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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_기획]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와 표현의 정치학

by indiespace_은 2016. 7. 4.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와 표현의 정치학 

<상계동 올림픽>, <낮은 목소리>, <경계도시>, <불온한 당신>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민형 님의 글입니다.



다큐멘터리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관점에 따라 다큐멘터리의 개념은 무한히 확장될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좁아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는 상황(사건)을 ‘기록’하고 ‘재구성’해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이다. ‘조립된 기록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흔히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와 사적인 일상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로 크게 구분된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볼 수 있을까. <할매꽃>(2007)과 <붕괴>(2014)를 연출한 문정현 감독은 모든 다큐멘터리를 사적인 영화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큐멘터리에서 “감독 개인의 이야기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시선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은 “아주 사적인 자신만의 스타일과 콘셉트, 세상을 읽는 자신만의 철학, 자신만의 이야기 구성 방식이 사용된다” <다큐멘터리, 현장을 말한다> p246 고 밝힌다. 모든 다큐멘터리는 사적 다큐멘터리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위 사회적인 다큐멘터리와 사적인 다큐멘터리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모든 다큐멘터리는 정치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권력 투쟁으로서 정치가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각자가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나누는 행위로서 정치를 의미한다. 즉, 자기 시선으로 사회를 담아내고 표현하고 나눈다는 점에서 모든 다큐멘터리는 정치적이다. 특히 이 글에서 주목할 4편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낮은 목소리>, <경계도시>, <불온한 당신>은 정치적인 영화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감독과 대상의 사적인 모습을 알아채기는 쉽지만, 정치적인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물론 그들이 자기 모습을 카메라에 보이면서 어떤 정치적 의제를 내놓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영화는 정치적 의제를 어떻게 연출하고 표현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먼저 정치적이라는 것이 영화적으로 어떻게 가시화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필자는 이 답을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에서 찾으려 한다. 칼 슈미트는 그의 논문 『정치적인 것의 개념(The concept of the Political)』에서 정치의 “근본적 행위”에 대해 서술한다. “도덕에선 선과 악, 미학에선 미와 추, 경제에선 이익과 손실. 그렇다면 순수 정치적 구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바로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이다.” 그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정치에서 가장 근본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 연장선에서 알랭 바디우도 정치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정치의 영역은 “적과 맞선 싸움”이라고 말한다. 하승우(2013), 포스트-정치 시대, 한국영화의 재난과 공포에 관한 상상력 칼 슈미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에서 “적과 동지의 구분”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를 통해 다큐멘터리에서 정치적으로 표현되는 사적인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려고 한다.




1. <상계동 올림픽>(1988)


88년에 제작된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은 상계동 주민의 투쟁을 담는다. 도시를 말끔히 전시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정부는 상계동 주민의 터전을 강제로 철거한다. 주민들이 철거를 막기 위해 애쓰지만, 끝내 고압적인 힘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그렇다고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쉽지 않다. <상계동 올림픽>에서 드러난 적과 동지의 구분은 명확하다. 철거를 진행하는 정부는 적으로, 철거를 막으려 하는 주민들은 동지로 그린다. 적은 폭력을 가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집을 무자비하게 부숴놓거나 이를 막는 사람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다. 반면에 동지는 일상적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무엇보다 같이 밥을 지어 먹으면서 동지를 확인한다. 이때 감독은 적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데, 실제 상계동 주민은 아니지만 감독 또한 동지이기 때문이다. <상계동 올림픽>은 적을 명확히 하면서 동지 되기를 수행하는 작업이다. 감독이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한 명의 동지로 작동한다. 이로써 영화는 정치성을 드러낸다.






2. <낮은 목소리 1>(1995), <낮은 목소리 2>(1996)


이 연장선에서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감춰져 있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목소리를 담는다. <상계동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명확하다. 적은 전범 국가 일본이고 동지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낮은 목소리>는 동지를 만드는 과정을 시리즈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낮은 목소리 1>(1995)에서 몇몇 할머니는 카메라에 찍히는 걸 꺼리신다. 목소리 내는 것을 위험한 일로 여긴다. 그들의 삶에서 위안부 경험은 말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자신을 둘러싼 이들 모두가 적이었다. 이를 알고 있는 감독은 할머니에게 신뢰를 쌓아가며 동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는 이걸 보며 거리 두기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이 영화는 거리 두기에 실패하는 걸 넘어서 오히려 감독과 대상 간의 거리를 좁혀야만 한다. 할머니들의 의지에서 시작된 <낮은 목소리 2>(1996)는 대상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동지는 더욱 공고해진다. 동시에 영화에서 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 1>에선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하는 장면을 볼 수 있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그렇지 않다. 농사짓는 소소한 모습으로 동지를 확인하는 것이 오히려 영화의 미덕으로 느껴진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은 적을 그리고 있으니, <낮은 목소리>는 할머니의 일상만 보여줘도 되는 것이다. 이미 적과 동지의 구분을 한 상태에서 관객에게 할머니의 일상에 동참하도록 한다. 이렇듯 <낮은 목소리>는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영화 밖 세계로까지 동지를 확장해나간다.






3. <경계도시 1>(2002), <경계도시 2>(2009)


앞의 두 영화와 달리, <경계도시 2>(2009)는 적과 동지를 구별할 수 없는 애매한 지점에 서 있는 영화다. 이전에 만들어진 <경계도시 1>(2002)에선 적과 동지의 구분을 명확히 보여준다. 송두율 교수의 입국을 가로막는 보수 매체와 국정원이 적이며, 그의 입국을 추진하는 이들이 동지이다. 그러나 다음 시리즈인 <경계도시 2>에선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국내에 들어온 송두율 교수가 스스로 부인했던 북한과의 관계를 밝히게 되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주한다. 이로써 동지 안에서의 적, 혹은 동지를 표방한 적이 생긴다. <경계도시2>에서 그리는 동지는 없다. 명확한 적은 보이지 않는 동시에 모두가 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감독도 자신이 송두율 교수의 적인지 동지인지를 명확히 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질문 하나 던지기도 힘들어하며 사적인 내레이션으로 그 고민을 풀어낸다. 아이러니하게 영화의 정치성은 이런 구분을 명확히 할 수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앞서 <낮은 목소리>에선 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동지를 공고히 하는 와중에 자연스레 그 구분이 만들어진다고 했지만, <경계도시>는 뿌리 깊은 레드콤플렉스에 갇혀 헤어 나올 수 없는 남한 사회에서 과연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모습으로 정치성을 드러낸다. 나중에서야 적과 동지는 신념을 소유한 사람끼리의 구별이 아니라, 신념 그 자체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경계도시>에서 진짜 적은 레드콤플렉스인 것이다. 감독은 본인이 마주한 레드콤플렉스를 치열하게 기록하며 질문을 던지고 고백한다. 영화 마지막에 이를 인정하고 고백한 순간, 모두가 혼란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4. <불온한 당신>(2015)


마지막으로 적과 동지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적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있다. 이영 감독의 <불온한 당신>(2015)이다. 앞의 영화들은 ‘적과 맞선 싸움’으로 동지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라면, <불온한 당신>은 적의 행태 자체를 그대로 기록하는 작업이다. 어떠한 물음을 던지지도 않고 분석도 하지 않는다. 감독은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그렇다면 적을 왜 기록하는가. 혹은 적의 물음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영화에서 나이 지긋한 혐오세력은 종종 “너는 애미, 애비도 없냐”고 소리친다. 물리적 충돌의 순간에 유독 이 불편한 외침은 선명하게 다가온다. 과거를 살펴보면서 현재를 되새김하는 것은 중요하다. 끝없이 뿌리를 요구하는 그들에게 감독은 70대 레즈비언의 목소리로 응답한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 역사에서 자기 존재의 계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적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동지를 공고히 한다.




본 글은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기술되었다. 그는 정치에 관해 명쾌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말한다. 정치란 적과 동지의 구분이다. 바로 이것이 정치에서 근본적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상계동 올림픽>, <낮은 목소리>, <경계도시>, <불온한 당신> 각 영화에서 ‘적과 동지의 구분’은 어떻게 이뤄지며, 영화는 어떤 정치성을 가지는지 궁금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여러 질문을 던졌다. 감독은 동지를 확인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사적인 장면은 적과 동지의 구분에서 결정적인 장면인가. 영화에서 감독과 대상 간의 거리 두기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며, 이는 정치성과 어떤 연관을 맺는가. 감독과 대상이 맺는 관계에서 ‘적과 동지’는 새로이 설정되기도 하는가. 결론을 대신해서 앞으로의 과제를 적어보려 한다. 네 편의 영화 모두 실제 감독과 대상이 관계를 맺으며 어떤 정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편집 영화(compilation film)에서 정치성의 문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봐도 좋을 것이다. 나아가서 단지 영화 내에서 이뤄지는 정치성 분석을 넘어서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스탠스를 설정하는지 알아보고 싶다. 영화의 정치성이 어떻게 표현되어 사람들에게 수용되는지 고찰하는 건 추후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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