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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 기획] 〈십개월의 미래〉 남궁선 감독 인터뷰 : 넘어지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것

by indiespace_한솔 2021. 10. 22.

 

넘어지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것

 〈십개월의 미래〉  남궁선 감독 인터뷰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예본 님의 글입니다.

 

 

 

 

 

〈십개월의 미래개봉을 축하드립니다. 작품이 국내외 많은 영화제에서 상영과 수상을 거치고 개봉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감독님의 첫 장편영화이기도 한데요. 개봉을 맞이한 소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갑자기 이 질문이 어렵게 느껴지네요.(웃음) 사실 저는 이런 작품으로 장편작 데뷔를 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했어요. 만드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도 몰랐고요. 게다가 그사이에 코로나가 왔잖아요. 세상이 뒤집어지는 변수들이 참 많았는데 그 끝에서 개봉을 맞이해서 아주 시원하고요. 영화 속 미래가 그러했듯이 많은 변수를 뚫고 세상에 나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개봉 전 영화제에서는 제목이 〈십개월〉이었습니다. 타이틀의 수정이 마치 미래라는 인물의 재탄생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는데요. 작품명을 수정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목을 붙이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다양한 가제가 있었는데요. 나름의 중의성이나 아이러니를 담은 제목을 몇 개 만들었는데 중의성이 전달될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은 주제더라고요.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한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십개월’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소개가 불친절한 제목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마음 한구석에 이대로 괜찮을까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개봉을 앞두고 후보로 나온 제목이 미래의 십개월’, ‘십개월의 미래였어요. 십 개월간의 미래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고, 그 제목이 주는 중의성도 좋다고 생각해서 바꾸었습니다.

 

 

프로그램 개발자 미래, 채식주의자 윤호, 본인이 단순히 산부인과 전문의에 불과하다는 의사, 계산기를 두드리는 임신중절 상담사 등 작품 안의 모든 캐릭터가 무척 독특하고 짜임새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물에게 성질을 부여할 때 가장 신경 쓰신 부분이 따로 있다면 무엇일까요?

 

모든 캐릭터는 눈에 선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물을 볼 때 맞아. 저런 사람이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재미있게 느껴지는 포인트가 있어야 하죠. 그래서 캐릭터를 만들 땐 항상 주변의 사람들을 상상하고 제가 현장에서 봤던 분들을 떠올려요. 〈십개월의 미래에서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들은 굉장히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자기 할 일을 하는, 어떻게 보면 불친절한 캐릭터인 것 같아요. 각자 자신의 의도가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부분이 좀 특이한 구성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임신 중절을 상담해주는 분이 과하게 극존칭을 쓰는 부분이 무척 재미있었어요. 정말 현실감 있었거든요. 서비스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인데 그 부분이 도드라지게 표현이 되니까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배우가 잘 살려주기도 했어요. 직업인이잖아요. 직업적 윤리가 있기 때문에 굉장한 원칙주의자인 거죠. 특히 산부인과 의사의 경우에는 원칙주의자고 비과학적인 대답은 일절 해주지 않아요. 너무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의지가 되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각각 다른 의미를 담아서 말하니까 오히려 기계적 중립성이 기댈 곳이 되는 구조였던 거죠. 임신 중절 상담사는 그저 자기 일을 하는데 미래가 자꾸 질문을 하니까 프로토콜대로 되지 않을 때 무언가 깨지는 거죠. 이런 부분들을 배우가 잘 표현해줘서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여성이기도 하고 작품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미래라는 주인공에 초점을 두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윤호라는 남성의 서사 역시 새롭게 다가왔어요. 윤호가 등장하는 첫 장면이 처음부터 다 다시 고쳐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게다가 살육을 막기 위해 채식주의를 선택했지만 아버지의 돼지농장에서 일해야만 하고, 어머니의 울타리 속에서 이미 지친 인물처럼 보였거든요. 남성 인물에게도 어떤 원인의 일종, 공감대 형성의 여지를 남겨두신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윤호의 삶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요?

 

저희는 오히려 윤호의 서사를 줄인 편이거든요. 저는 미래랑 윤호를 서로 비슷한 인물로 설정했어요. 미래도 직업적인 도박을 하고 있고, 윤호도 가족으로부터 떠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 상황이잖아요. 언제든지 다시 문제의 가정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는 불안한 위치에 있고요. 원래는 윤호가 지금보다 더 많은 레이어를 가진 인물이었어요. 현실적인 문제로 여러 설정을 줄이면서 보다 남들에게 휘둘리는 상태, 원하는 건 많은데 힘이 없는 상태가 되었어요. 윤호 역시 불안정성이 많은 인물로서 미래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사실 윤호라는 인물은 거울상 같아요. 임신이 여성에게 주는 혼란과 여러 가지 억압이 있듯이 남성 버전의 혼란과 억압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범인은 결국 같은 녀석인 거예요. 그릇된 가부장제의 관념이 윤호라는 인물에게도 작용하는 거죠.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는 사람을 구질서로 회귀시키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윤호의 이야기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더 많이 보여줄수록 관객들이 힘들어하시더라고요.. 미래가 주인공인 영화니까 윤호가 힘든 장면들이 보이면 보일수록 관객 입장에서는 더 화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내부 시사 때 윤호의 이야기는 윤호 몫으로 남겨두자고 결정했어요. 어쨌든 저희는 미래의 시선으로 정리를 했다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윤호라는 인물을 독특하게 보았던 이유는, 그 책임을 지느냐 지지 않느냐의 명료한 문제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느낌 때문이거든요. 아이를 반기고 어느 정도 책임을 지려 하면서도 윤호 개인의 서사가 이미 확장되어있는 느낌이랄까? 빈틈이 없어서 아이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 같아요.

 

성별을 떠나서 아이를 강렬하게 원하는 순간 중에 하나인 것 같은데요. 지금 내 상황에 대한 어떤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아이를 돌파구로 삼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윤호에게 미래의 임신은 어떤 면에서 그런 돌파구였을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커지는 거죠. 미숙한 상태로 욕망을 쫓아간 경우니까요. 어떻게든 다 잘 해낼 거라는 무리한 자신감을 갖고 있던 것 같아요. 미래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이 잘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 게 있잖아요. 그 자신감에 둘 다 당해버리는 상황이죠.

 

 

작품이 가끔씩 삶과 죽음,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돼지농장에서의 윤호의 대사들이 특히 그랬는데요.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게 참 위태롭고 아슬아슬하잖아요. 작품을 만드실 때 이러한 경계에 대해 어떤 고민들을 하셨나요?

 

미래라는 인물의 성장, 그리고 젊음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미래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면서 처음으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거죠. 창창한 앞날과 미래가 있을 뿐이지 거기에 끝이 있고 죽음이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아이가 생김으로써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영화에 미래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들어가기도 하고요.

이런 주제는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흑과 백의 문제로 생각하니까요. 여성 신체의 자율권이냐, 태아의 생명권이냐 하는 문제도 정말 첨예하고 치열하잖아요. 그걸 둘러싼 도덕적 사고 역시 첨예하게 다르고요. 윤호의 머릿속에는 임신 중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임신이 미래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는 깊이가 다르거든요. 자기 이야기가 되기 전까지는 깊게 생각하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윤호는 또 채식주의자고, 돼지들이 죽는 걸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폭력성에 저항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게 아이러니한 부분이죠.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원칙을 내려놓고 다른 생명을 해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는 거니까요. 사실 윤호는 그때부터 꼬이는 것 같아요. 실제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지만, 이 영화가 명확한 입장을 말하는 영화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조건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들, 겪게 되는 딜레마들을 관통하는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많은 의견들 속에서 균형을 잡으며 이야기를 풀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고요.

 

<십개월의 미래> 스틸컷

 

이건 조금 사소한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윤호가 아버지의 보석금을 받고 출소할 때, 뒤로 보이는 경찰서 전광판에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새로운 미래, 2018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잠시 화면이 바뀌었다가 다시 전광판이 비쳤을 땐 고립된 가구로 시작하는 문장이 지나가고요. 혹시 이런 부분도 의도를 하신 건지 궁금하네요.

 

촬영할 땐 전혀 의도하지 않았어요. 편집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18년이라는 시간적 정보가 그 장면에서 딱 한 번 나오거든요. 2018년에서 2021년 사이 낙태죄는 위헌이라는 결정도 났고 일련의 변화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영화 속 산부인과에서 하는 얘기들이 모두 과거가 되어있을 거라는 걱정도 했어요. 그런데 2021년에도 완전한 과거가 되어있지는 않고 여전히 답답한 상황이죠. 그래도 2018년이라는 정보가 그 장면에 찍혀있는 게 굉장히 좋더라고요. 하필 고립된 가구에 대한 뉴스가 나와서 더 재미있었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예스러운 분위기의 가요와 재즈가 많이 들리더라고요. 어떤 익살스러운 느낌이랄까? 유쾌한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는데요. 장소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레트로한 느낌이 많이 드러난 것 같아요. 가장 신경 쓰신 부분이라거나 곡 선정 시 우선으로 두셨던 사항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장소 자체를 특별히 레트로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주인공들이 젊은 세대이다 보니까 이들이 모일만한 공간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음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긴 했어요. 드라마틱하고 답답하기도 한 영화이기 때문에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에 너무 몰입하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저도 보기 힘든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인물의 감정과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게끔 장치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중 하나가 음악적 구성이었어요. 조금 더 몰입이 되는 음악을 선정할 수도 있었고, ‘모임별이라는 아주 훌륭한 음악 협업자가 있기 때문에 보다 깊은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영화의 톤에는 그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익살스럽게 하려고 한 게 맞아요. 몰입하려 하면 감정을 떨어뜨리고, 젖어들 법하면 끊고. 환기시키는 차원인 거죠. 시대에 녹아드는 음악이 아니라 몰입을 방해하는. 그런 톤앤매너를 지키기 위해 많이 신경 썼어요.

 

 

말씀을 들어보니까 상황이 심각해질 것 같은 순간에 유머러스한 장면이 삽입되어 있던 것 같아요. 차키를 놓고 문을 닫는다거나, 주차된 차 사이에서 낑낑대며 나오는 미래의 모습 같은 장면들이요.

 

저는 항상 모든 상황은 어떻게 보면 웃기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사람이 엉엉 울고 있더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면 웃길 수 있잖아요. 혹자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어설픔을 보여주지 않으면 너무 가혹해질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영화는 그 어설픔을 보듬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미래가 산부인과에서 다른 산모의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 뱃속의 카오스를 부르며 인사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혼자가 아님을 인지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미래가 카오스를 받아들이고 부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전까지는 미래가 자기 몸속에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 같아요. 얼마나 정신이 없으면 언제 태동이 오는지도 몰랐겠어요. 약간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미래는 자기의 일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산부인과에서의 경험은 맞다, 이 안에 생명체가 있었지하는 감각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에요. 태동이 느껴진 거잖아요. 자기 몸 안의 장기와는 다른 느낌이기 때문에 이질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동시에 산모의 비명소리를 목격하는 건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장면도 제가 겪은 몇 가지 일들을 구현한 건데, 저도 병원에서 응급 산모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심각한 상황이니까 의료진이 몰리는데, 그런 공기를 느낄 때의 서스펜스가 있잖아요. 그때 저도 대기실에 앉아있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가족들을 보았거든요. 그 가족들과 비슷한 모습을 또 본 적이 있어요. 한강대교를 지나는데 어떤 두 사람이 다리 위에 너무 이상하게 앉아있는 거예요.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앉아있지?’했는데 아마 누군가가 투신을 한 것 같아요. 부모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였어요. 산부인과와 한강대교, 두 공기가 제게는 겹치더라고요. 스쳐 지나가도 그런 공기를 경험하면 잊히지 않아요. 미래는 ,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상황이 이 정도의 스케일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을 거예요. 받아들임이 아니라 인지하는 순간이었겠죠.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내 안에 생명체가 생겼다면 그 아이와는 관계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 관계의 시작점이라고도 생각해요.

 

<십개월의 미래> 스틸컷

 

다른 인터뷰에서 임신과 출산이 무척 흔하고 개인적인 큰 경험이라고 말씀해 주신 걸 보았는데요. 하지만 이런 경험이 특정한 조건을 가지게 될 때는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나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을 온전히 공감하거나 위로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저도 창작을 공부하면서 이와 같은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런 흔하고 개인적이지만 특수성을 갖는 서사를 예술의 소재로 삼을 때 창작자로서 어떤 점을 가장 유의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지금까지 출산으로 인해 명백하게 상황이 어려워지는 여성들의 모습은 미디어에서 조금 더 보여줬던 것 같거든요. 우리 사회에서 문제로 읽히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귀를 기울이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왔던 것 같아요. 동시에 저는 일반적이라고 할 만한 출산의 경험이 사각지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수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되면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이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강렬한 억압의 골짜기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다른 사람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오만한 일인 것 같고. 다른 영화나 예술을 통해서 조각들이나마 이해하려 노력할 뿐인 거죠. 영화나 예술이 그 창은 되어줄 수 있거든요. 나와 다른 상황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창으로서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다른 인종의 이야기도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이입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걸 내가 다룰 수 있느냐는 무척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특수성을 갖는 서사를 소재로 삼을 때는 정말 철저한 취재를 해야 해요. 직접적으로 아는 이야기가 아닌 이상 치열하게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고요. 이건 정말 23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인데.(웃음) 어린이 영화만 봐도 그래요. 어른들이 생각하는 어린이의 반응을 그리고 있잖아요. 많은 남성 영화에서 여성들이 행동하고 반응하는 방식도 그들이 생각하는 방향일 때가 많고요. 창작자는 그런 맹점이 나에게도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 같아요. 나는 절대로 모른다. 모르지만 모른다는 사실은 안다, 알아야 한다. 되게 어려운 일이죠.

 

 

방금 말씀해주신 것 중에 일반적인 상황의 출산은 역으로 사각지대에 놓여버린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 깊네요.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그 느낌이 훨씬 강했는데 그나마 지금은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들과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게 되었어요. 심지어 아이를 안 낳고 혼자 사는 것조차 내버려 두지를 않는 세상과 싸우고 있잖아요. 여러 가지 불완전한 선택지 속에서 포기하고 상처 받는 일들이 생겨요. 그것들 때문에 서로 가혹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떤 잣대로 비난하지 않고 오롯이 이 경험에 집중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감정에 젖어들면 왜인지 또 그 부분을 비난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거리도 두게 되고. 복잡함이 있는 영화였네요.

 

 

강미의 나를 부서뜨리고 얘기 나왔어라는 대사나 태동을 배의 이상 증세로 느끼는 미래를 보면서 임산과 출산 중에 있는 여성의 신체적인 변화, 감정, 두려움 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강인한 어머니라는 이미지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을지 몰라도 전 그들이 서로의 불완전함과 불안함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위로받고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연대가 강인해 보이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구나 체감했습니다. 감독님이 보여주고 싶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이미지, 혹은 어머니가 되어가는 여성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렵네요. 우선 영화 내에서 강미와 미래가 연대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강미가 미래의 공포 요소로 작동한 것 같아요. 강미가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말해줬더라면 의지가 되었을 텐데, 강미는 자기 자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사실 짓궂을 정도로 연대가 없는 설정을 만들어놓긴 했어요.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임신과 출산이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임신과 출산이 보기 싫은 경험, 어떻게 보면 공포스럽고 끔찍해서 보고 싶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에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거든요. 저는 그게 여전히 불편해요. 임신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화가 나요. 내가 그렇게 불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와는 되도록 멀리 있었으면 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문장이 결국 나에게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거죠. 굉장히 공포스러워요. 그래서 이런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 이런 감정이 존재하고 그래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 지점에서 사고 회로가 꼬이지 않거든요.

대표적으로 여겨지는 페미니즘의 이미지도 십 년 주기로 바뀌어요. 십 년 전에는 모든 일을 해내고 하이힐을 신고 아이를 안은 채 뛰어다니는 슈퍼우먼이미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변모하는 멋있는 여성상조차도 이상향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여성들이 제시된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멋있지 않고 실패한 여성이라는 내재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전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거든요. 제가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나와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이유도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니라는 존재가 감당하는 어떤 불합리성을 직시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규정하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다 어머니로부터 왔고 내가 어머니가 될 날이 올 수도 있고. 어머니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어야 맞는 것 같아요. 그저 한 여성이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거죠. 남성이 아버지이면서 사회적으로 자신의 역할이 있는 것처럼요. 어머니가 되는 순간 ‘어머니성’이 모든 걸 잠식해버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라서 강하고 위대한 게 아니라 지금 모습 그대로 살고 있는 라는 연속적인 여성이자 인간으로서의 어머니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철없는 내가 이입할 수 있는 20대 후반의 미래라는 인물과 우리 엄마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요. 온 세상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요.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많이 소비되잖아요. 저 역시 그런 시선들이 항상 불편했는데 동시에 그런 말에 익숙해져 가는 제 자신이 부끄러운 적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십개월의 미래속 인물들은 약하고, 두려워하고, 또 아파하고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모습이 보이니까 아 저게 현실이구나.’라는 걸 많이 깨닫고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에서는 소통이 정말 활발하고 진정성 있는 공감이 가능해지는데 그 안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로 갔길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음지에 있는 거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출산 이전에는 유축기를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걸 처음 마주한 경험이 너무 이상하고 강렬했어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 경험을 했을 텐데 왜 나는 본 적이 없지? 싶더라고요. 저는 거기에 일종의 수치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친구들끼리 있을 때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인정하기 싫은 거. 그 행위에 대한 폄하가 있기 때문에요. 저도 왜 너 같은 애가 이런 영화를 만들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왜 이 주제를 사람들이 다루고 싶지 않아 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저는 공모자가 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덤벼봤는데 예상보다 오래 걸렸네요.

 

 

신기했던 게, 미래가 원호의 가족들을 만나서 결혼을 전제로 하는 행위들을 함에도 아이를 낳는다는 결심을 하는 장면은 전혀 없다는 점이었어요.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버리는 것 같았거든요. 출산과 임신 중단이라는 결정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을 위해 고민하는 기간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사실 고민의 기간은 주어지지 않아요. 보통 결심하고 임신을 한다고 해도 불완전함이 있고, 그 불완전함을 사회는 전부 보여주지 않고요. 마치 이면계약처럼 내가 계약한 다음에야 이게 따라붙는 거였구나깨닫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떤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차마 말을 할 수 없어요. 말해버리면 내가 나쁜 엄마가 되어버리니까. 그게 정말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죄책감이나 죄의식이 사람을 억압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계속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미래가 선택을 한 게 맞을까라는 질문이요. 영화 속에서 명분이 없어라는 대사가 장난스럽게 들리지만, 그만큼 강렬한 동기가 있어야 사회적인 비난과 불법성을 뚫고 중절을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동시에 사회는 출산을 하면 아이를 낳기로 선택했으면서 왜 그렇게 힘들어하냐면서 질책하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보면서도 사람에 따라 미래의 행동에 정말 다른 반응을 보여요. 저는 그 극과 극의 반응의 재미있는 비평적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나는 왜 이렇게 반응했을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반응할까? 왜 이렇게 다를까?’라고 다시 논의해볼 수 있잖아요. 그런 화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출산의 책임이 전적으로 여성에게 지어지는 사회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는 여성으로서 〈십개월의 미래가 임신과 출산을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히 그 과정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바뀌게 되는 미래의 삶까지도요. 영화를 본 뒤에도 임신과 출산에 대한 두려운 감정은 해소하기가 어려웠어요. 어떤 부분은 각오 단단히 해라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웃음)

 

사실 오히려 그런 부분들은 부풀리지 않고 최대한 표준적으로 넣은 거예요. 현실에 비해서 순화시킨 것들인데 혹자는 너무 편협하다’, ‘일부러 이런 장면을 삽입했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가끔씩 어떤 분들은 불쾌함을 표현하시는데 사실 많은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에요. ‘각오해라라기보다는 제가 갖는 불편함을 담고 싶었어요. 이 희생이 당연한 거니까 각오해라, 혹은 그러니까 어머니는 위대하다, 이런 논리 자체에 동의할 수 없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하소연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잖아요. 직장에서 부조리함이 계속되는데 회식 자리에서 다 그렇지 뭐라고 무마시켜버리는 것처럼요.

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고요. 하지만 미래에게 이미 일어난 일은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십개월의 미래는 성장담이라고 생각해요.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보는 세상이 너무 달라져 있어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이야기이니까요. 미래는 지금 균형을 잃은 거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을지언정 넘어져 버린 거예요. 그렇다고 그 사건 자체를 없앨 수는 없잖아요. 일어나서 새로운 미래를 살아가야겠죠. 그리고 이렇게 얻어맞은 경험이 무언가를 다르게 만들 거예요. 저는 이 영화가 시작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미래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미래는 겪게 되었고,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미 겪었을 거예요. 그 상황에서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시 일어나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 버티고 해낸 뒤에 강해진다기보다... 더 날카롭고 명징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강해지는. 그런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십개월의 미래를 만나게 될 관객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지만 다 미숙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꼭 미래와 같은 경험을 해본 여성뿐만 아니라, 삶에는 변수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요. 그런 경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워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감정을 담은 성장 서사로서도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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