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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뜨겁고 순정한 싸움 'SIDOF 발견과 주목' <졸업> 인디토크 기록

by indiespace_한솔 2019. 2. 12.




뜨겁고 순정한 10년의 싸움  SIDOF 발견과 주목 <졸업>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19년 1월 15일(화)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박주환 감독

진행 임종우 SIDOF 관객모니터단










*관객기자단 [인디즈] 도상희 님의 글입니다.




인디다큐페스티발 정기상영회 1[투쟁과 연대의 기록,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에서는 박주환 감독의 다큐멘터리<졸업>이 상영됐다. <졸업>은 상지대학교 민주화를 이뤄낸 10년의 기록이다. 싸운 사람들도, 함께하며 카메라에 담아낸 감독도,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뜨거울 수 있었을까? 긴 싸움 이후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임종우 SIDOF 관객모니터단의 진행으로 관객이 묻고 박주환 감독이 답했다.

 





임종우 SIDOF 관객모니터단(이하 임종우): 09년에 미디어센터에서 제작하신 영상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감독님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것은 그 이후였던 것 같은데요. 어떻게 영화로 제작하게 되신 것인지요.

 

박주환 감독(이하 박주환): 제가 미디어나 언론 관련 학과가 아니거든요. 제가 미디어센터에 어떻게 가게 됐냐면, 2008년부터 결혼식장 촬영알바를 했어요. 거기 사장님께서 편집을 배워오면 돈을 더 주신다고 해서 편집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원주에 미디어센터가 생기고 시민들에게 촬영편집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생겼어요. 우연히 거기 가게 됐죠. 제 영화의 프로듀서인 김성환 감독님이 강사셨는데요. 제가 뭘 찍을지 고민하니까 너의 이야기나 네가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당시 2009년에 김문기 씨가 학교 복귀를 할 수 도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학생들이 농성을 시작했거든요. 저는 그런 상황에서 이걸 찍기 시작했고요. 시작했을 때는 학생들을 거의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모르는 사람이 카메라 들고 오면 누가 찍게 해주겠어요. 그래서 한 달 동안 농성장에 가서 잤어요.

그렇게 친해졌던 몇몇 학생들을 찍어서 7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는 중간에 그냥 휴학을 하고 여러 가지를 하다가 20108월에는 국토대장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연히 옆에 있던 친구가 이거 너희 학교 아니냐고 영상을 보여줬어요. 승현이가 울면서 잡혀가는 영상이었어요. 그때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거든요. 부끄러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갑인 친구는 저렇게 싸우다가 잡혀가는데 나는 여기서 국토대장정을 하고 있다는, 뭔가 죄책감도 들었던 것 같고요. 그러다가 복학을 하니까 총학생회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네가 2009년에 만든 영상을 봤다, 총학생회 활동을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거의 10년이란 세월이 들었네요. 그래서 작년에 인디다큐페스티발(이하 인다페)에서 3월에 첫 영화가 공개됐고 이후 1년 정도 지났네요.

 

임종우: 처음 영상을 시작하실 때만 해도 이 이야기를 이러한 두 시간 가량의 결과물, 영화로서 만들 거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 이 기록한 작업들이 영화로 성립이 될 거라고 판단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박주환: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저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이 많아요2011년에 다른 대학과 연대투쟁 다니면서, 세종대학교 기록하는 전상진 감독과 친해졌어요. 20134월에 상진 감독도 인다페 프로젝트로 <주님의 학교>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그 형이 저한테 되게 많은 힘을 줬어요.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찍었는데 이렇게 정리하게 되더라.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어이런 말씀을 주셨어요. 그리고 저도 이걸 내가 10년이나 찍을 줄 알았다면 안 찍었겠죠. 솔직히. 너무 길잖아요, 10년이란 세월은. 그냥 생각 없이 찍다가 10년이 된 거 거든요. 제가 학교 문제가 너무 급하게 돌아갈 때는 영상을 보는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편집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학교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정리를 해야겠다고 판단이 들었는데, 막상 때 되니까 편집을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원래 영화를 만들거나 배웠던 사람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2009년에 영상을 배웠던 강사님을 찾아가서 프로듀서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려서 한 9개월 정도 편집을 같이 했어요. 그렇게 나올 수 있었던 영화인 것 같습니다.

 

임종우: 10. 푸티지들이 엄청났을 것 같은데요. 총 몇 분정도의 푸티지였나요.

 

박주환: 시간으로는 모르겠지만 횟수로는 450차 정도가 되더라고요. 한 번씩은 다 봤는데, 솔직히 좋았던 순간들이 아니잖아요. 보는 게 되게 힘들었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편집을 했어요.

 

임종우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본질적인 영상물이 만들어진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많이 놀랐던 작업입니다. 기본적으로 작업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는지 들어보았는데요. 관객분들 의견이나 질문 주시면 좋겠습니다.

 




관객: 영화 잘 봤습니다. 한 학생이 옥상에 올라가서 투신하려고 한 장면이 저에게는 클라이막스처럼 느껴졌어요. 거기서 어떻게 해서 뛰어내리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서 내려오게 됐는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박주환: 학교의 현장에 있었던, 당시 상지대를 함께 다녔던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트라우마인데요. 그게 어떻게 된 거 냐면 그날 2시쯤에 총학생회 간부들, 단과대 회장들 다 징계할거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애가 못 참은 거예요. 부총장을 찾아갔는데 문 앞에서 만나자,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나주니까 옥상에 올라가게 됐어요. 다른 친구와 함께 있다가 총학생회실에서 징계 이야기를 듣고, 잠깐 커피 좀 사오겠다고 하고 올라갔대요. 그리고 있다가 교직원이 좀 말려달라고 전화가 온 거예요. 정말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어요. 당시에 저는 홍천에서 아이들 영상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3시에 연락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장난인줄 알았는데 페이스북에 기사랑 글이 막 뜨는 거예요. 바로 갔죠. 그런데 그때 카메라는 가지고 있었는데, 운전해서 학교로 가는 1시간 내내 내가 현장을 촬영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를 딱 보자마자 못 찍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저는 말리러 올라가는데 그때 학교 언론사나 몇몇이 와서 찍었거든요. 근데 제가 못 찍게 말렸어요. 만약에라도, 저는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는 걸 원치 않았거든요.

옥상에서 요구했던 건 하나였어요. 대화 좀 하자. 그런데 정말 학교 쪽에서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학교 본부 찾아가서 문 열고 막 싸웠어요. 저는 막 말싸움하면서 뭐하는 짓이냐고 했는데 같이 간 후배가 울면서 무릎을 꿇고 비는 거예요. ‘우리 형 좀 살려 달라, 내가 잘못했다. 그때 가장 놀라운 건 난간 위에 같이 있어 준 친구였어요. 10명 정도가 말리러 올라갔어도 아무도 같이 있을 생각은 못했어요. 위에 있으면 정말 무서워요. 서서히 진정이 되긴 했지만 한 5시간은 있었어요. 하다하다 안돼서 서울에 있는 교수님들이 학교로 와서 부총장을 끌고 올라갔어요. 우리는 그 친구가 그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래서 당시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아무도 저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모두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제가 인터뷰하면서 처음 물어봤어요. 저도 솔직히 물어보고 싶긴 했지만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이야기만 하고 그랬어요. 편집 할 때도 그 장면은 잘 못 보겠더라고요. 제일 힘들었어요.

 

임종우: <졸업>은 일련의 상지대 투쟁이 종료된 다음에 그것을 재구성하는 작업이었잖아요.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는 현장을 보여주고 현장이 어땠는지에 대한 주인공의 인터뷰를 바로 뒤에 붙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에는 인터뷰를 영화가 한참 지난 후반부에 배치하는데요. 그런 선택을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박주환: 제가 종환이 인터뷰를 하면서 되게 놀랐어요.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 때 종환이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넣고 싶다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그리고 편집하면서도 내 영화의 엔딩은 종환이 인터뷰다, 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구성을 했어요.

 

임종우: 감독님의 고민이 정말 많이 담겼을 것 같습니다.

 

 



관객: 영화 잘 봤습니다. 저도 짧은 영화이지만 작품을 6개월 정도 찍고 있는데요. 6개월 정도로도 , 그만하고 싶다.’, ‘이렇게 시간을 들였는데 결국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고민들이 들었는데 10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버티면서 찍어나갈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박주환: 많은 분들이 굉장히 궁금해 하시는데,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냥 투쟁현장에서 함께 하는데 내가 카메라를 들 수 있고, 내가 남들보다 카메라를 조금은 잘 찍을 수 있으니까 찍었던 거거든요. 제가 졸업하고 나서 영상을 좀 배우고 싶어서 홍대 인근에서 학원을 다녔는데요, 그때 제가 페이스북으로 친구가 뺨맞는 영상을 보고 너무 열이 받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카메라 들고 내려오고 그런 거죠. 그 날이 명식이가 삭발한 날이거든요. 그때 느꼈어요. 이 친구가 강한 친구가 아니거든요. ‘얘가 정말 힘들겠구나, 모든 학교의 짐을 지고 있구나.’ 그걸 느끼니까 내가 서울에 있을게 아니라 얘 옆에 있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저는 작품을 찍으려고 거기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투쟁을 함께하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거든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이걸 언제 다 찍어서 영화를 만들지?’라고 생각했다면 저는 절대 10년을 못 찍었을 것 같아요. 지금부터 10년을 찍어서 뭔가 만들라고 하면 안할 것 같아요, 솔직히.

 

임종우: 당시에는 짧게 편집을 해서 현장성 있는 영상을 공개하려는 시도였나요?

 

박주환: 그 고민도 했으나 포기한 게, SNS 생중계가 되는데 제가 급하게 편집해서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제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이유는, 교직원들이 저를 불편해 하는 모습이 영화에 나오잖아요. 저는 2005년부터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직원들과 알아요. 그땐 학교가 분쟁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친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투쟁현장에 나타나면 교직원들이 되게 제 눈치를 보는 걸 느꼈거든요. 그래서 제가 카메라를 들고 거기 있었어요.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형편없었는데 저라도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몸을 사리는 게 느껴졌어요.

 

임종우사실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고민이기도 하거든요. 조금 이야기를 달리하자면, 세월호 사건 이후에, 세월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어느 시점까지 기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그 이후에 재구성해서 영화관 혹은 영화제라는 플랫폼을 통해서 공개를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런 고민들이 계속 있는데요. <졸업>도 그런 질문을 남기는 것 같아요. 결국 상지대가 정상화되는 방향으로 투쟁이 종료가 되었지만, 만약 상황이 달라졌더라면 이 <졸업>이라는 영화는 또 어떻게 만들어질 것이며 어떻게 공개를 해야할 것인가 하는. 지금은 상상에 맡기는 일이 되었지만 그런 고민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관객: 저는 사건에 대한 투쟁보다도, 이 영화를 평범한 청춘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회에 훌륭한 어른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합니다.

 

박주환: 마지막 질문이 빨리 나온 것 같아 당황스럽긴 한데요.(웃음) 저는 <졸업>을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어요. 보통 감독들이 영화작업을 마치면 다음 작품을 고민을 하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저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영화가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씁쓸한 지점이 있잖아요. 편집을 하고, 지금의 학교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10년간 치열하게 싸웠던 학생들에게 이 투쟁을 무엇이었을까? 이 투쟁이 무엇을 남겼을까? 개인적인 고민은 있어요. 잡혀간 친구들, 치열하게 싸웠던 학생들한텐 뭐가 남았지? 뭔가 바란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영화를 편집하면서 마지막을 너무 행복하게는 마무리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그래요. 촛불 집회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학교에 오고 학교 문제는 해결됐고 지금 사회도 많이 좋아졌다고들 하잖아요. 저는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기도 했어요. 그 이후에 우리의 삶은 정말 편해졌나? 그래서 이렇게 편집을 했습니다.

 

임종우: 마냥 해피엔딩만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이 영화에 촛불정국이 나올 때 제가 느낀 감정은 약간의 허무와 씁쓸함이었어요. 정권이 바뀌었으니 해결된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왔기 때문에 해결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지난한 싸움들은 어떤 의미일까? 그런 지점들에 대해서 감독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주환: 저도 그런 느낌은 받아요. 그런데 2011년 당시에 10여개 학교가 투쟁을 했지만 그때 이후로도 싸움을 지속한 학교는 상지대밖에 없어요. , 정말 바쁜 문재인이란 사람이, 강원도 원주에 있는 상지대에 갔을까 고려를 해보셨으면 하고요. 당시에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서 걸기도 했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있었어요. 10년간 사람들이 계속 싸워왔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2016년 총선 이후에 민주당 교육 관련 의원들 10명중에 9명이 오셨거든요.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정말 작은 학교에 말이에요. 그게 현안이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싸웠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으면 아직도 싸웠을 거라고 보거든요. 촛불집회 없었고 정권이 유지됐다면 상지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 같아요. 그건 부인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그만큼 정치가 중요하고요.

 

임종우제가 듣기로는 촛불정국에 대한 푸티지가 처음 인다페에서 공개됐을 때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 이후에 푸티지를 넣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박주환: 우상호 의원이 학교에 오고 나서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문재인도 오고, 바로 해결되는 씬이 나오면 진행자분이 말씀하셨던 씁쓸함이 배가 되거든요. 일단 저는 촛불집회라는 상황을 왜곡되지 않게 잘 넣고 싶었어요. 이 촛불집회 씬에 어떤 한명이 클로즈업 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오길 원했는데 그 영상이 저한테는 없었어요. 제가 촛불 당시 트럭 위에서 발언하는 씬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2016년도에 지역에서 촛불집회 준비하고 발언도 몇 번 했지만 찍어놓은 영상이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요. 그것도 넣고는 싶어서 고민을 하다가, 인다페 상영 이후에 <자리>의 최종호 감독님한테 이야기를 하니까 촛불집회 컷을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발언하는 영상도 있을 것 같아서 수소문해서 찾았어요.




 

관객: 만약 졸업이 가장 큰 목표였다면 투쟁 대신 졸업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영화에서 실제로 어떤 과는 6주차 수업 거부를 종료하기도 해요. 출연진 분들이 10년이란 시간동안 졸업도 하지 못하는데도 투쟁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박주환: 제 영화를 보고 그런 말씀들을 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학교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아요, 솔직히.(웃음) 학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거기 있던 사람들... 2010년에 저와 아무 관계없던 친구가 울부짖는 영상을 보면서 되게 많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상지대학교에는 10년 내내 그런 친구들이 있었어요. 제가 투쟁을 10년간 봐오면서 어떤 논리적인 합리성, 정의,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학교 졸업하고 1년간 학교를 안 갔어요. 짜증나는 일도 많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요. 그런데 명식이가 그렇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해서 카메라 들고 다시 내려갔고요. 그리고 종환이가 대토론회 씬에서 학생들이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저도 느끼는 감정이에요. 상지대학교 선출직 간부로 나가려면 첫 번째 공략이 상지대를 정상화하겠다, 민주화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저도 그렇게 말했었거든요. 그런데 아무것도 된 게 없어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총학생회를 세우려고 노력들을 해왔고요. 내가 하진 못했지만 어떻게든 이어주고 싶어서요. 그런데 다들 안하려고 해요. 저도 승현이가 3개월간 계속 술 먹이면서 해야 된다, 해야 된다 하기에 넘어가서 했던 거거든요.(웃음) 앞날이 그려지니까요. 너무 힘들겠구나.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들, 계속 이어왔던 사람들의 정신을 끊으면 안 되겠다는 미안함이 모두 있는 거예요. 그렇게 10년이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임종우: 졸업이란 영화가 독특한 게, 액티비즘을 영화가 드러내다보면 어떤 집단이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졸업>은 안에서도 차이가 있어요. 가령 학생들은 계속 투쟁현장에 남아있겠다고 하고, 교수들은 지금은 잠시 물러날 때니까 해산하자고 하는데요. 교수들은 징계를 받거나 파면되지 않는 한 정년까지 계속 소속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학생들은 그렇지 못한, 일시적인 신분의 사람들이잖아요. 거기서 투쟁에 대한 생각이 다르게 드러났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수업거부가 있었을 때, 총학생회 사람들의 투쟁의 방식과 그 외 학생들의 방식이 다를 수 있잖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박주환: 그건 저도 계속 느꼈어요. 교수, 학생들이 가진 특성들이 다 다르잖아요. 목표는 같아요. 그 방식이 달랐던 것 같고요. 교수, 교직원들이 정년이 보장되니 그냥 총장 말 잘 듣고 가만히 있어도 되잖아요. 그런데도 싸웠잖아요. 저는 그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만약에 결혼하고 가정이 있는데 잘릴 각오로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저는 선뜻 했을 거라고는 말 못하겠어요. 그 마음도 이해가 돼요. 그래서 학생들은 더 가열차게 싸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생들은 무기정학 정도에서 그치잖아요. 그럼 다시 시작할 수는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투쟁의 강도나 이런 다른 지점들이 있을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수업 거부는, 수업을 4번 이상 빠지면 F를 받잖아요. 그것처럼 학교를 6주나 빠지면 보강을 할 시간도 없는 거예요. 90년도에 세종대에서 그렇게 수업거부를 하다가 학교랑 교육부에서 학생들을 다 유급 시켜버린 사례가 있어요. 그런 사례가 있으니까 종환이도 학생들과 회의를 통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한 거예요. 저는 그 학생들이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세종대 사례에서도 유급 이후에 학생회가 다 깨졌대요. 원망이 생긴 거죠. 그래서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수업 거부를 지속한들 학교 측이 말을 들을 상황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교육부가 얼마나 무관심한지, 그게 더 놀라웠어요. 총장은 그렇다쳐도 교육부라는 곳이. 정말 형편없는 정부였구나 했어요. 





임종우: 계속 관객분들 질문 받아보겠습니다.

 

박주환: 지금 객석에 영화 출연한 분도 있거든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한데요. 저기 교문 앞에서 "왜 막습니까?" 라는 대사를 친 학생입니다.

 

관객(영화 출연): 그날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방문을 한 건데, 학생들이 차 타고 올라오는 것도 차 문을 다 열고 검문을 했어요. 그럴 수 있는 권한이 학교에겐 없잖아요. 10년간 그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더 많았고요. 저는 아직 졸업은 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요.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이유는 졸업을 하려고입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볼 자신이 없었어요. 저도 이 문제에 2~3년 정도 구성원으로서 시간을 함께했었으니까요. 저는 지금 원주에 남아있는데요.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는 저 시점에 저도 학교를 떠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너무 잘 봤고, 4명의 선배들이 나와서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으며 엔딩을 맞이했지만, 그 뒤에 무엇이 남았을까 생각해보면 공허함이 커요. 그 뒤에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에 나오진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10년이란 시간동안 자신을 소모하면서, 한 가지 공적인 이유를 위해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상황들이 끝났음을 받아들이고, 이후에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한 고민을 처음으로, 감독님이자 저의 선배님께 말씀을 드리게 되었네요. 감독님 덕분에 다음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고요, 무엇보다도 10년간 함께 투쟁한 사람이자 관찰자로서 담아주셔서 감사하고 축하드립니다.

 

박주환: 제가 영화를 꼭 만들고 싶었던 이유가 뭐냐면, 위로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서예요. 10년 동안 다녔던 학생들은 저것 때문에 취업을 몇 년간 못했던 사람들도 많고요. 당시 싸웠던 학생들이 모이면, ‘그래, 학교 좋아졌다. 그런데 우리한테 남은 건 뭘까?’ 라는 질문을 하는데 저도 답을 못하겠어요. 그래서 영화라도 만들고 싶었어요.

제 영화를 김동원 감독님이 처음 보자마자 이건 오기로 만든 다큐멘터리라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 오기가 그런 거예요. 너무 허무한 지점들이 있어요.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그 중요한 시절에 어떤 명분, 정의를 위해 싸웠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시 함께 학교 다녔던 학생들에게 헛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의 청춘은 멋있는 것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완성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방금 말씀해주신 감정은, 상지대 구성원들만 가지고 있는 감정일수도 있어요. 다른 분들이 보실 때는 잘 해결됐구나.’ 하겠지만 당시의 학생들은 그런 감정들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저는 학교가 더 이상 망가지지 않고,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거라도 없으면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우니까요.

 

임종우: 상지대 투쟁에 연대했던 대학들도 있다 보니까, 그분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또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합니다.

 

박주환: . 삭발했던 동덕여대 친구랑 여럿이 인다페때 영화를 보고 뒷풀이 했는데 그런 이야기들 하더라고요. 자기들도 총학생회장 했지만 졸업하고 사회 속에서 다 잊고 있었대요. 다들 그때를 기억하려 하지 않아요. 학교측이 회유하고 비리재단이 장악하게 된 학교도 많아요. 실패한 투쟁인거죠. 그분들이 내가 저렇게 뜨거웠던 적도 있구나,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제가 상영회를 다니면서 느끼는 건데, 2011년에 상지대가 연대투쟁 다닐 때가 반값등록금 운동이 시작될 시기였어요. 학생운동이랄까, 이런 게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당시에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은 영화에 공감을 하는데, 지금 17,18학번 학생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는 반응도 있더라고요. 당시를 경험했던 사람들과 지금의 대학생들은 다른 시선이 있다는 걸 많이 느껴요.

 


임종우: 이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관객 분들께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실까요?

 

박주환: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요즘 이런 독립영화, 독립 다큐멘터리 사람들이 정말 안 봐요. 저는 항상 어떻게하면 이걸 많이 보실까 고민해요. 여기 계신 분들 오늘 영화 재미있게 보셨으면 사진하나 찍어서 SNS에 해시태그 해서 올려주세요. 그냥 졸업이라고 쓰시면 너무 유명한 영화가 있어서 묻혀요. ‘다큐졸업이라고 올려주셔야 제가 보고 하트 눌러드려요.(웃음) 그래서 정말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오늘 좋은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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