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낯선 나라다] About Movie
1. 역사 History
80년대 중반, 군부정권 하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높았던 시기, 우리는 흔히 그 시기를 정치적 암흑기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 강의실보다 가두가 훨씬 더 친근했던 이들에게 80년대는 ‘원죄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이후, 이들은 다시 ‘삼팔육 세대’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며 정치적 주체로 부상했고, 이제 80년대는 신화화된 공간으로 남아 유령처럼 2000년대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류의 다큐멘터리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이다. 우리는 마치 무언가 이 역사를 건드려선 안 되거나 혹은 전부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정말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인가? 더 이상 과거란 유효하지 않은 질문인가? 혹은 이 역사는 고정불변의 실체일 뿐인가? 오늘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죽음을 다시금 불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과거란, 역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 다큐 Documentary
현재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것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영상을 담을 수도 없고, 기록 문헌이나 영상도 찾기 어렵고 무엇보다 지금 왜 이 영화를 찍고 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는 자기 질문과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 2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된 이 영화는 두 열사와 두 열사의 죽음이 뜻하는 현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과거의 사건 재현이나 영상, 문서 기록에 의존하지 않는다. 영화는 두 열사의 죽음이 가져온 정치적 의미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는다. 대신 두 열사와 함께 그 날을 보냈던 사람들의 기억을 재구성해내고, 그로부터 해답을 구하려 한다. 이를 위해 영화는 집요하다 싶을 만큼의 인터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면서 인물의 미세한 변화와 정지의 순간을 잡아낸다. 이러한 순간의 포착이야말로 과거를 생생하게 만들어내는 요소이며, 이로 인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파격적인 형식을 선보인다.
3. 치유 Healing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모두에게 치유의 과정이 된다. 감독은 처음부터 인터뷰이들에게 그 날의 사건 정황을 최대한 정확하게 기억해주기를 요구했다. 이를 위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 3일동안의 기록을 메모해달라고도 요청했다. 잊혀진 기억을 다시 복원해내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질문받는 것, 이 영화는 이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치유 (불)가능성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치유의 (불)가능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영화적 작업 혹은 예술 작업은 어떠한 재앙과 상처 그리고 치유의 (불)가능한 과정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김응수 감독의 다큐멘터리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그렇다. 이 다큐엔 한국의 1980년대와 오늘이 있다. 1986년 분신했던 김세진과 이재호 기념 사업회와 함께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의 갖가지 영상자료를 보여주고 그에 대한 부산한 해설을 곁들이는 대신, 당시 그들과 열정을 함께 했던 소수의 사람들과 이재호의 아버지 그리고 감독 자신에 대한 인터뷰만으로 이루어진다. 카메라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기 전 푸른 새벽녘 나무들이 늘어선 길로 서서히 트래킹을 해나가고 대화의 시작 부분을 들려주는데, 감독은 꼼꼼하고 단호하게 살아남은 자의 낮은 증언을 듣고 기억과 외상(트라우마)을 묻는다. 풀 숏과 클로즈업으로 이뤄진 인터뷰 영상은 지루하다 싶을 만큼 이들의 말과 작은 반응을 잡아낸다. 민족자주 운동의 기폭제가 됐던 그 사건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사건’이라기보다는 낯선 과거다. 이 낯선 과거, 화석화된 공간을 어떻게 역사화 하며 또 당대의 일상 안으로 불러올 것인가. 영화는 고통스러운 이 과정을 숨죽이며 만들어간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지닌 미덕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과거를 어떻게든 기억해 달라고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는 데 있다. 설령 과거에 대한 진실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결코 발굴되어 폭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증언자들의 느리고 담담한 고백이 이루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스터리를 감춘 듯한 풍경 속에서 힘들게 과거의 흔적들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과거라는 것의 이국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야말로 이 다큐멘터리의 낯설고 과감한 형식을 정당화한다."
– 유운성(영화평론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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