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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Playing/정기상영 | 기획전

SIDOF 발견과 주목 - 나의 첫, 다큐멘터리 글쓰기 워크숍 | 나중이 아닌 현재를 살다 <어른이 되면>

by indiespace_은 2019. 10. 24.





나중이 아닌 현재를 살다 <어른이 되면>



글: 송수민

(* 본 원고는 기획전 SIDOF 발견과 주목 - 나의 첫, 다큐멘터리 글쓰기 워크숍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나중을 위해 산다. 학창시절은 대학 입학을 위해 희생하기를, 대학 시절은 취업을 위해 희생하기를 강요당한다. 이 글에서 소개할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을 ‘나중에’ 또는 ‘어른이 되면’ 할 일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고 모든 걸 할 수 있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은 세상에 없다. 우리는 또 다시 알 수도 없는 미래를 바라보며 살 뿐이다.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은 이런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대신 현재에 집중해 살아가기를 선택한 한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첫 번째 주인공은 선천성 발달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13살에 시설에 들어가 18년을 살다가 다시금 사회에 나온 동생 혜정, 두 번째 주인공은 그런 혜정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온 그녀의 언니 혜영이다. 이 다큐는 혜정이 시설에서 나온 뒤 혜영과 살아가는 6개월동안의 기록이다.


다큐의 첫 장면은 웃으며 책을 보고 사람들과 장난을 치는 혜정의 모습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혜정도 시설에서 나오고 싶었고, 사회의 삶을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행복해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얼마 안가 무너졌다. 이 장면은 혜정이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풍기를 사러 가야 하는데 그것을 원치 않아 우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런 장면의 이어짐은 앞으로 두 사람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예상하게 해준다.


이 다큐는 혜영이 내레이션으로 말하듯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격리 당한 혜정이 다시 사회로 돌아오는 과정을 담아낸다. 혜영은 단지 동생과 함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다. 혜영이 말하듯 사회는 혜정이 ‘원래 있던 곳’이지만, 사회는 ‘원래 있던 곳’에 돌아오려는 혜정을 끊임없이 밀어내기 때문이다. 복지서비스를 받을라치면 온갖 자격을 요구하고는 결국 자격이 되지 않는다 말한다. 특히 활동보조인을 구하기 위해 찾아간 국민연금공단에서의 시간은 허무할 정도이다. 공단은 혜정의 30년의 시간을 20분만에 판단하여 월 94시간의 활동보조인 서비스 제공으로 등치시킨다. 게다가 활동보조인을 구하는 것은 보호자의 몫이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시설에 들어가게 된 것도 어느 하나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혜정의 자리는 이 사회에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글의 초반,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대신 대신 현재를 살아가기로 한 자매’라고 나의 언어로 두 사람을 규정했다. 하지만 어쩌면 두 사람이 현재를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사실 이 영화의 절반은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한 시간들을 보여준다. 이사를 가고 혜정에게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찾아다니거나, 자신이 없는 시간에 다른 이들과 어울리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혜영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러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혜영은 두 사람이 미래를 담보로 미뤄 놓았을 일들을 먼저 하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미래가 불확실하다면, 현재부터 채워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현재를 채워가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열린 결말을 맺는다. 어찌 보면 이들의 일상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듯하다. 혜정은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뤄지지 않으면 눈물을 보이고, 활동보조인은 여전히 구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있다. 혜정은 처음에는 혼자 썰지 못하던 고기를 썰고, 사람들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남들에 비해 느릴지는 몰라도 혜정은 그 전보다 성장해 있다. 그리고 조금은 더 행복해 보인다. ‘원래 있던 곳’에서 모두의 환대는 받지 못했더라도, 현재 두 사람의 곁에는 함께 웃어주고 울어줄 소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른 영화 속 대사가 있다. 영화 <벌새>에서 재개발을 앞둔 주택가를 보고 불쌍하다고 말하는 중학생 소녀에게 선생은 말한다.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생각해보면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동정만을 해왔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그 조심마저 돌아보면 동정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우리의 앎을 암흑으로 표현한다. 30년의 삶을 20분의 면접으로 판단하는 국민연금공단에서의 장면 같은 암흑. 어쩌면 많은 비장애인들의 장애인의 삶에 대한 앎은 이 암흑보다 더 칠흑 같은 것일테다. 이 영화는 그 암흑에 빛을 비춰주는 영화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먼저 이 영화는 이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대상화해온 장애인의 사회 속에서의 삶을 찬찬히 보여줌으로써 비장애인의 암흑과 같았던 시선에 조금이나마 빛을 내준다. 또한 이 영화는 혜정의 삶에도 빛을 내준다. 엔딩크레딧에서 혜정은 이 영화를 함께 만든 이름들 속에서 밝게 빛난다. 이것은 언니 혜영을 만나 현재를 살게 된 혜정이 내는 빛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들이 현재를 사는 것은 온전한 이들의 욕망이 아니다. 이 빛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제도적 여건이 이들이 현재만을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두가 혜영과 같은 보호자를 둔 것도 아니기에, 이런 개인에 대한 기대는 너무나 위태롭다. 오늘도 또 다른 혜정들은 시설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혜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은 이런 삶이 편안하다고 하지만, 이들에게도 최소한 근미래를 꿈꿀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면 이들이 우리와 함께 조금 더 오래도록 빛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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