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소녀의 전쟁 영화 <들꽃> 인디토크(GV) 기록
일시: 2015년 11월 5일(목) 오후 7시 30분
참석: 박석영 감독 | 배우 정하담, 권은수, 오창경
진행: 전계수 감독 (<러브픽션>, <삼거리극장> 연출)
*관객기자단 [인디즈] 추병진 님의 글입니다.
<들꽃>은 세 소녀와 그들을 둘러싼 참혹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추운 겨울에 찍은 이 영화는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우리의 관심 밖에 벗어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낸다. 오랜 기간 동안 개봉을 기다려온 감독과 배우들의 염원이 이루어진 덕분인지 마침내 <들꽃>은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고되고 힘들었던 촬영 현장의 기억들을 하나 둘씩 털어놓으며 <들꽃>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계수 감독(이하 전): 저는 이 영화를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서 두 번째로 보았습니다. 작년과 비교해서 영화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그 사이에 음악이나 사운드의 활용, 화면 등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충무로에는 감독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시나리오만 쓰고 있어도 감독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죠. 엄격하게 말하면, 영화를 개봉해야 감독이라고 불립니다. 오늘 진정으로 감독님이 되시는 날인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박석영 감독(이하 박):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전계수 감독님은 제가 아무것도 아닌 시절에 저를 데리고 시나리오를 함께 작업하시면서 저를 알아봐주신 유일한 분입니다. 제가 부족하게 찍은 영화이지만 인디토크를 부탁드릴 수 있어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영광입니다.
전: 정하담 배우님은 이 영화에서 연기를 처음 해보셨죠?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이렇게 개봉까지 하게 되었는데 기분이 어떤가요?
정하담 배우(이하 정): 사실 <들꽃>을 찍은 지 되게 오래됐어요. 제가 스무 살 때 오디션을 보았고, 스물한 살 겨울에 촬영하고, 이제 몇 달 후면 스물 셋이 되니까 꽤 오래 전에 찍은 영화예요. 개봉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제 마음 속에 <들꽃>이 추억으로 남게 되었을 때 이렇게 개봉을 하고 다시 볼 수 있어서 느낌이 새로워요. 그때 생각도 나고 좋아요. 약간 잊혔을 때 개봉을 해서 그런지 선물을 받은 느낌도 들어요. 여기에 온 것도 그렇고, 최근에는 씨네 21에서 인터뷰를 했거든요. 모두 다 선물인 것 같은 느낌이고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전: 권은수 배우님은 이 작품이 첫 번째 영화는 아니고 저와 함께 했던 단편영화도 개봉했었고, 충무로 상업영화에도 많이 출연하셨으니 거의 베테랑이죠. 하지만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가 개봉하는 것은 처음인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권은수 배우(이하 권): 저도 이 영화가 언제 개봉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개봉을 하고 관객 분들과 만나게 되어서 좋습니다. 이제 두세 달만 지나면 2년이 되는 건데, 지금 이렇게 무대 인사나 시사회를 하니까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했던 순간들이 잘 그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도 반가운 느낌이에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영화가 극장에 걸리게 되어 저에게도 의미가 깊은 작품입니다.
전: 최근에 범아시아적 작품 <찡찡 막막>의 태국 개봉을 앞둔 오창경 배우님은 연달아 경사가 겹쳤는데, 기분이 어떻습니까?
오창경 배우(이하 오): 정말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웃음) 앞서 배우님들이 2년 정도 됐다고 하시니까 와 정말 그렇게 됐나, 싶은데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정말 빠르구나 싶어요. 저는 바로 어저께 같거든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무대 앞에서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서 저도 굉장히 기쁘고 재밌습니다.
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들꽃>이 작년과는 다른 느낌이에요. 독립 장편영화에서 많이 다루어진 소재를 가지고 어떤 비전을 보여주기보다는 눈을 부릅뜨고 기술하는 정직한 영화, 그러나 그렇게 인상적이지 못했던 영화라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느낌이 달랐거든요. 비전도 보이고 시대의 공기도 굉장히 잘 담겨있는 것 같아요. 부산국제영화제 출품 이후 많이 달라진 건가요?
박: 엊그저께도 그런 말을 들었는데요, 달라진 게 없어요. 전혀 없어요.
전: 음악도 똑같나요?
박: 돈이 없어서 뭔가를 더 할 수 없었어요. 전계수 감독님의 마음이 달라진 것은 아닌가 싶네요.(웃음) 그런데 정하담 배우님도 저한테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전: 정하담 배우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정: 최근에 특별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오랜만에 봤어요. 그런데 예전이랑 너무 다르고 더 좋아졌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편집을 다시 하셨는지 여쭤봤는데, 전혀 안했다고 하셔서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저도 정말로 안 믿겨질 만큼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전: 그렇다면 이 작품이 1년 동안 어떤 아우라가 생긴 건가요?(웃음) 확실히 영화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 대해서 약간 알고 있긴 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어디까지가 사전에 약속된 것이고 어디까지가 현장성을 살린 것인지, 또 그 조율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혹은 시나리오나 대사 중에서 촬영 전에 쓰인 것과 편집에 담긴 것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나요?
박: 디테일하게는 차이가 매우 많죠. 구조적으로도 차이가 있는 지점들이 있고요. 처음 찍을 때부터 이것은 전쟁 영화라는 생각을 했고, 전쟁의 어떤 순간을 목격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해서 시작부터 쭉 순서대로 간 것이었어요. 예를 들어, 은수 씨가 누군가를 따라가고 아이들을 데려가는 장면들이 있을 때 매우 디테일하게 대사를 주기보다는, 이 상황에 제가 납득이 되고 배우들에게도 제가 느끼는 정도의 리얼리티가 나타난다고 느낄 때 찍었어요. 그리고나서 그 다음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대본은 다 있었어요. 하지만 이 연기가 내가 짜놓은 계획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뒤에 있는 플랜을 지우고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2, 3회차 부터는 매일매일 다음날 찍어야할 것을 새로 찾아가는 과정이 되었어요. 하지만 근본적인 골격이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교차성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한 것이긴 하죠. 이런 방식을 통해서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연기의 진실함, 또는 진짜라고 느껴지는 것을 매순간 찾아내야 한다는 것. 이런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매일매일 찍었던 것 같아요.
전: 제가 보기에도 이런 그림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 같지는 않고 하다 보니 이렇게 나온 것 같은데, 그래서 장점을 발휘하는 영화들이 있죠. 그런가하면 박찬욱 감독이나 스탠리 큐브릭 감독처럼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는 상태에서 육체를 입히는 과정이 촬영의 대부분인 감독님들도 계시죠. <들꽃>의 이러한 방식은 굉장히 위험이 많고 실패할 가능성이 큰데, 저는 상당히 성공적인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권은수 배우님은 인물을 해석하고 사전에 이런 대사를 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부분과 현장에서 대사가 바뀌면서 새롭게 추가되거나 바뀐 부분, 이 둘 중에 어느 쪽 비중이 더 컸나요?
권: 제가 기억한 것이 맞다면 현장에서 바뀐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인물에 대한 구축은 다들 정확하게 있었는데, 상황이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일종의 상황극 같다는 느낌이 좀 들었어요.
전: 그럼 그 대사들은 정말 즉흥적인 것이었나요? 상황을 던져놓고 나도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뛰어든 것인지, 아니면 이런 식의 대사를 주고받기로 정한 것이었나요?
권: 시나리오 자체의 정말 중요한 대사들은 그대로 했던 편인데, 그 외에는 그냥 즉흥적으로 나왔던 것 같아요.
전: 관객 여러분들도 똑같이 느끼셨을 지도 모르는데, 감독이 배우들을 어떤 상황에 던져놓고 지켜본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동선을 긋고 대사의 합을 맞추기보다는, 좀 잔인한 방식이긴 하지만 프레임 안에 배우를 밀어놓는 것. 그러다보니 정확한 프레이밍이 안 되죠. 배우를 따라가는 카메라가 구도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이것이 <들꽃>의 독특한 미학 중의 하나라는 생각도 들고, 상황에 배우를 던져놓고 움직임을 보겠다는 연출 태도가 보이는데 그래서 생생하게 빛나는 측면도 많았던 것 같아요. 이런 느낌의 연장선에서 정하담 배우님이 그런 독보적인 캐릭터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 연기를 처음 하는 배우치고 대단한 직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어떤 생각으로 하게 되었나요?
정: 저는 오디션도 다섯 번 정도 더 보고 이 영화에 캐스팅이 됐어요. 다른 언니들은 이미 캐스팅 되어있었고 제가 제일 나중에 캐스팅됐어요. 제가 경력이 하나도 없고 대학도 연기과를 나온 것이 아닌데 캐스팅이 된 것은 정말 감사했어요. 그런데 진짜로 붙고 나니까 민폐를 끼칠 것 같아서 두렵기 시작했어요. 불안감도 심했어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계속 여쭤보고 제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은 다 했던 것 같아요. 그 불안감 때문에. 폐를 끼칠까봐 열심히 해서 그런지 오히려 촬영에 들어갔을 때에는 괜찮았어요.
전: 오창경 배우와 태성 역을 한 강봉성 배우 둘의 멜로드라마는 되게 안정되어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하담, 조수향, 권은수 배우들의 경우는, 정하담 양이 가장 비전형적으로 연기를 하지만 나머지 두 배우들도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상대에 대한 어떤 리액션을 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연기를 보여주었거든요. 그게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 궁금했어요.
정: 그런 생각을 많이 하긴 했어요. 준비하는 기간이 매우 길었기 때문에. 그리고 엔딩크레딧에 제 이름이 각색으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제가 실제로 각색을 한 것이 아니라 감독님한테 많은 걸 물어보고 많이 들었어요. 감독님께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대본을 쓰던 시기였는데 감사하게도 그때 제가 했던 역할을 생각하셨는지 제 이름을 올려주신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되게 준비를 많이 했어요. 짐승 같은 아이, 일반적으로 내는 소리가 다른 아이. 그리고 말이 없고 불안한 캐릭터를 많이 상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목소리를 내고, 어떤 식으로 말을 할까’ 이런 생각을 계속 하긴 했습니다.
전: 감독님께 한 가지 더 질문해 볼게요. 언론에서는 보통 감독들이 배우들한테 연기 지도한다는 말을 쓰는데, 그런 경우는 별로 없거든요. 감독이 배우의 연기를 지도할 수는 없어요. 완전히 학생을 데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배우를 지켜보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지만 분명 디렉션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가장 적합한 연기가 되도록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세 소녀의 연기의 합을 맞출 때 특별히 신경 썼던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박: 제가 연기를 보는 눈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저 스스로도 연기를 매우 못하고요. 사실 (전계수 감독을 가리키며) 저희 둘도 이 영화에 잠시 연기를 했는데 다 잘라버렸어요. 연기에 대해서 잘 안다고 정말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단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배우들의 가진 색깔, 특징, 장점, 결핍 같은 것들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근본적으로 이 세 명의 여자 아이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정하담이라는 이런 비전형적인 인간이 끼어 들어왔을 때 이들의 앙상블은 분명히 깨지고 흔들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각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있거든요. 이것이 현장 안에서 날 것처럼 느껴진 이유는 실제로 배우들이 자기 역할에 매우 집중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것을 완벽히 믿었어요. 대부분의 장면들은 원테이크로 진행됐어요. 길이가 길어서 좀 잘라낸 것이지 원래 이 영화는 2시간 50분짜리 영화였어요. 그냥 원테이크로 쭉 볼 수 있는 훨씬 더 연극적인 형태? 어떤 호흡들을 나중에 만든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 원테이크를 다시 돌려봤을 때 배우들이 각자 진짜로 열심히 했구나 싶어서 정말 감사했어요. 원래 다 자질이 있는 특별한 배우들이었어요. 저는 보는 것 자체가 되게 기쁘고, 두 번 찍을 필요도 없다고 느껴서 두 번, 세 번 찍으면 그냥 계속 다음 장면을 찍었어요. 정말 아이들의 과정을 목격하는 것처럼 끝까지 간 것 같아요. 저한테는 너무나 큰 행운이었죠.
전: 이 영화가 작년보다 좋아졌다고 생각한 이유는 멜로드라마들의 라인들이 잘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몇 가지 라인들이 있는데 은수와 수향의 멜로드라마가 있고, 수향과 하담의 멜로드라마가 있고, 그리고 제가 남자라서 그런지 이 소녀들을 위태롭고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보기도 하지만 삼촌과 태성의 멜로드라마가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태성의 눈빛과 삼촌의 눈빛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것이 착취하고, 착취 받는 관계만이 아니라 서로를 갈구하는 눈빛처럼 느껴졌는데, 실제로 그런 눈빛으로 연기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오: 제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한번 들었고 오늘로 두 번째인데 감독님이 보신 것이 맞습니다. 박석영 감독님과 얘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태성이는 저의 애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몸으로 부딪치는 것들도 그런 감정들의 표현인 것이고. 그런데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대사는 없죠. 사랑하는 느낌으로 연기를 좀 했어요. 그런데 그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어떻게 보면 그것을 인정하기 조금 불편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많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태성이는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이죠. 저는 그 친구를 어떤 형태로 잡아놓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이고. 그것이 맞습니다.
관객: 아까 말씀해주셨다시피 이 소재를 바탕으로 한 독립영화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도 이것을 선택하고, 또 시종일관 어두운 톤으로 이 이야기를 만드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야구장에서 태성이 떨어뜨린 휴대폰을 주우러가는 장면이 유일한 코미디인 것 같은데, 굳이 이 장면을 넣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박: 뒷 질문부터 대답을 하면, 저한테는 태성이라는 캐릭터가 애 같은 느낌이에요. 잘생기기도 하고 힘센 척도 하지만, 이 녀석이 조금 없어 보여야 사랑할만한 구석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갑자기 만든 장면이긴 해요. 또 다른 예를 들면 하담이한테 계속 밀려나는 장면들. 정작 힘을 쓸 때에는 쓰지 못하고 소리나 지르고 있는 그 녀석이 제 모습이었던 것 같기도 했어요. “우와아” 소리 지르기도 하지만 여자 앞에서는 이야기도 잘 못하는 이런 청춘의 모습이 있지는 않을까 싶었어요. 또 저는 가출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찡하게 울고 소주마시고 잊어버리는 정도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홍대 놀이터에서 밤에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아이가 많은 사람들이 흥청망청하고 있는 놀이터에서 빈병을 던지고 있더라고요. 실제로 권은수 배우님이 던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겠죠. 아무런 표정도 없이 던지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더니 그 다음부터는 병을 갖다 주고 던져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그걸 던지더라고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의 “한 병 더, 한 병 더”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결국 그 여자는 아무런 감정 없이 던지다가 그냥 가버렸어요. 그때 스릴러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그 후, 친구 중에 YMCA에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자원봉사 하는 곳에 가봤어요. 그리고 한 6개월 정도 아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됐어요. 한국의 가출 청소년 영화가 얼마나 많이 있고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찍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할 정도의 영화 지식은 없고, 그런 것을 생각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전: 6개월 정도 청소년재활센터에서 자원봉사하면서 만난 아이들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도움이 많이 됐나요?
박: 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가 만난 여러 명들의 이야기 혹은 그들의 과거가 연결되어 있기는 해요. 삼촌에 대한 이슈나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도 그곳의 선생님들한테 들었죠. 물론 현실은 이것보다 훨씬 끔찍하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에요. 1년에 2, 3천명의 아이들이 나오니까요. 만 명이 나와서 7천명이 돌아가고, 3천명은 여전히 거리에 남고, 그 중에 많아야 2, 3백 명의 아이들이 사회복지의 혜택을 받는 정도? 한국 사회가 아이들을 그 정도로 버려두고 있는지 몰랐어요. 아이들은 훨씬 심한 일들을 당하거나 이제는 자기들끼리 심한 일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하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가진 인간적인 품격까지 떨어져 보이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저는 영화를 시작했던 것이고. 그런 면에서 팩트랑은 조금 상관없는 감상적인 리얼리티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극적인 구조를 짜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관객: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는데, 카메라가 정말 많이 흔들리더라고요. 핸드헬드로 찍은 수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이 영화는 유난히 심한 것 같았어요. 배우들의 얼굴도 굉장히 타이트하게 찍히고 말이죠.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카메라가 인물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면서 배우들의 전체적인 행동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감독님께서는 이러한 흐름을 의도적으로 구성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박: 전쟁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은 전쟁 상황을 겪고 있죠. 아이들이 만나게 되는 사고들은 폭탄 같은 것들이죠. 은수가 방을 구했는데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죠. 내가 모르는 애들을 따라가면서 카메라가 뛰어 들어가는 듯한 입장이었어요. 그러다가 전쟁의 폭탄을 목격하고 있는 카메라도 조금 쉬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내면을 보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이들의 모습이 내밀하게 보이는 것보다 참상을 그리다가 아이들이 눈빛이 궁금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질문하신 것처럼 일부러 그렇게 짜고 만들었던 것은 아니에요. 뒤로 갈수록 아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맨 뒤에 가면서는 도덕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수향이가 막 두들기면서 울잖아요? 저는 그때 촬영감독한테 딱 한 가지 원칙을 얘기했어요. 제 입장에서는 이것이 영화를 관통하는 원칙이었어요. “인간으로서 저 장면을 클로즈업을 할 수 있으면 하세요. 마음이 다가갈 수 있는 예의의 거리만큼만 거리를 지킵시다.” 그래서 거기까지만 다가간 것이죠. 더 가까이 다가가서 눈물 떨어지는 것들을 담아야 하나, 라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원칙을 따랐던 것 같아요. 오히려 아이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때에는 클로즈업을 대놓고 찍었어요. 예를 들어, 수향이가 딱 나타났을 때 눈치를 보며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 그럴 땐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서 찍었어요. 하지만 매우 진실하다고 느끼는 어떤 순간에는 봐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앞에서 울고 있으면 때로는 뒤에서 지켜봐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이런 것들을 촬영의 원칙으로 한 것뿐이지, 뒤로 갈수록 점점 느려지거나 부드러워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태도는 ‘어떤 것을 찍을 것인가, 어디까지 다가갈 것인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라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박석영 감독은 조수향, 정하담, 권은수 배우들의 앙상블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그들이 연기하는 세 명의 소녀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려고 한다. 관객에게는 이 영화 속에 드러나는 사회의 냉담함과 그 속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들이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거리의 들꽃들이 건강하게 피어날 사회가 오기 전까지, 박석영 감독은 전쟁 영화 같은 일련의 작품들을 계속 만들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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