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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2차 송환〉 인디토크 기록: 여전히, 희망은 필요하다

by indiespace_한솔 2022. 10. 25.

여전히, 희망은 필요하다

 〈2차 송환〉   인디토크 기록

 

 

일시 10월 15(토오후 2시 20분상영 후

진행 김소희 평론가

참석 김동원 감독┃민병래 작가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진하 님의 글입니다.

 

 

러닝타임이 끝나도 인물의 삶은 계속된다.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다큐멘터리에서는 특히나 이 사실이 차갑게 느껴질 때도 있다. 비전향 장기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송환2004년 개봉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2022, '여전히' 송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2차 송환1차 송환 당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향했다는 이유로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장기수들의 이야기다.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고, 남북 정상이 만나 손을 맞잡고, 또 다시 회담이 결렬되는 동안 계속해서 '형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변함없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새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변화하며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어 왔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에게 닿아 이어진 이들의 인생과 꿈, 그리고 소원을 함께 전한다.

 

 

김소희 평론가(이하 김소희): 김동원 감독님과 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쓰신 민병래 작가님, 두 분 모시고 인디토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감독님부터 관객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동원 감독(이하 김동원): 긴 영화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게 됐네요.

 

민병래 작가(이하 민병래): 요즘 남북 간의 정세가 어렵고 복잡한 양상으로 가는 상황인 것 같아요. 통일이라는 말이 굉장히 먼 얘기 같고,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냐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어떻게 남북이 하나가 될 건가를 고민하는 진지한 모습이 필요하고,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의미 있게 때맞춰 개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소희: 잠깐 소개를 드리면, 2차 송환2004년에 송환을 만드신 김동원 감독님이 여전히 강제 전향으로 인해서 송환되지 못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담으신 작품이고요. 송환에선 조창손 선생님이 주인공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김영식 선생님이 주인공입니다. 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시는 민병래 작가님께서 2020년 이후 장기수 선생님들을 인터뷰한 책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작가님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먼저 두 분 작업의 출발점과 계기에 관한 이야기로 좀 시작하고 싶은데요. 2차 송환의 경우 1차 송환 이후에 여전히 송환 운동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 같아요. 영화 초반에는 이전 작품의 조연출이었던 공은주 감독님에게 연출을 맡기는 방식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직접 연출을 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려고 하셨나요?

 

김동원: 공은주 감독이 워낙 선생님들하고 관계를 잘 만들어 놨어요. 본인도 하고 싶어 했고, 또 보통 조연출을 한 다음에 연출을 하게 되는데, 당시 가제였던 송환2를 공은주 감독이 잘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제가 지치기도 했고 떨어져 있고 싶기도 했고, 그랬습니다.

 

김소희: 영화 속에서 감독님의 가족 이야기가 한 축을 담당하잖아요. 이 이야기를 장기수 선생님들의 이야기와 함께 엮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시게 된 시점은 언제일지 궁금합니다.

 

김동원: 송환에 이미 아버지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엮을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넣을까 말까 생각하다 편집 중에 결정이 됐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2016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제 누님이 이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얘기를 송환에다가 넣을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편집할 때 공은주 감독이 찍은 전반부와 제가 현장에 있었던 후반부의 이야기를 하나의 시선으로 꿰어야 했거든요. 근데 전반부에서 제 시선이 들어가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 얘기를 전반부에 놓고 후반부에 어머니 얘기를 하면은 조금 일관성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소희: 인터뷰에서 공동 연출도 가능했을 거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는데, 공동 연출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신 시점은 언제인가요?

 

김동원: 공은주 감독한테 연락해서 마무리를 같이 짓자고 제안을 했는데 공은주 감독이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거절했어요. 영상 제작에 감이 떨어져서 못할 것 같다고. 그래서 어떻게 이걸 나의 시선으로 끌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부모님 이야기를 하고 그런 거죠.

 

<2차 송환> 스틸컷

 

김소희: 민병래 작가님께도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서문에 따르면 2020년에 후배 분께서 강담 선생님의 사연을 듣고 인터뷰를 결심했다고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생각보다 출발이 최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떤 사연인지 궁금해지더라고요.

 

민병래: 관객분들께서는 제 책이 생소하실 텐데. 저는 송환을 보고 굉장히 감명을 받았었어요. 우리나라 가족 중에서 아마 한국전쟁의 상처, 분단의 비극 같은 게 스며들어 있지 않은 가정은 거의 없을 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고향이 강원도 갑천이라고 하는 아주 외진 곳인데, 어머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 초가집마다 미군에 의해서 기총 소사를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거죠. 거기는 전쟁터도 아니었고 국군이 주둔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민간에까지 기총 소사를 했대요. 그때 아버님이 돌아가신 거죠. 그래서 어머님이 재혼을 하시게 됐고, 집안에서는 이복형제들 간의 갈등이랄지 긴장이 항상 있었어요. 그것을 얘기할 수 없는 금기 같은 것도 있었고요. 감독님이 송환에서 얘기하고자 하신 바와 제 가족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픔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 가족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송환을 봤던 강렬한 기억도 있었던 데다 2020년에 출연하셨던 강담 선생님이 북으로 돌아가시려고 협의 이혼을 하시잖아요. 또 그분이 폐암 4기로 요양원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죠. 한동안 잊고 있었다가 '아직도 송환되지 않은 분들이 있어?' 하고 강렬하게 환기가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송환되지 않은 분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나마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해서, 2년 동안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김동원: 참고로 말씀드리면 민 작가님한테 책 쓰는 걸 권하신 분이 강담 선생의 수양딸, 영화 속에서 장례식 때 사과며 용돈 챙겨주시던 선생님 어떻게 잊겠습니까이런 조문을 하셨던 김현수 후원 회장이에요.

 

김소희: 그분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민병래: 양심수후원회 회원이었던 오병인이라는 분이 요양원에 가서 강담 선생님을 돌봤다는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렸고, 그 글을 보고서 연락을 하게 되었죠. 전후 과정을 듣고 그럼 한번 기록으로 남겨보겠다.

 

김소희: 〈송환은 장기수 선생님들을 우연히 만나고 카메라로 담게 되면서 만들게 된 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2차 송환의 경우에는 계기를 끝까지 찾고 있는 것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 작품과 달랐던 접근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김동원: 계기라는 걸 행운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송환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90년대 초부터 찍었던 영상들이 아무 쓸모없이 그냥 버려졌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마침 2000년에 송환이 이루어지고 송환이라는 작품도 마칠 수 있게 되어서 선생님들한테도 큰 행운이었고 저한테도 큰 행운이었어요. 반면 이번 2차 송환은 그런 계기가 저한테도 없었고 선생님들한테도 없었고. 끝낼 계기를 갖지 못한 채 작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고생을 좀 많이 했어요. 사실 문재인 대통령 때 송환이 될 거라는 기대가 컸고 그렇게 끝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었거든요. 근데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그게 무산되니까 끝을 어떻게 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29년 기념식 장면에서 보셨듯이 종합추진위원회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저도 그렇고요. 그렇게 고민하던 중 202192일 송환 21주기 기념일에 김영식 선생님 혼자서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셨어요. 뭐 별다른 의미를 못 두고 습관적으로 찍었는데, 찍으면서 보니까 ', 이게 마지막 장면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마지막에 두고서 앞에 얘기들을 정리하게 됐죠. 이게 계기라면 계기인 것 같아요.

 

김소희: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로 조금 넘어가 보려고 하는데, 작가님께서 선생님들을 어떤 방식으로 인터뷰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민병래: 인터뷰를 할 때 기억도 좀 불분명하시고, 검증도 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좀 어려웠고요. 그다음에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하는 데 있어서, 이분들이 자기 일상을 행복하게 추억하기보다는 고난의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무게감이 컸던 것 같아요. 식민지 경험, 내전 경험, 징역살이 등의 경험이 다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모아서 쓰다 보니까, 이것이 어떤 스테레오 타입처럼 보이면 안 좋잖아요. 그래서 열한 명 선생님의 삶의 특징적인 장면들을 어떤 열쇠 말로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아요. 가능하면 열한 명의 삶이 각각 다른 개성이 있으면서 다 모았을 때 전체적인 울림이 있는 글을 쓰고자 했는데, 돌이켜보면 미흡했던 것 같아서 자책 중입니다.

 

김동원: 사실 송환에 비해서 2차 송환는 등장인물이 제한돼 있죠. 처음부터 투톱으로 안학섭 선생님과 김영식 선생님 두 분을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생님들이 주로 지방에 많이 계시거든요. 서울에 계신 분들은 그래도 만나 뵙고 모임에서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러는데, 사실 2차 송환 희망자분들 중에서 얼굴조차 뵌 적 없는 분들도 있어요. 송환 관련 책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을 못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책이 나오고, 제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다른 선생님들의 얘기를 볼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약간 가벼워지는 것도 느꼈어요. 이 책이 있다는 게 참 든든한 느낌이었습니다.

 

 

김소희: 책이랑 같이 읽으니까 송환도 그렇지만 2차 송환은 인터뷰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인터뷰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까운 면도 있는 것 같은데, 묻고 답하는 방식의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으신 건지 그런 부분들도 궁금하더라고요.

 

김동원: 사실 김영식 선생님만 해도 3일에 걸쳐서 고향 얘기부터 전쟁 때 어떻게 싸웠는지까지 인터뷰를 했어요. 영화에 쓰려는 건 아니고 기본 조사 같은 거였는데. 선생님들이 카메라 없을 때는 말씀을 잘 하시다가도 카메라가 있으면 버릇처럼 하시는 말들이 있어요. 비분강개하시거나 우리 민족이~’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 인터뷰스러운 인터뷰를 따로 하지는 않으려고 했고요.(웃음) 영화적인 장면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했는데, 찍어두기는 했습니다.

 

김소희: 영화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다는 선생님들이 현재 어떤 삶을 살고 계신지, 오랜 시간 갇혀있다 나온 이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책을 읽으면서 또 다른 지점들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책에서는 선생님들이 어떻게 고문을 당하셨는지 같은 것도 굉장히 자세하게 알게 되었거든요. 보통 영화의 이미지가 더 자극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글 역시 적나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송환에서도 물고문이 정말 힘들었다 이런 말씀을 하시잖아요. 이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적나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쓰신 입장에서는 순화를 하신 결과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어떤 것을 넣고 뺄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셨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민병래: (선생님들이 겪었던 일을) 전향 공작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비전향 장기수라고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만 존재하잖아요. 어떤 나라에도 없는 제도였고, 그것이 본격적이고 대규모로 실시됐던 건 1973년 박정희가 법무부에 지침을 내려서 전향공작반을 만들게 된 이후입니다. 이것을 중앙정보부에서 주도하면서 대구, 대전 4개 교도소에 전담반이 편성되고 조직적으로 실시합니다. 저는 고문 얘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놀라웠던 것 중에 하나가, 일반 교도관들 조차도 고문에 직접 참여한단 말이에요. 물론 '떡봉'이라고 일반 죄수 중에서도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폭력을 행사했던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물고문이라든지 이런 게 결코 쉬운 게 아니거든요. 저항하는 사람을 제압해서 고문을 하는 게 쉽지 않은데 일반 교도관들조차도 고문의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요). 뿐만 아니라 당시에 납북 어부들이 돌아오면 간첩으로 몰고 가서 일반 경찰서에서도 고문을 많이 받았어요. 일반 경찰이나 교도관들이 어떻게 이렇게 고문을 배워서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사실은 이게 다 일제 경찰에서부터 비롯된 것들이죠. 선생님들 중에 양인찬 선생님이라고 계시는데, 이 분이 당한 고문은 이름도 생소해요. '헬리콥터 고문'이라고 온 몸을 묶어서 공중에 매달아서 빙빙 돌게 하고, 온 몸을 묶었으니까 피가 통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피부에 피가 솟아올랐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들으면서는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틀림없는 사실인 거잖아요. 이를 이겨내면서 자기 사상, 자기 양심 이런 것들을 지켜내려고 했던 노력이나 의지가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이 2차 송환이라는 영화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관객: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김영식 선생님께서 첫 번째 송환을 보시고 좀 냉정한 평가를 하셨다고 하셨는데 이번 다큐멘터리에는 어떤 평가를 주셨는지 궁금하고요. 두 번째 질문은 원래 제작 지원을 받지 않으시려고 하셨다고 했는데, 영화에 나온 내용 외에 또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김동원: 이번 영화는 대체로 좋아하셨어요. 특히 올 초에 기술 시사 때 오셔서 보고는 수고했다고 어깨도 쳐주시고 그러시더니. 5월에 전주에서 상영할 때 양희철 선생님이랑 박희성 선생님이랑 세 분이서 같이 보셨는데, 양희철 선생님이 뭔가 섭섭해하니까 영화를 좋아하는 강도를 많이 낮추셨어요.(웃음)

그리고 제가 제작 지원을 안 받는 이유는, 제작 지원 제도라는 게 2000년 중반 정도부터 시작된 건데요. 그때는 저도 받고 싶었어요. 뭔지 모르니까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고 받으려고 하기도 했는데. 2007년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학생이랑 같이 경쟁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지원을 안 하기도 했고, 부작용도 좀 있더라고요. 특히 다큐멘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데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가정을 하면서 써내려가는 게, 꾸며내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고. 제작비 규모도 부풀려서 써야 하고 경쟁도 해야 하고그래서 언젠가부터 저는 안 받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번에는 받았습니다. 전향을 한 거죠, 제가.(웃음)

 

<2차 송환> 스틸컷

 

김소희: 또 저는 '나 서술'에 관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송환2차 송환모두 감독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송환이 장기수 선생님을 바라보는 감독인 나에 가깝다면 2차 송환에서는 김영식 선생님 입장에 감독님의 시선이 병렬적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공은주 감독님이 계속 계셨다면 세 사람의 목소리 혹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함께 나오는 방식으로 연출되었을까도 궁금했습니다.

 

김동원: 글쎄요. 공은주 감독은 듣기로는 저처럼 실향민이라든가 집안에 큰 갈등이 있었다든가 이런 거는 없었던 것 같아요. 공은주 감독이 했다면 아마 객관적인 시선이었을 것 같고요. 뭔가 주관적인 시선을 넣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짐작이 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김소희: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 나왔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책에서도 선생님의 입장이 되셔서 ''라고 서술하신 부분과 3인칭으로 서술하신 부분이 함께 있는데 마지막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한 아쉬움도 표현을 하셨어요. 원래 어떤 방식으로 서술하고 싶으셨나요.

 

민병래: 일단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을 돌아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사상과 양심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이냐라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우리나라는 국가보안법을 엄중하게 집행하고 있고. 고무·찬양의 문제가 있고 그다음 이적 표현의 문제 이런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국가보안법상 사상과 생각을 처벌하는 게 없었어요. 1961년도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반공법을 만들어서 반공법 4조에 사상과 생각을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었고, 1981년도에 국가보안법을 통합하면서 반공법을 없애고 71, 3, 5항으로 가지고 왔죠. 그래서 사실은 송환과 관련해서 선생님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과 양심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이냐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글을 쓰면서 스스로 검열하게 되는 거죠. 내가 쓰는 것이 고무·찬양으로 해석되거나 동조로 해석되지 않을까,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어떤 피해를 겪지 않을까 하면서 검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쓰면서도 이런 부분이 개운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진짜로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쓰면서도 혼란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미묘하고 어려운 부분들은 작가의 표현으로 하기 보다는 선생님들의 표현으로 대체한달지. 그런 부분을 이야기 하고 싶었고요. 또 김동원 감독님의 2차 송환을 보면서 제 주장과 생각을 깊게 담아서 한 번 더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선생님들이 소박하지만 당당하다, 그리고 언젠가 통일이 되는 날이 오면 분단의 희생양이 아니라 통일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고 평가받지 않을까' 하는 감독의 당당한 목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저는 이런 부분에서 좀 주저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조심조심하면서 썼던 것들이 있어서, 다음에 제가 2차 송환에 대해 다시 쓰게 된다면 제 목소리와 생각을 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소희: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 주제로 극장 상영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해보고 싶어요. 2차 송환'푸른 영상' 30주년을 기념해서 온라인으로 먼저 상영되어서 집중을 받았어요. 송환도 엄청난 흥행을 성공한 작품이잖아요. 전작이 그런 반응을 얻었다면, 2차 송환에 대한 극장 반응은 비교적 조용한 편인 것 같아요. 개봉하고 관객분들을 만나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동원: 좀 아픈 질문인데요. 영화가 대외적으로 첫 상영된 게 전주국제영화제 때였어요. 그때 보면서 사실 알았어요. 이 영화는 개봉해도 안 될 영화구나. 요즘 시대 분위기가 다른 데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배급사랑 배급 회의를 하는데 목표 관객을 5만으로 잡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냥 5천만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5천을 채우기도 어렵게 돼서.(웃음) 아무튼 처음에도 말씀하셨지만 통일에 대한 언급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어요. 저도 전쟁 후에 태어났지만 분단 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분단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비정상적인 건지를 본능적으로 아는데, 갈수록 분단 자체가 너무 당연한 일상인 분위기. 그런 분위기에서 남북 갈등이 점점 고조되어가는데 뭣하러 통일하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 같고. 이제 2025년이면 분단 80년이잖아요. 분단이라는 게 이제 고착화된 게 아닌가. 정말 '통일'이라는 말이 없어져버리는 때가 올 수도 있겠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렇진 않겠지만. 저는 통일을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또 통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통일과 꿈에 대한 관심을 촉발해내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소희: 저도 같이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영화도 이런 방식으로 통일에 대해 반응을 할 관객을 기다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하면 반응을 더 끌어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같이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건 관객분들께도 질문을 드리고 싶은 부분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보고, 이 얘기를 함께 나눌 수 있을지는 관객분들에게 숙제로 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객: 송환을 봤을 때는 희망적이었는데, 2차 송환은 영화에 반복되는 실패가 계속 담겨 있어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혹시 지금도 선생님들을 카메라에 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보이지만, 국제 정세가 변화하거나 상황이 개선이 된다면 계속 촬영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김동원: 2차 송환의 속편을 만들 생각은 아직까지는 없어요. 근데 명절 때나 만남의 집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습관처럼 카메라를 들고 가긴 갑니다. 다만 속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고요. 그냥 그게 습관이 됐어요. 다음 작품은 송환에 관한 건 아니고, 다른 걸 좀 준비하고 있어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김소희: 시간 관계상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두 분의 인사 말씀, 혹은 당부 말씀 부탁드립니다.

 

민병래: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내년에 관동 대학살 100주년이 됩니다. 조선인 이주 노동자들이 192391일 관동 대지진이 나고 나서, 당시 임시정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6661명이 일본 관원과 자문단원에 의해서 참살된 것으로 나오는데 그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독립 이후 우리 정부조차 그것에 대한 진상을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죠. 배상과 사죄를 떠나서라도 진상조차 요구하지 못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동 대학살의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시민운동이 한국과 일본 내에서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결국 다큐멘터리나 쓰는 일이나, 거의 종교적인 마음으로 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와야 할 부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지금은 무겁지만 앞으로는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동원: 우리의 현대사 중에 아직도 묻혀있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지금 생존하신 분들 중에서도 아픈 얘기들을 품고 살아가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고요. 한편으로는 김영식 선생뿐만 아니라 얘기 하나라도 끄집어냈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사실 다른 나라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우리나라 감독들한테 너희는 참 얘기할 게 많아서 좋겠다, 다큐멘터리 하는 사람들한테 참 좋은 나라다 하면서 약간 비꼬듯이 얘기를 해요. 해결하지 않은 채로 그냥 지나가는 얘기들이 많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여러분 중에서 혹시 현대사나 이런 데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카메라를 들지 않으시더라도 많이 공부도 하시고 많이 안타까워하시고, 끝내 뭐 하나 정도로는 밝혀내시고 기록하시는 그런 일들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소희: 영화 말미에 2차 송환 희망자 리스트를 보여주시잖아요. 살아계신 분들뿐만 아니라 고인이 되신 분들의 이름도 보여주고 계신 것도 인상적이더라고요. 세상을 떠나셨다고 해도 여전히 2차 송환을 희망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이 들고요. 거기에서 희망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저는 들었습니다. 무거운 영화지만 희망차게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고요. 끝까지 자리 남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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