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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부모 바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

by indiespace_가람 2025. 2. 6.

〈부모 바보〉리뷰: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예송 님의 글입니다.

 


모계의 신체를 찢고 나와 세상의 빛을 처음 맞이한 우리. 한 성체의 영양분을 빼앗아 10달의 시간 동안 척추를 곧게 펴게 하지도 못하게 한 ‘탓’이라는 변명을 타고났다. 무거운 짐을 얹게 만든 책임이 따라설까. 어쩌면 세상은 혼자 사는 것,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뿐이라는 고독 속에서 함께와 서로를 향한 집착이 생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천륜의 관계’ 피로 이어진 질긴 인연. 원한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단어의 굴레 속에 집어넣기에도 마뜩잖다. 결국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증거 속에서 당신의 성씨를 따르게 되는 우리는, 부모와 자식으로 얽힌 가족이다. 하늘의 뜻이라는 무거운 대의는 서로를 향한 집착 혹은 간섭을 발생하게 만들고 한 주체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평생을 기약한 암묵적 임무가 주어진다.

영화 〈부모 바보〉는 제목에서도 밝히다시피, 생물학적으로는 만인에게 주어진 ‘부모’라는 대상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있다. 생을 살아가다 보면 짐짓 부모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떠올릴 때가 있다. 꼬리를 무는 생각은 숨이 멎을 때까지도 확신의 답을 명료하게 내어주지도 않는다. 

 

영화 〈부모 바보〉 스틸컷


[부표없는 항해]

삶을 수여 받게 된 모든 주체는 살아가는 이유가 개인마다 다를지라도, 자신의 소원으로 탄생을 점지받은 것은 아니다. 삶을 얻게 된 계기는 결국 부모에 의해, 부모 덕분에 이뤄진다. 그리고 그들이 설계한 울타리 안팎을 넘나들며 삶을 깨우친다. 그러나 깨우친 삶이 하늘에 호의적일지는 미지수다. 목적이 분명한 항해를 떠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개미처럼 열심히 살아가다가도 뱃고동 소리에 놀라 물가를 가르는 궤적을 바라보다 보면 부표 없는 항해를 마냥 일삼고 있는 건 아닌가 떨떠름한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부표가 눈앞에 주어지고 나라는 주체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부표가 존재한다고 믿는 상대적인 압박에 홀려 보이지 않는 둥근 지구의 끝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계된 삶, 강요된 삶.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벗어나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리고 이 선을 넘겨 새로운 생각을 가진다거나 (혹은 도발적일 때) 기성세대는 혀 끄는 소리를 일삼는다. 세상은 전 세대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거나 후퇴하기를 반복하는데 그들이 설계 해놓은 헤게모니에 따라 관례를 습득한 우리는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미정립된 자아를 갖게 된다. 사회는 그 공간을 채운 사람에 따라 특성을 갖는다. 〈부모 바보〉 속 주인공 ‘영진’은 현 한국 사회의 맹목적 선상에 있는 직업 ‘공무원’을 강요받았고 그 언저리의 사회복지사가 된다. 또 다른 주인공 ‘진현’은 그림을 전공하며 창작에 목말라했었지만 사실 예술가는 현 사회의 시각에 의하면, 직업적 성과를 분명하게 읊을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선상의 업이다. 영화가 갖고 있는 관조하는 시선은 이들의 깊은 내면에 닿을 수 없고, 수많은 인간 군상이 나타나는 사회복지관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실체는, 결국 그들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행인일 뿐이라는 점에서 영화 속 주인공 두 인물의 주체성의 형태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그들이 결국 한 사회의 병폐를 나타내는 존재들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부모 바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앞서 정립시킨 부모 세대의 영향으로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 규정된다. 

 

영화 〈부모 바보〉 스틸컷


[바라보기]

‘영진’은 ‘진현’이 눈에 밟힌다. 굴다리 밑에서 노숙하는 ‘진현’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자초지종을 들어봤을 때 과거 동생을 잃은 ‘영진’은 그를 향한 어떠한 연민을 갖게 되고 본인의 집에 데려와 지내게 한다.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가끔은 푸념을, 위로를, 속 안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는 ‘영진’은 보살핌의 위치에서 ‘진현’을 꾸준히 바라본다. 본래 현대미술을 전공하던 ‘영진’은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담고 지켜본다. 그가 바라보는 프레임은 가끔 영화 밖으로 튕겨 나온다. 사회복지사인 ‘진현’은 복지관에 오는 민원인 ‘순례’가 요구하는 책임을 듣는다. 그녀는 극성 민원인답게 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그들은 ‘바라본다’라는 방식은 똑같지만, 형태는 상이하다. ‘영진’은 자신의 구역 내로 ‘진현’을 들여왔기에 손길 내의 권역에서 더욱 면밀한 관찰을 집행한다. ‘진현’은 한 매체를 경유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 대상은 추상적이며,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진현은 ’순례’를 고정된 시각으로 차분히 마주하고 있지만, 결국 사회복지사와 그가 담당한 민원인이기에 끝내 경계진 남의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온도의 시선의 결과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은 모두 ‘실종’된다. 영화의 마지막 ‘진현’은 ‘영진’의 권역 밖으로 사라지고, 순례는 단 한 명의 민원인일 뿐이라는 사실이 전면화된다. 직원과 고객으로 이어진 두 사람이, 대화하는 순간부터 관계라는 인연은 동할지라도 그들이 문밖을 나서는 순간, 결국 당신이 나를 찾아올지. 그가 건의한 문제가 끝내 해결될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진현’의 관조적 바라보기는 대상의 모호함으로 잔상만 남긴 채 서서히 휘발된다. 

‘바라보기’라는 행위는 어떤 것을 눈으로 지시하는 행위다. 이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결국 어떠한 한 곳을 응시하는 것인데, 과연 그 응시의 대상이 존재하는 것일까. 강요된 믿음으로 질질 끌고 왔음에도 끝내 사라져 버린다. 부표 없는 항해다. 

 

영화 〈부모 바보〉 스틸컷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영화 〈부모 바보〉는 여태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의 병폐를 짚고 있다. 여러 관계 속에서 바보처럼 살아온 우리의 모습이 결국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의 의문을 들춘다. 여러 차례 ‘바라보기’를 하는 우리. 들여다볼수록 형체가 더 모호해진다. 과연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올바른 관계란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굴다리 밑에서 기어 나오는 ‘진현’을 보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이라는 우스운 농담이 생각난다. 당신과 만난 것이 천륜의 인연이라는 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 누구도, 심지어 나까지도 무책임해 보인다. 역시 옛말은 틀린 게 없는 게 아닐까. 

나도 당신도 세상의 자식들이지만, 참 다리에서 주워 온 인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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