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90년대 들어와서는, 95년에 miniDV가 발매되기 시작, 이것은 새로운 규격의 비디오 활동을 시작을 알렸다.방송의 영상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높은 퀄리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내 비디오 활동을 한 단계 더 넓히는 계기가 되었고 91년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 전쟁반대자들이 뉴욕에서 ‘피파타이거’라는 비디오 그룹 활동을 시작하여, 이 활동이 일본에 들어와서 새로운 역할을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여러 일들이 일어났는데 하는 FMYY라는 커뮤니티 라디오가 시작했고, 95년 <우리는 민주노총이다>라는 영화를 한국의 노동자뉴스제작단과 함께 번역해서 제작하고, 켄 로치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작업들을 했다.
2000년대 들어와서는 인터넷이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비디오 영상을 인터넷 상에 올리는 활동들을 시작, 국제적으로도 인디미디어 활동들이 올해 G8에 대항하는 활동들을 하고 있다.
G8활동가들이 여기 와계시기 때문에 토론 할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고, 참고로 도쿄 신주쿠에 있는 지하도에서 노숙자들이 만든 영상 <신주쿠 노상 TV>를 함께 보겠다.
도쿄 신주쿠 지하도 노숙자들이 종이 박스를 집으로 삼아 모여 있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들에게는 여기가 집이고, 보통집과 달리 거실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거실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TV를 설치하고, 공동으로 밥을 먹고, 노숙자와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운동을 했다.
영상을 보고 발표를 마치겠다.
허경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의 간사를 맡고 있고, 이 자리가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 운동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집중적으로 논의할 주제를 함께 하기 위한 자리이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은 제한적으로나마 짧게 설명하겠다.
한국의 상황 역시 정치적, 민중운동적, 사회문화적인 미디어 운동이었고, 기술의 변화 발전에 따라 함께 변화했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일본과 달라서 세가지의 대표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1980년 5월, 2002년 5월, 2008년 5월의 세 가지 사례로 설명할 수 있는데, 1980년 5월은 한국의 군사정권에 대해서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있었던 때이고, 주류 방송국에서는 광주 민중들을 폭도, 간첩,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오도, 왜곡했었고, 그때의 대표적 미디어 방식은 광주 MBC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은 한국 사회운동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시기인데, 그 이후 한국 민중운동이 크게 확산되었고, 미디어운동도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되었다. 광주MBC사건과 이로 인한 미디어운동의 분화를 얘기해보면, 기존의 지상파 방송국 시스템 안에서의 운동, 영화 시스템 안에서의 운동으로, 내부 개혁운동의 흐름이 있고, 시스템밖에 독립영화, 독립미디어운동 이렇게 80년 이후에 분화가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영역의 운동이 진행되었고,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독립미디어, 독립영와 운동은 전업적으로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외에도 시민, 민중이 직접 미디어를 만들고 주류에 참여하는 공간을, 그것과 별도로 미디어를 소유하는 방식의 참여적, 대안적 미디어운동의 흐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5년 5월에는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내쫓는 일이 벌어졌고, 군사기지이전을 저지하는 투쟁이 벌어졌다. 80년 광주에서는 방송국을 불태웠지만 20년 후에는 다른 미디어 운동의 양상이 벌어졌는데, 그 동안의 주류 방송국에서는 일부 프로그램이 평택의 상황을 알리는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평택에서는 독립영화 운동, 미디어활동가들이 직접 평택에 들어가서 주민들과 함께 인터넷 방송(들소리 방송국)을 만들어 주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변화된 상황일 수도 있고, 이러한 운동은 직접 주민들이 싸우기도 하고, 조직된 운동세력이 많이 모이기도 했지만,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제한적인 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고, ‘들소리 방송국’에 대해서도 어떤 의미, 성과와 과제에 대해 토론되지 못했다.
그리고 불과 3년 후인 올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저지 운동이 벌어졌는데 미디어운동의 활동은 아주 큰 변화의 양상을 보인다. 군사기지 이전 투쟁처럼 중요한 투쟁처럼 보이는 주제가 아닌, 직접 자기가 먹는것, 광우병 걸린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대한 이슈는 모두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었다.
평택의 활동가들은 미디어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었고, 촛불은 모든 시민들이 만들었고, 이것은 인터넷으로 생중계를 하기도 했다. 2008년 초부터 시작된 싸움들은 여전히 진행되고 잇고 그것과 관련한 수많은 토론과 논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경험을 통해 운동이 자본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중적 이슈로 투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미디어 운동 진영도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대안적인 미디어 활동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중이다.
내가 활동하는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는 시민들의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는데, 정작 기획하는 것에 있어 대중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해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 고민하고 있고, 그런 영역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각 미디어 운동 진영에서는 이 과제를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미디어 운동의 영역을 짜 나갈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다.
조동원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 운동에서 핵심이 되는 것들을 말씀해주신 것 같다.
발표에 대한 질문 혹은 보충, 생각들을 말해 달라.
관객 : 야마카와라고 한다. 일본에서 왔는데 이번 G8미디어 네트워크 참가했고, 츠치야씨와 영상을 제작하는 일을 했다. 츠치야씨의 발표에 나온 연표와 관련해서 적군파에 관한 영화를 제작했던 와카마츠 코지가 하고 있는 프로덕션에서 일을 했었고, 하라 마사토씨와도 같이 작업을 했다.
지금 보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연표 안에서 운동과 영화를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그건 비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 비디오가 시작하면서 다큐멘터리가, 시작 전에도 그런 영화가 있었지만 개인의 영화, 자신이 주제를 잡아서 찍는 영화가 있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나온 영화들인데 <오사카 스토리>, <안녕 김치> 등 재일 조선인, 한국인들이 개인 혹은 가족을 향해서 만든 좋은 영화들이 나왔다. 90년대 비디오를 가진 개인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흐름도 있었다. 이번 G8미디어 네트워크를 통해서 개인이 네트워크를 만든는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2008년에 개인이 인터넷도 하면서 운동에 참가하는 개인이 미디어가 되는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는데, 물론 역사가 다르긴 하지만, G8도 인터넷을 쓰기도 했지만, 한국에는 그런 인터넷을 미디어 활동하는 사람들이 운동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건가.
사회 / 1인 미디어라는 말이 언론에서 많이 보도되고 했는데, 1인 미디어가 이런 운동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위치잡는지에 대한 얘기인 것 같다. 더 말씀을 듣고 답변을 듣겠다.
관객 /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있고 지금 한국과 일본의 행동주의 경향에 대한 테마로 연구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이 테마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여성들의 경우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한국의 이슈가 있을 때 시민단체가 움직이는 경향이 있고, 평택대추리라든가, 광우병 이라는 이슈가 던져졌을 때 연대를 만들어 활동하는 움직임이 잇는데 일본의 경우 어떤 사회적 이슈가 있는지, 츠치야씨의 말처럼 1970년대 이후 미디어 연대라고 해서 좋은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어떤 연대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60년대 사회운동 시기를 넘은, 일본 미디어 활동의 계기가 있는지. 어떤 공통된 사회적 이슈가 있는지.
관객 / 방금 질문을 듣고, 오늘 한국 미디어 운동의 역사에 대해 듣게 되고, 미디어 운동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아까 앞에서 상영된 <신주쿠 노상 TV> 활동에 참여했었는데 왜 한국말 자막이 있냐면 광주의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참여했고 지금 DVD가 있어 원하시면 선물로 드리겠다.
한국과 일본에서 미디어가 중요한 이유는 미디어가 그것을 권력으로 인식했는가, 아닌가의 차이였다. 일본은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과 같이 군사국가가 완전히 다른 보도를 하는 계기가 없었다. 일본에서는 왜 TV가 문제가 있는지 인식하기 어렵다. 일상적으로 매체가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고 있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분질성을 미디어가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방송국을 보면 어떤 방송이든지 보도는 거의 같다. 그래서 저는 방송 보신 노숙자 TV를 했는데 거기서 생각했던 건 노숙자가 보는 세계는 어떤 것인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방송국을 했다. 일본과 한국은 그런 점에서 정말 다른 것 같다. 또 하나는 허경씨에게 질문인데, 개인미디어가 한국의 경우 일본보다 훨씬 많은 것 같은데, 프로가 아닌 시민이 어떻게 참여했는지, 비전이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면 설명해 달라.
관객 / 저는 이번 영화제에서 <왜놈에게>라는 재한원폭피해자에 대한 영화를 찍은 누노카와라고 한다. 지금도 같은 주제로 40대의 김인만씨와 20대의 나카무로 요코씨와 같이 작업하고 있다. 나는 73-86년까지 팔레스타인에서 영상작업을 했는데 그때 80년대 TV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중동에 가지 않겠냐 요청을 했고, 그때 내 머릿속에 있었던 것은 광주의 투쟁이었다. 그때 광주의 보도를 TV에서 보고 지금 팔레스타인에 가는 게 좋지 않겠냐 라는 생각을 했다. TV 방송국에서 일하면 모든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는데, 광주의 싸움을 보면서 팔레스티나, 아프간, 레바논 등 가게 되었다. 저는 여기 있으면서 광주와의 연대, 입장이 제 자신에 있었다는 것을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는데, 한국의 미디어 활동가 만나면서 재한 원폭피해자와 이런 만남을 갖게 되면서 저는 세계의 움직임을 느끼게 됐다. 저는 일본의 TV 균질화라는 말에는 전면적으로 동의한다.
한국의 1인 미디어 / 일본의 70-80년대 이후의 사회운동의 발전
촛불, 광우병, 1인 미디어만 가지고도 어떻게 프로가 아닌 시민이 참여했고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수많은 토론과 연구들이 되고 있다.
크게는 기술적인 조건과, 세대의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인터넷 보급률은 정말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모두 컴퓨터를 다루고, 핸드폰 등오로 촬영할 수 있다. 이런 기술적 조건은 운동이 아닌 미디어 산업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어서 부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도 물론 한편에 있다.
문화적 조건은 촛불의 주 세대였던 10-20대와 달라 분석은 어려운데, 고등학교, 대학생 친구들은 자기들에게 이건 너무 당연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고등학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카페를 통해 네트워크하고, 연예인들의 공연장에서 피켓들을 만들어서 응원하고, 자신의 생각을 인터넷에서 묻히지 않게 할 수 잇는 수많은 노하우를 가진 세대이다. 광우병에 대한 문제는 이미 3-4년 전부터 얘기했지만 대중적 언어 소통방식을 만들지 못했었고, 주도적 역할을 못했다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그러한 개인적인 노하우를 통해 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70년대 이후 미디어 운동과 사회운동의 연계에 대해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일본의 경우 미디어 운동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활발해진 계기는 없다. 물론 각각 사회문제/주제마다 다양한 다큐멘터리들이 만들어졌고, 작품들이 생산되어 왔는데, 예를 들어 ‘국철민영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찍는 활동도 했고, 원자력발전소 등 각 문제에 대한 작품활동을 해왔고, 주체자들이 영상을 만들어왔는데, 그런 각각의 운동들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주요한 사건들은 몇 개 있었는데, 걸프전 당시 보도비판을 했던 ‘피파타이거’의 활동을 통해 정보를 확산할 수 잇었고, 인디미디어를 접하면서 활동을 했던 것도 하나의 큰 계기였다.
그리고 2003년 이라크 전쟁 반대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비디오로 데모하는 모습을 찍고, 인터넷으로 그런 영상을 올리는 활동들을 했는데, 9.11이후 아프간 전쟁 후,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G8에 대항하는 운동과 함께 G8미디어네트워크가 형성되어,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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