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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인디토크 기록: ‘와따시와 조센징데스’도, ‘아이엠 코리안’도 아닌 ‘조선사람’으로서

by indiespace_한솔 2022. 1. 10.

 

 

 '와따시와 조센징데스'도, '아이엠 코리안'도 아닌 '조선사람'으로서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인디토크 기록

 

일시 12 9() 오후 7

참석 김철민 감독│출연자 김창오, 유도선수 안창림

진행 김조광수 감독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예본 님의 글입니다

 

 

나무들이 앙상해지는 계절이 되었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마음속에 그 어느 때보다 푸르고 굳건한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조센징(ちょうせんじん)’, ‘From Korea’도 아닌 재일동포들, 바로 조선사람들이다. 하나됨의 의미를 진정으로 새기게 되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인디토크 기록을 전한다.

 

 

김조광수 감독(이하 김조광수): 안녕하세요. 저는 진행을 맡게 된 영화 만드는 김조광수입니다. 감독님부터 인사 부탁드립니다.

 

김철민 감독(이하 김철민): 반갑습니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를 연출한 김철민입니다. 오늘이 영화 첫 개봉날이고 첫 GV인데요.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안창림 선수 덕분인가요. 감사합니다.

 

안창림 선수(이하 안창림): 안녕하세요. 저는 조선학교 출신이자 유도 국가대표 안창림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연자 김창오(이하 김창오): 안녕하세요. 우에노 동물원의 판다 덕택에 민주와 통일 운동에 참여하게 된 김창오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김조광수: 우에노 동물원의 판다 덕분에 통일 운동하셨다고 하시는데 저도 대학 다닐 때 어떤 잘생긴 선배 보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가 운동을 하게 된 경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김창오 선생님 뵙고 너무 반가웠어요. 질문을 남겨주시는 동안에 제가 세 분께 질문을 드려볼게요. 감독님께 먼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2002년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재일동포 분들을 가까이서 만나고 그때부터 나는 조선사람입니다촬영을 시작하셨다고 영화에 나오잖아요. 2020년에 완성하신 거니까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작업을 하셨을 텐데, ‘이제 이 영화를 완성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어떤 순간에 들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완성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시점이 있으신가요?

 

김철민: 2002, 제가 24, 25살쯤이었는데 그때부터 이렇게 큰 그림을 가지고 시작한 건 절대 아니고요. 금강산에 기록자로 가게 되고, 그 뒤로도 재일교포 행사에 초청을 받거나 계속 만날 기회가 생겼어요. 만나다 보니 궁금한 게 생기고, 그러다 보니까 남아서 더 촬영도 하고.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기록하고 남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제가 전작을 2015년에 완성해서 오사카에서 상영했는데, 그때 재외동포 분들께 이 분들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고, 그동안 기록했던 과정에서 들었던 고민들, 생각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운이 좋아서 동포 분들을 만나게 되고 이 분들의 삶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재일동포 분들을) 모르는 분이 많잖아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작업이 길어져서 2020년에 완성하게 됐습니다.

 

김조광수: 그래도 2020년에 완성을 하겠다라고 생각하신 거잖아요. 2020년에 , 이쯤 되면 정리를 해서 완성할 수 있겠다’싶은 계기가 있었을까요?

 

김철민: 편집이 정말 어려웠어요. 복잡한 재외동포 사회와 다양한 분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계속 고심하고 안 풀리는 시간도 있었는데 출연하신 동포 분들이 도대체 영화 언제 나오냐, 나오긴 하는 거냐고 저에게 직접 물어보시기도 하고 누굴 통해서 물어보시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결심하고 2020년에는 반드시 완성하겠다는 각오로 작업을 한 것 같아요.

 

김조광수: 김창오 선생님이 나오신 장면을 보면서, ‘, 내 마음에도 분단이 있었구나이런 말씀 하신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사실 저도 남쪽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해가 갈수록 분단의 현실과 통일에 대한 생각이 옅어져 가는 느낌이 있었는데, 선생님을 통해서 그 생각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통일 운동을 하시게 된 계기가 판다 덕분이라고 하시긴 했지만, 어떤 마음으로 지금까지 계속하고 계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창오: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던 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작년 12월 오사카 상영회 때가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를 처음 본 날이었습니다. 김철민 감독님하고는 5년 전에 처음으로 만나서 여러 번 카메라 앞에서 얘기를 해왔는데, 진짜로 내가 이 영화에 정말 나오는가? 어느 정도 나오는가? 어떻게 나오는가? 그런 것들이 많이 궁금해서 봤어요.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런 생각들은 어디로 가버리고 영화에 몰두하면서 여러 번 눈물도 참으면서 봤습니다. 아주 많이 감동받았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가장 충격받았던 이야기가 9살짜리 남아 이야기였어요. 조선학교 3학년, 재특회(재일특권을용납하지않는시민모임, 일본의 우익단체)와 싸우겠다며 연필을 항상 뾰족하게 깎고 다니던 남자아이의 이야기요. 제게 손자가 3명 있는데 첫째가 그 아이와 같은 나이예요. 그런 내용을 보며 몹시 마음이 아팠고, 제 경험도 생각났습니다. 중학생 때 일본 지하철 화장실에 ‘조선놈들은 돌아가라라는 낙서를 봤어요. 그것도 저는 아주 무서웠고. 나는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한국으로 추방당하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인해 아주 무서웠습니다. 부모님께는 그 얘기를 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제 경우에야 지하철 화장실의 낙서예요. 하지만 대낮에, 학교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조선놈들 돌아가라는 말을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예요. 학교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렇게 느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제게 대한민국, 조국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거예요. 추방당해 가게 될까봐. 그런데 판다를 보러 간 날 재일한국청년동맹, 즉 한청에 들어가서 우리말 공부도 하고 역사 공부도 하고, 하면 할수록 조국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조국을 사랑하면 할수록 멀어져 가는 거예요. 정말 여기 오고 싶었는데 못 왔죠. 그때 평양을 가게 되었는데, 평양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고, 기쁜 마음은 없었어요. ‘내가 가고 싶었던 조국은 대한민국인데.’ 그때 처음으로 내 마음속에 분단의 벽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경험을 계기로 남쪽도 나의 조국이고, 북쪽도 나의 조국이고, 조선 민족 해방을 위해서 통일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스틸컷

 

김조광수: 김창오 선생님이 영화를 보신 소감을 말씀해주셔서 자연스럽게 안창림 선수도 영화를 언제 보셨는지, 보시고 어떤 감정을 느끼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안창림: 저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 봤고요. 저희 어머니께서 추천해주셔서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 나오신 동포 어머님이 제일 친한 친구의 어머니이신 데다가 교토의 많은 이야기가 나와서 친근감이 있었어요. 그리고 항상 한국에 와서 내가 왜 재일교포일까라는 생각을 하는 일이 정말 많았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간첩사건 같은 제가 몰랐던 이야기들도 있어서 더 깊게 재일교포에 대한 역사도 알게 되었어요. 굉장히 좋았습니다.

 

김조광수: 제가 오늘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다고 하니까 도대체 안창림 선수는 어떻게 오게 된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궁금해하시는 분들에게 감독님이 설명을 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김철민: 제가 안창림 선수의 어머님을 몇 번 뵈었어요. 취재도 했고 인터뷰도 했고. 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으시지만 어머님이 교토 복지센터를 맡고 계신데 항상 친절하게 맞아주시곤 하셨거든요. 예전부터 그분의 아들이 안창림 선수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응원하는 팬이기도 했어요. 어머니에게 안창림 선수를 한국에서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드렸는데 이미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셨다는 말씀을 듣고 재일조선인이자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가대표 유도선수와 함께 영화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때는 군 훈련소에 있어서 연락이 쉽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나오자마자 인터뷰도 해주시고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김조광수: 영화를 보면 ‘우리학교’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안창림 선수가 우리학교 출신 중 제일 유명하신 분이 아닐까 싶거든요. 영화에도 학교에 대한 소개가 잠깐 나오긴 하지만 우리학교 출신으로서 안창림 선수가 조금 더 해주실 수 있나요?

 

안창림: 그때 배운 것들이 지금 운동선수로서의 정신력, 정신적인 기반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선생님들이 엄하게 대해주시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맨날 싸우고 축구도 하고 그랬거든요. 인원수가 적은 학교다 보니까 다 가족처럼 느껴지는 사회였던 것 같아요.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들이 그때 알게 된 우리학교 친구들이고. 학교라기보다는 정말 가족이었어요.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운데 아무래도 재일교포라는 커뮤니티가 있고, 단결해서 같이 으쌰으쌰하는 공동체라는 점이 좋았어요. 많은 걸 배웠죠. 아무래도 재일교포를 이해하는 인식이 아직은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 제가 한국에 와서 운동선수로 성공한다면,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꼭 조선학교나 재일교포에 대한 의식을 개선하고 싶었어요. 그때까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유도로 인해서 사람들이 저를 알게 되고, 재일교포를 알게 된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 사명으로 여기고 조선학교에 대한 인식이나 재일교포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도 있어요. 얘기가 많이 길어졌는데 조선학교 정말 좋은 학교예요.

 

김조광수: 조선학교는 자연스럽게 부모님 때문에 다니게 되신 거예요?

 

안창림: 어머니를 통해서 조선학교에 가게 된 건 맞는데, 당연히 가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초등학교 때 우리학교로 진학했어요.

 

김조광수: 그러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우리학교에서 다니신 건가요?

 

안창림: 아니요.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중고등학교도 당연히 조선학교로 가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유도의 환경적인 부분을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일반 중학교에 다니는 게 좋으니까요. 중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다니다 유도 환경 때문에 일반 중학교로 옮겼는데, 조선학교에 다닐 때는 고등학교 때까지 조선학교를 다니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철민: 제가 안창림 선수 어머니께 듣기로는 안창림 선수가 어려서부터 유도를 엄청 하고 싶어 하셔서 부모님이 조선학교 가라고 하는데도 유도 때문에 일본 학교에 진학하신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안창림: . 맞아요.

 

김철민: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유도를 하고 싶으셨을까요.

 

안창림: 어릴 때부터 제가 한 번 하면 끝까지 하는 성격이었어요. 지금도 좀 그런 면이 있는데... 당연히 저희 가족들은 중학교도 조선학교에 갈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한국의 국가대표가 되려면 더 좋은 환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께 그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반대하시더라고요. 저희 아버지가 그건 말도 안 된다’면서 엄청나게 반대하셨거든요. 그래도 저는 그렇게 해야만 꼭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중학교 때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올림픽에서 메달 딸 거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 몸에도 그 생각이 익혀진 것 같아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스틸컷

 

김조광수: 오픈채팅방에도 질문을 많이 남겨주셨네요. 김창오 선생님께 질문이 몇 가지 있는데요. ‘김창오 선생님은 이제 한국은 자유롭게 들어오실 수 있나요?’라는 질문과 함께 그런데 판다를 보셨을 땐 귀여우셨나요?’ 두 가지 질문을 먼저 드려볼게요.

 

김창오: 제가 한국에 그토록 오고 싶었는데 못 온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어요. 그런데 오늘 마침 김대중 대통령께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기념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김대중 대통령이 운동을 그토록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한국에) 못 왔어요. 노무현 대통령 취임하신 2003919일에 처음으로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에 온 거예요. 민주인사로 초청받고 왔어요. 평양에서도 많이 울었지만, 그땐 열 배 백 배는 더 울었어요. 그렇게 왔는데 이후로 정권이 바뀌면서 다시 못 오게 된 거예요. 그렇지만 촛불 혁명의 힘으로 다시 이렇게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신 조국 대한민국의 동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조광수: 영화에도 나오지만 일본에서도 촛불 집회 열심히 참여하셨잖아요.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의 답은 아직 안 주신 것 같아요. ‘판다는 귀여웠나요?’

 

김창오: 판다는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웃음)

 

김조광수: 감독님께 질문 있는데요. 10년 가까이 촬영하시면서 영화를 제작하셨는데 생계유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웃음) 얼마나 어려웠을지 다 느끼시는 것 같아요.

 

김철민: 생계요? 좋은 분들 만나고 작업하다 보니까 또 길이 다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그래도 제작 지원도 좀 받았고요. 제가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는데요. 다큐창작소라는... 수입은 없어요.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 세월호의 진실이나 촛불에 대한 이야기들, 시사에 관해서 주로 올리고 있습니다. 그 채널도 와서 봐주시면 좋을 것 같고. 촬영 아르바이트 같은 생계 활동도 하고 영상 제작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김조광수: 독립영화의 삶은 고단하지만... 다큐창작소 검색하셔서 구독, 좋아요 눌러주시면 감독님께 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안창림 선수한테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조선학교 차별 철폐를 위해서 한국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주셨어요.

 

안창림: 일단 제가 느끼기에 차별도 있지만, 재일교포에 대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주시고, 포털사이트에 검색해 주신다던지 그렇게만 해주셔도 감사하고요. 조선학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몽당연필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사이트에 들어가 보시고 후원해주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김철민: 저도 방금 질문에 조금 덧붙이고 싶은데요. 개봉하기 전까지는 대관 상영이나 공동체 상영 등으로 영화를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주세요. 우리가 조선학교 및 재일교포 차별 문제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저는 재일교포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모르기 때문에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하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지만 재일조선인에게는 통일문제가 자신의 삶과 이어지는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리고 이 분들은 일본 식민지 지배로 인해서 일본에서 살게 되었고 지금까지 식민지 지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차별을 겪고 있는 거예요. 이 분들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남과 북을 모두 조국으로 생각하고 버리지 않으신 분들이라는 점이에요. 한국도 이 분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더 적극적으로 정부에서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 등에 대해 일본 정부에게 해결을 촉구하고 강하게 항의하는 행동이 필요할 것 같아요.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요구할 때 정부에서도 그런 활동을 할 것 같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관심 많이 가져주시면 좋겠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주변에 영화 소식도 전해주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김창오: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영화에도 나왔지만, 조선학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재일동포들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 일본 사회는 고교 무상 정책에서 정부가 앞장서서 차별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사람과 재일동포의 힘만으로는 이 차별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조국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제 생각났는데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고 선언문이 발표되었어요. 제8항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남과 북이 힘을 합쳐서 해외 동포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지금 남북 관계가 좋지 않지만, 남북 관계를 개선·발전시키고 조국 전부가 힘을 합쳐서 외교적으로 다가가야 이 차별이 없어집니다. 조국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스틸컷

 

김조광수: 조국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조국의 힘 안에는 조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힘이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잘 봤다’. ‘감동적인 영화 잘 봤다이런 얘기들은 정말 많이 올라오고 있으니까요, 감독님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어떤 분이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동포분이 인상 깊습니다. 영화 잘 봤고, 재일동포 분들의 여러 어려움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재일동포 분들은 현재 한반도의 두 국가체제를 부정하시는 건지, 어떤 인식을 가지고 계신 건지 궁금합니다.’라고 질문 주셨어요. 이 분은 아직 해결이 안 된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남북한이 아닌 조선사람이라고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것에 대해서 두 국가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건가, 하고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서 감독님과 김창오 선생님이 같이 풀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철민: 우선 재일조선인에 대한 개념은 저희 전단에 짧게 나와 있는데, 이 분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서 건너가신 분들이에요. 그 당시에는 남한도 없었고 북한도 없었고 조선이라는 나라뿐이었잖아요. 그때 일본으로 건너가신 분들의 후손들을 재일조선인이라고 부르는데 재일조선인을 부르는 명칭도 정말 다양해요. 재일교포, 재일동포... 그중에서도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이 그분들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의미로 사용한 거고요. 이 분들 중에는 한국 국적 취득자도 있고, 일본 국적 취득자도 있고, 조선적이라고 해서 분단되기 전 하나의 조선을 지향하는 분들도 있고요. 다양한 분들이 계세요. 이 분들이 국가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조국을 생각한다고 느꼈어요. 그런 마음으로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김조광수: 저도 〈우리학교〉라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굉장히 헷갈렸거든요. 김창오 선생님이 덧붙여주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김창오: 20006월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공동선언 발표될 당시 제가 깜짝 놀란 건 제2항목, 통일 방안에 대해서 합의가 되었다는 점이었어요. 거기까지 논의된 지 모르고 있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이 주장하는 국가연합 공동선언이 있으니까 이 방향으로 통일하자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경제, 내전을 지역 정부가 맡고 외교와 군사문제는 통일국가가 담당하는 게 보통의 연방 국가인데 남북은 서로 자본주의 제도하고 사회주의 제도라는 다른 제도를 택하고 있고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기로는 외교와 군사도 남북이 각각 따로 맡는 기간이 10, 20년은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면 분단국가 아니냐고 볼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국가 체제를 갖추려면 세 가지가 필요해요. 국호, 나라의 이름. 국기, 나라의 깃발. 국가, 나라의 노래. 그것들을 저는 평창올림픽 입장식에서 보았습니다. ‘통일기를 들고 이름은 ‘Korea’, 그리고 아리랑이 등장했어요. 여러 형태이지만 통일된 조국은 우리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동안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 된 민족, 하나 된 국가로 살아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김조광수: 네. 감사합니다. 다른 관객분이 또 질문을 주셨네요. ‘재일동포 1, 2세대 분들과 일본에서 나고 자란 3, 4세대는 여러 가지 신념 등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세대 간의 갈등이 있나요?’라고 물어보셨어요. 김창오 선생님하고 안창림 선수하고 세대가 다르시니까 다른 세대의 입장에 대해서도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안창림: 제가 3, 4세대 나이인데요. 1, 2세대 분들에 비하면 저희가 받은 차별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생각해요. 재외동포가 받았던 차별에 대한 이야기나 재외동포에 관한 역사는 확실히 조선학교에서 배웠어요. 초등학교 때임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를 어떻게든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3, 4세대이다 보니까 일본 분들과 친해질 계기도 많았어요. 차별의 역사를 배우는 동시에 일본인들과 친해지는 세대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김조광수: 그렇다면 3, 4세대 입장으로 봤을 때 1, 2세대 분들은 정말 우리가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시나요?

 

안창림: 많이 다르다기보다는, 차별이나 역사 같은 부분은 1, 2세대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하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일본 분들과도 친해지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새로워진 세대가 아닐까 생각해요.

 

김조광수: 그럼 1,2세대 입장에서 김창오 선생님 답변 들어보겠습니다.

 

김창오: 아까 안창림 선수가 말씀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도 우리학교 학생, 학부모, 선생님들은 정말 가족 같아요. 우리학교라는 환경에 포함된 사람들은 다 가족 같고 민족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세대 갈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학교를 다닐 수 있는 학생들은 극히 소수라는 점이에요. 대부분 일본학교 다니고, 일본이름을 쓰고, 제가 판다를 만나기 전처럼 살고 있어요. 근거도 없는 열등감. ‘조선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그런 심정을 안고 숨기고 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 이름을 쓰고 우리말을 쓰는 분들을 회피하게 되죠. 숨기기 위해서.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근거 없는 열등감을 갖게 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일본인들도 피해자예요. 근거 없는 우월감. 사람은 사람으로서 누구라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상대방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해야 해요. 상대방의 자존심과 존엄도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 교육이 중요하고, 지금 일본의 차별 사회 밖으로 나와서 숨어 사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김조광수: 혹시 감독님은 재일교포 분들을 거의 20년 가까이 찍어 오셨으니까, 객관적인 입장에서 1, 2세대 분들과 3, 4세대 분들의 차이점 같은 게 느껴지신 적 있으실까요?

 

김철민: 1, 2세대 분들은 지금 세상을 많이 떠나셨고, 제 영화에 나오신 분들도 몇 분 돌아가셨거든요. 그분들은 일본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시고, 고향과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지가 무척 강하셔요. 조선 사람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지만 그만큼 차별도 많이 겪으신 분들이에요. 2세대 분들도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 비슷한 고민을 하세요. 해방 직후 1950년대, 60년대에 가장 극심한 차별이 있었다고 해요. 해방 직후 2세 분들은 국적이나 이름 등이 조선인으로 바뀌면서 더 강한 차별을 받으셨거든요. 3, 4세 분들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앞으로도 일본에서 자리를 잡으실 분들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협력하며 살까하는 입장이 더 많으신 것 같아요. 하지만 김창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학교를 다니는 사람들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가 커요. 자기 긍정성이나 자기를 드러내거나 정체성을 지키는 문제들에 대해서 입장이 많이 다르고요. 2000년대 후반부터 최근 일본이 극우화 되면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발언이 대낮에도 떳떳하게 일어나고 있거든요. 이런 현상들이 차별적인 시선을 더 키우기도 하고, 조선학교가 제도적으로 차별받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제일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이 조금씩 더 커지는 것 같아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스틸컷

 

김조광수: 질문이 워낙 많아서 다 전달해드리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조금 편한 질문을 드려볼게요. ‘개봉 소식을 듣고 출연하신 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 궁금합니다라는 질문이 있어요.

 

김철민: 작년에 영화 만들고 얼마 안 돼서 일본 11개 지역 순회 상영을 했는데요. 그때 지역 곳곳에서 출연하신 분들의 자손 분들이 오셨더라고요. 그분들의 가족, 친척, 손주 분들을 만났고 할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도쿄에서 연주자로 큰 재일교포 분들을 행사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친구는 저를 어렴풋이 기억하시더라고요. 성인이 되어서 멋진 연주가가 됐는데,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참 시간이 오래 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창오 선생님도 오사카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셨는데 출연하신 선생님들은 영화를 많이 좋아해 주셨고 더 많이 상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김조광수: 항의하신 분들은 없으신가요?

 

김철민: 정말 많이 찍었는데 1초도 안 나오신 분들이 꽤 있어요. 이철 선생님께서는 본인은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촬영했는데 주인공까지는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김조광수: 안창림 선수 지인 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안창림: 사실 이 영화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닌데, 처음에 나오신 분이 저희 어머니와 같은 직장이시고, 그분의 아들이 제 친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오늘도 연락을 했어요. 오늘 영화 보러 간다고. 그랬더니 정말 기뻐하셨고 네가 한국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게 재일교포 분들에게 큰 힘이 된다고 말씀해주셔서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김조광수: 김창오 선생님은 혹시 생각보다 많이 나오신 것 같으세요? 아니면 생각보다 적게 나오신 것 같으세요?

 

김창오: 많이 나온 것 같아요.

 

김조광수: 이철 선생님과는 다른 반응이시네요.(웃음)

 

김창오: 이철 선생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원래 내가 주인공이었다고, 자네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고.(웃음) 제가 손자 이야기를 드렸지 않습니까. 지금 조선학교 4학년 손자와 2학년 손자가 있는데, 엄마랑 같이 보러 왔더라고요. 상영 끝나고 손자한테 영화 잘 봤냐하고 물었더니 손자가 하는 말이 할아버지가 여섯 번 나왔습니다.열심히 세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할아버지의 출연 횟수밖에 모르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될 거잖아요. 그럼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할아버지 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알게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새삼스레 김철민 감독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조광수: 영화에 나왔던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서 아예 모르셨던 분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감사하다는 후기를 남겨주고 계세요. 그리고 조선학교에 대해서 잘 모르셨는데 이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도요. ‘조선학교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책은 없는 건가요?’라는 질문이 중간에 있네요. 일본 정부가 고교 무상화에서 조선학교만 쏙 빼놓은 것은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한국 정부는 조선학교에 직접적인 지원 같은 것들을 해주지는 않는 건가요?

 

김철민: 네. 전혀 하지 않고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문제는 남북의 정부가 같이 정식으로 항의하고 나서야 되는 문제예요. 한국 정부가 조선학교를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지금은 분단이라는 상황에 가로막혀 있지만, 남북의 정상이 합의했던 내용들이 있잖아요. ‘재외동포들의 권리를 위해서 협력한다.’ 그 약속이 있기 때문에 분단 상황이나 국가법을 넘어서 협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나설 수 있도록 저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해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스틸컷

 

김조광수: ‘조선학교 학생들이 서로를 응원하면서 체육대회도 하고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라는 후기가 있네요. 저도 무척 인상 깊었던 장면인데요. 사실 한국의 학교는 경쟁이 치열하잖아요. 조선학교 분위기는 어떤지 안창림 선수가 조금 더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안창림: 제가 기억하기로는 운동회가 초등학교 때 있었고, 물론 체육대회라는 목적이 있지만 그 명목을 가지고 모두를 만나는 행사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어릴 때부터 승부 욕심이 있어가지고, 릴레이 계주 선수에 뽑혔는데 제가 뛰기 전 선수가 엄청 느려서 제 차례 때 울면서 뛴 기억이 나요. 야유회라고 한 달에 한 번씩인가 정기적으로 가족들이 다 모여서 고기 구워 먹는 행사도 있고요. 그런 모임으로 인해서 끈끈한 연대가 생겼던 것 같아요.

 

김철민: 조선학교 운동회나 행사에 가면 학교 자체가 어떤 분위기인지 금방 느껴지는데요. 동포들은 조선학교를 고향 같은 곳이라고 해요. 학교에 모여서 같이 어울리고, 함께 즐기면서요. 동포들의 고향은 물론 한국이지만, 일본 사회 안에서의 고향은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커뮤니티인 거죠. 되게 따뜻하고, 운동회가 큰 축제 같은 느낌이었어요.

 

김조광수: 차별이 워낙 심하다 보니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해방구 같은 역할을 했을 것 같아요,

 

김철민: 그런 곳이기 때문에 재특회가 학교를 습격했을 때의 공포와 분노는 정말 엄청났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분들에게 상처가 있어요.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시거든요.

 

김조광수: 저희는 영화만 봤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나 공포를 느꼈거든요. 당사자 분들은 저희보다 수 십 배, 수 백 배 더 클 테니까.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안창림 선수하고 김창오 선생님은 처음 한국 땅에 왔을 때 인상이 어떠셨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김창오: 저는 한국에 못 왔지만,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일본에 오셨어요.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때 한국에 돌아가서 한국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셔요. 떠날 때 하는 마지막 인사가 다음엔 서울에서 만납시다였거든요. 그렇게 10, 20, 30년이 지나고 약속을 지켜준 거예요. 그 약속이 2003919일에 실현된 겁니다. 서울에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이 참 많이 계실 거예요. 한국에 가기 전날 임종인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준비가 잘 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잘 됐어요하고 답 했어요. 통화를 끊는데 변호사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내일은 서울에서 만납시다’. 그 순간 눈물이 났어요. 다음은 서울에서 만나자는 그날이 언제 오나 했는데 드디어 온 거예요. 출발하는 날 아침 세수하면서도 눈물이 났어요. 공항까지 가는 기차 속에서 딸이 보내준 아빠 잘 다녀오세요하는 편지를 보고 또 눈물이 납니다. 비행기 타는 중에도 계속 눈물이 나요. 공항 도착해서 문이 열리는 순간 인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보도진이 정말 많았는데, 그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2003919일은 내 인생 중에 가장 중요한 기념일입니다. 처음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서울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국내 동포들을 만나는 순간이 제게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안창림: 저는 선생님처럼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데, 운동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한국에 오면서 알게 된 게 , 재일교포를 정말 모르시는 분들이 정말 많구나라는 점이었어요.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부모님 둘 중에 어느 분이 한국분이야? 언제 귀화했어?’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저는 원래 한국 국적이고 부모님들도 다 한국분이신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그런 질문이라 실망도 조금 했고요. 일본에 있을 때보다 한국에 와서 내가 재일교포라는 인식을 다시 하게 된 것 같아요. 저를 성숙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김조광수: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게 있어요. 영화에 이미지로도 나무가 참 많고 노래도 나무잖아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의 나무는 어떤 상징이 있는 걸까. 여쭤보고 싶네요.

 

김철민: 조금 단순한데요. 조선학교 촬영장 앞에서 약속시간이 남아 기다리는데 계속 나무가 보였어요. 그곳에 재특회들이 많이 와서 항의시위를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 나무를 뚫어지게 보는데 나무가 아름답기도 하고, 동포들이 참 나무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본 곳곳을 다니면서 나무를 찍어두었고, 노래도 이런 느낌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했어요. 관객 분들에게 전달이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김조광수:  안창림 선수의 팬분들이 꽤 많이 오셨는데요. 그분들을 대신해서 제가 하나 여쭤보고 싶어요. 최근에 은퇴하신다고 기사가 났어요. 은퇴 후에는 어떻게 지내실 예정이신지 얘기해주시면 좋겠네요.

 

안창림: 일단 국가대표 선수로서는 은퇴를 하게 되었고요. 다음은 지도자로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육성하는 게 제 목표예요. 사실 어릴 때부터 내가 지도자라면 어땠을까, 어떻게 훈련시켰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지도자의 관점으로 훈련을 했어요. 그래서 지도자에 대한 목표도 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다음 스텝으로 올라가는 거고요. 자세하게 정해진 건 없지만 어떻게 되든 많이 응원해주시면 좋겠어요. 저도 국가대표 선수생활을 하면서 많은 팬분들이 응원해주셔서 놀랐어요. 한국에 있는 동안 팬이 이렇게 많이 생길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김조광수: 마지막으로 정리할 시간이 온 것 같아요. 세 분 모두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으시면 그 장면과 소감을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김창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요. 제가 한창 운동하고 있을 때 후배가 어려운 질문을 해요. 그럴 때 좋은 방법이 있어요. 어려운 질문을 받았을 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고 그사이에 제가 고민을 하는 거예요. 감독님, 잘 생각하고 계세요. 저는 장면보다는 영화의 제목,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라는 제목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깊은 뜻이 있는 거죠. 여기서 조선사람이라는 말이요. 영화 제목을 그냥 일본말로 번역하면 와따시와 조센징데스’가 되는데, ‘조센징이라는 부분만 조선사람으로, ‘와따시와 조선사람데스’. 아마 감독님이 생각하셨을 거예요. ‘조선사람이라고 하면 일본말이 아니잖아요. 일본과는 다른 문화, 역사,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보여요. 그런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 영어로도 그냥 번역하면 아이엠 코리안’, ‘아이엠 조선 피플로 되는 거죠. 그런데 영어 제목이 아이엠 프롬 조선.’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재일조선인을 가리키는 영어로 ‘I Am From Chosun’. 우리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조선 민족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제목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김철민: 저는 여러 장면 중에서 평창올림픽 때가 기억에 남아요. 남북의 응원단이 우리는 하나라고 외칠 때 재일교포 응원단이 박수치시면서 정말 좋아하셨어요. 촬영하면서 마음에 와닿았는데, 분단된 남북을 재일교포들이 연결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통일이나 분단이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만나면 정말 쉽게 풀리는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와 불신이 많은데, 우리가 많이 만나고 알게 되면 통일도 가까워질 거라고 믿고요. 동포 분들이 제게 당부하신 게 관객 분들이 꼭 많이 볼 수 있도록 해달라라는 이야기였거든요. 개봉을 하게 된 것도 참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는데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창림: 저는 조선학교 학생들이 북한에 가서 헤어질 때 우는 장면이 좀 슬펐어요. 저도 가족과 평생 못 볼 수 있겠단 생각을 하면서 봤더니 헤어지는 게 얼마나 슬플지 상상됐고요. 그래서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앞으로도 관객 분들이 이 영화를 많이 소개해주셨으면 좋겠고, 조선학교나 재일교포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라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소원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창오: 한 마디만 더 하고 싶은데요. 김철민 감독님께 재일동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조국 통일에 대한 열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를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경의와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김철민 감독님, 고맙습니다.

 

김조광수: 오늘이 영화의 정식 개봉일이에요. 오늘부터 달려 나가야 하거든요. 좋으신 만큼 주변에 많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고요. 어렵게 독립영화 작업하시는 김철민 감독님을 위해서 ‘다큐창작소’ 유튜브에 검색하셔서 구독 눌러주시고요. 앞으로 지도자 과정 밟아 가실 안창림 선수에게는 금메달 땄을 때보다도 더 큰 응원과 격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영화를 위해 일본에서 한 달음에 달려와 주신 김창오 선생님. 앞으로도 일본에서 지금처럼 꿋꿋하고 행복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뜨거운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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