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근간을 서로 채워주는 일
〈열 개의 우물〉 인디토크 기록
일시 2024년 10월 31일(목) 오후 7시 30분 상영 후
참석 김미례 감독
진행 손희정 문화평론가
*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민지 님의 기록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서로에게 건넨다. 그 물로 저녁밥을 짓고 하루를 살아간다. 〈열 개의 우물〉은 그렇게 서로의 손에 기대어 생계와 투쟁을 버텨낸 이들에게 찬사를 표하는 영화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돌봄에 노동이라는 이름이 붙기까지 얼마나 많은 싸움과 모욕이 있었을까. 지금의 시대를 만들어준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인디 토크 현장을 소개한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이하 손희정): 안녕하세요. 김미례 감독님 모시고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분이 흥미롭게 보셨고 여러 가지 질문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오늘 개봉 후 처음으로 관객 앞에 서시는 만큼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소감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미례 감독 (이하 김미례): 관객 입장에서 큰 화면으로 저 영화를 봤는데, 저한테도 정말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저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봤습니다.
손희정: 감독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은 한편으로는 오늘 첫 GV를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서도 극장에 오실 때마다 새로우실 것이다, N차 관람을 해보자는 제안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제가 몇 가지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저의 경우 김미례라는 다큐 감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홈에버 투쟁을 다뤘었던 〈외박〉이었습니다. 그런 여성 노동자 혹은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감독님의 다큐를 보면서 오래 지켜오신 문제의식이 이 작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동, 빈곤, 돌봄이나 어머니 혹은 아내로서의 위치 등 여러 결의 레이어들이 여성의 삶을 이루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쭉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이번에 인상적이었던 건 여러분들도 아마 받으셨을 책자인데요, 굉장히 열정적으로 이 책을 제작하신 것 같았습니다. 책자를 보면 감독님이 영화에서 직접 하지 않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오랜 세월 여러 작업을 하고 다녔지만, 지금에야 비로소 돌봄이라는 문제, 아이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큐는 우연히 찾아간 한 지역 책방에서 김현숙이라는 활동가를 만나면서 시작되는데요. 저는 이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이 궁금했습니다. 돌봄이라는 문제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김현숙이라는 존재가 보였던 건지, 아니면 김현숙이란 존재를 만나면서 관심사가 새로 생긴 건지, 그래서 김현숙과의 만남이 필연인지 우연일지도 궁금해졌습니다.
김미례: 저는 작업할 때 노동이라는 거시적인 접근을 해오면서 아이는 저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혼자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이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면 안 된다는 강박과 모성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제 아들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지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처음 할 때부터 엄마였었던 거죠. 그런데 엄마라고 불리는 순간이 부담되고 저를 없앨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서 그것을 무시하고 제 안에 가둬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여성 노동이라고 하는 것을 들여다볼 때마다 엄마들이 생계, 또는 사회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면서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진다는 이야기를 하시고, 동시에 거기에 항상 아이의 문제가 같이 걸려 있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도 하셨어요. 그걸 보면서 사회 구조적으로 이 두 문제가 같이 풀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관심을 가지는 와중에 80년대 십정동이라는 마을에 탁아 운동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됐어요. 아이의 문제는 곧 일하는 어머니, 일하는 여성들의 문제이자 지역의 문제, 빈곤의 문제였던 거죠. 이런 문제들이 연결되어 집약된 것을 알고 사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김현숙 언니의 경우 그렇게 직접 찾아가서 만났던 것입니다. 언니를 만나러 가니 언니는 자신보다 중요한 인물이 있다며 안순애 선생님, 유효순 선생님 등을 소개해 줬고 그분들도 다른 분들을 연결해 주셨어요. 그렇게 여성이 여성을 서로 연결하는 이야기로 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 축에서는 해님방을 운영하던 신소영 선생님을 꼭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분을 찾았고 선생님이 다시 다른 엄마들, 선생님들을 연결해 주셔서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손희정: 사실 자신의 삶에서 돌봄의 문제, 아이와의 관계의 문제가 관심사였다면 어떤 감독은 자신의 삶으로 카메라를 돌렸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김미례 감독님답게 다른 방식으로 카메라를 돌렸다는 게 저한테는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또 하나 궁금한 점은 감독님 작품들을 보면 내레이션이 많잖아요. 〈외박〉이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처럼 이 작품도 그런데 그런 방식을 선택하시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김미례: 저도 항상 내레이션을 덜려고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등장인물과 항상 합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유효순 선생님은 정년 퇴임을 한 후에 돌봄센터에서 한 아이를 맡아 돌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돌봄센터에서 싫어하니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는 등 여러 이해관계로 이야기 구조가 설득력 있게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내레이션으로 나름의 설명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손희정: 한편으론 감독님이 내레이션을 통해 개인의 삶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부분들과 연루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외박〉을 떠올려보면 여성 노동자들이 홈에버에서 해고되면서 복직 투쟁을 하는 과정들을 따라가는 작품입니다. 주부 정체성을 가지던 여성들이 노동자로 정체화되고 외박하는 투쟁을 시작하는데, 점거 농성을 하고 물 폭탄을 맞는 등 격렬한 싸움을 하는 가운데 카메라가 있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내레이션이 정치적이고 공적인 목소리가 되어 버린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도 일상적인 삶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화면 한쪽으로 엄혹했던 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자료 화면으로 등장하면서 돌봄이라는 개인적 화두가 사회적 문제로 전환되는 저력을 감독님이 보여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미례: 저는 항상 사회 안에 개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저의 삶이 사회와 긴밀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해서 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외박〉에 출연하셨던 분들, 그리고 저를 지지해 주신 여러 동지가 와 계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손희정: 사실 이분들의 싸움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빚지고 있는지 말씀드리고 싶고 이렇게 기록해서 기억하게 만드는 다큐의 역할이 크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GV를 준비하면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처음 봤습니다. 1970년대 일본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면서 전범 기업들에 폭탄을 터뜨린 테러리스트들을 쭉 찍으면서 소개하는 급진적인 싸움에 대한 다큐멘터리인데요. 딱 한 분이 여성 투쟁가셨어요. 그분이 출소하고 나서 자신을 딸처럼 보살펴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가족들이 에기타 씨를 위해 차린 밥상을 오래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폭탄을 터뜨리는 투쟁에 대한 이야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이 저에게 인상적으로 남았고 김미례 감독이 돌봄을 전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이전부터 쭉 관통해 온 문제의식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장면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미례: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던 투쟁가분께 어머님이 빨간 밥을 해주거든요. 우리가 두부를 먹이듯이. 그런 인간관계에서의 마음이 드러난 밥상이 저는 정겹고 좋아서 오래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손희정: 저는 그 밥상을 보면서 〈열 개의 우물〉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안순애 선생님은 동일 방직 같이 역사에 남은 중요한 싸움부터 농민 운동까지 하고 계시는데, 농민운동이라는 자리가 넓은 의미에서는 돌봄, 즉 먹이는 노동인 거잖아요. 그렇게 곡물을 키우는 노동의 장이 사라지고 농가가 무너진다는 고민까지 이 작품이 가져가는 것 같아서 놀라웠습니다.
김미례: 지금 안순애 선생님은 농민운동을 하신다기보다 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큰언니 같은 역할을 하고 계세요. 그분이 있는 자리에서는 남녀 차별이나 서열을 이용해 어른 노릇을 하는 등의 일을 하지 못하거든요. 그런 존재감 같은 것이 중요한 분 같습니다.
손희정: 다큐에 출연하시는 선생님들이 저에게는 기댈 언덕 같기도 합니다. 사회를 바꾸고 전환하려는 꿈을 꾸고 거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잘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델이 없어서 두려운 것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출연하시는 분들이 버티기만 한 게 아니라 행복하셨다고 얘기하시잖아요. 행복했던 순간들을 만들어오신 분들을 보며 저는 힘이 됐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는데요. 〈외박〉의 경우 여성 노동자 투쟁을 다루는 이야기인데 이 제목이 노동자가 놓여 있는 여러 중첩적인 삶의 조건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주 기가 막힌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렇게 제목에 공들이는 만큼 〈열 개의 우물〉 역시 어떤 이유로 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미례: 저는 작품마다 제목을 바꾸란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도 관객들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수했고 〈외박〉도 살림 하고 아이를 돌보면서 투쟁해야 하는 장면을 표현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열 개의 우물〉은 쫓겨난 철거민들이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터전을 찾는 이야기인데, 그러려면 일단 우물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처음에 십정동 철거민촌에 터를 잡고 우물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팠는데 바로바로 우물이 만들어져서 작은 우물들이 많다는 유례가 있었어요. 이게 가난하고 빈곤하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생계를 유지하고 그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마을을 만드는 여성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여성들의 모습과 닮아 있어서 이런 제목을 지었습니다. 십정동 위에는 큰 우물 마을도 있는데요. 그곳은 여러 사람들이 오랫동안 하나의 우물을 만들고 보다 조직되어 체계를 갖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인 거죠. 이렇게 흩어져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내는 분이 우물의 모습같이 느껴져서 제목 앞에도 작은 우물 정자를 만들어서 적어봤습니다.
손희정: 다큐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해님공부방에서 공부한 학생 분이 쓰신 이야기 중에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저는 이 말이 다큐의 많은 것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은 직선으로 갈 수도 있지만 중구난방으로 여기저기 갈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이 어디선가 만나 서로가 의존하고 서로를 돌보는 그런 땅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우물, 쌍둥이 우물, 작은 우물들이 결국 여러 사람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완성된 다큐 같기도 합니다. 이제 객석으로 마이크를 돌려보겠습니다.
관객: 과거에 운동하셨던 분들의 60대 이후의 삶은 어떨지 궁금증이 있었는데 그게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분들이 곁에 계속 있어 주는 것 같아서 저에게 인상 깊었습니다.
김미례: 저도 예전에 열심히 무언가를 하려 했던 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시고 이전의 삶을 어떻게 정리하고 계실까,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시는지 이런 것들이 궁금했었습니다. 여성으로서 열심히 살았지만 그런데도 삶이란 건 쓸쓸하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건데, 그 이후를 살아갈 때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자기 삶에서 놓치고 있던 것들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증이 있었어요. 안순애 선생님께도 그런 이야기를 드렸었는데 항상 도돌이표로 자신의 과거 이야기로 되돌아가곤 하시더라고요. 역시 그게 매우 큰 사건이어서 그걸 토대로 세상을 살아오셨던 것이고, 그랬기 때문에 현재의 자리에서도 다른 여성들에게 큰언니 역할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희정: 출연하신 선생님들은 작품을 보고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김미례: 모든 분이 자기 영화는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옆에 다른 분들이 아니야, 언니 얘기야 이렇게 말해주셨어요.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수평화시켜 버린 느낌으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손희정: 그것이 한편으로는 감독님께서 이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신 그 과정, 자신보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더 훌륭하고 흥미롭다며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넘기며 연결된 그 거대한 이야기를 잘 담아내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미례: 그래서 소개해 주신 분은 잘했다고 이야기를 하세요. 유효순 선생님 이야기를 잘 담아내려고 노력했는데 잘했다고 이야기는 하시지만 당신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시네요.
손희정: 개인적으로 그런 대화를 나누었을 때 가장 서운해하셨을 분은 최선희 선생님이실 것 같아요. 빈민 운동과 탁아운동, 노동운동이 다 겹쳐 있고 탁아운동이야말로 사회 전환을 위한 운동이었다고 설명하시잖아요. 저는 학문적인 언어에 훈련된 사람으로서 그 분의 말씀이 제가 이해하기 쉬운 언어였어요. 그런데 3분으로 짧게 나오셔서 그 선택이 궁금했습니다.
김미례: 그분은 정보를 주는 역할을 잘하시고 활동가로서 말씀을 잘하시는 분입니다. 설명이 귀에 잘 들어와서 딱 한 마디로 정리해 주시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캐릭터들이 다양하게 출연하는데 그 균형을 맞추다 보면 최선희 선생님의 캐릭터가 강하니 중요한 말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객: 현대 시대를 보면 기술의 발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중이고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등 상당한 변화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에 따라 개인주의나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그러면서 공동체가 많이 희석돼서 열 사람이 한 걸음을 나아가기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의 관점에서 가져갈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는 어떤 게 있을까요?
손희정: 저는 감독님께서 이 작품을 통해 관객과 무엇을 나누고 싶으셨는가를 얘기해 주시면 좋은 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미례: 저는 이 영화가 제 나이대의 사람들, 그 시대에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이어 나가고 사회생활을 하며 많은 일들을 해오신 분들께 따뜻한 위로가 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살아오신 그 삶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고 잘 살아오셨다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도망치지 않고 사셨고 안순애 선생님 말씀처럼 뒤돌아보면 떨어지는 곳이니까 거기서 버틸 수밖에 없었던, 버텨서 한 걸음이라도 나가야만 했던 그런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그것을 해낸 분들께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잠시라도 벚꽃 같은 것을 보며 행복한 것처럼 마음이 좋아지게 하는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희정: 결국 감사를 표현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버텨서 한 걸음을 내디뎌준 그 구체적인 행위들이 지금의 시대를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질문 주신 분께서 말씀하신 그런 디지털화는 플랫폼에서 몸을 갈며 일하는 노동자들, 착취당하는 여성들과 남성들같이 구체적인 몸들을 지우면서 가능해지는 판타지입니다. 이러한 비물질성을 부정하고 하루하루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노동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여성의 가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GV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카레를 해 먹었는데요. 칼질도 하고 카레를 만들면서 추상적인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 때도 구체적인 게 우리를 살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미례: 저는 이번에 배급까지 제가 맡아서 했는데요. 소책자를 만들 때 출연진분들의 글을 받아야 했는데 컴퓨터를 못 하시는 분들이 손 글씨를 써주시기도 하셨어요. 안순애 선생님과 박순분 선생님이 손 글씨를 써서 보내면 저희는 PDF로 받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힘드시잖아요. 그래서 직접 받아와야 했어요. 그러면서 종이에 손으로 쓴 글씨의 결, 질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분이 꾹꾹 눌러쓴 시간과 책상 등을 디테일하게 접하다 보니 그런 아날로그의 느낌이 굉장히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컴퓨터로 빠르게 타자를 할 때와는 다른 유대감과 교감이 서로에게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해준 손 글씨 같은 것들이 중요하고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손희정: 말씀을 들으면서 〈열 개의 우물〉이라는 제목에 대해 또 생각이 드는데요. 재미있는 건 공간성이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이건 분명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인데 왜 공간을 상상하고 그리게 하셨을까 생각했어요. 감독님 말씀을 들으면서 그게 물리적 거점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엄혹한 시기를 버텨내려면 온라인 역시 많은 운동이 조직되고 변화가 생기는 중요한 자원이긴 하지만 반드시 물리적인 거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몸과 몸이 만나고 얼굴과 얼굴이 만나는, 어렵고 갈등이 있더라도 반드시 부딪히는 그 자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70년대, 80년대 선생님들께서 만드셨던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여서 지도의 느낌을 주는 제목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관객: 평론가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저도 공간성에 대해 계속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장소에 대한 푸티지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어서 감독님께서도 공간성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드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천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빈민 운동 등을 취재하셨는데, 인천이라는 공간만이 가진 특수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서울에 있는 빈민촌과는 또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김미례: 네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지역이었고 또한 피난민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곳, 전쟁으로 인해 접점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 바닷가 근처에 공장이 많아서 굴을 따는 사람, 공장에 다니는 사람 등 생계를 유지하는 형태가 다양했던 것 같아요. 농촌에서 도시로 진입하지 못하고 여기에 모여 살아야 하는 지역으로서 특수성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관객: 저는 영화를 보며 이 여성분들께 많은 것들을 빚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여대를 나왔고 학교에서 시위나 운동 등 인권 관련 활동을 했는데요. 그런 것들을 하면서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스스로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면 그때 동지들과 뒤풀이하고 밤새며 입장문을 쓰는 일, 무언가를 더 해보려고 애쓰는 일이 재미있었던 것 같고 그게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때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이 많이 흩어져서 각자의 위치에서 살고 있는데, 그게 무서워질 때가 있어요. 이런 일들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는 게 두려운데, 안순애 선생님이 농촌에 내려가서도 이장을 하고 큰언니를 하며 즐겁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저에게 희망을 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희정: 감독님께서는 이렇게 힘든 다큐 작업을 계속하시는 동력과 이유도 궁금합니다.
김미례: 재미가 없으면 이걸 감당하고 지속하지 못하겠죠. 저도 마찬가지로 모든 건 재미와 가벼운 수다, 이런 즐거움으로 모든 것이 지속된다고 생각합니다.
관객: 저는 영화에 출연하신 분들께 친밀감을 느끼고 존경하게 되었어요. 안순애 선생님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는 게 좋았고 투쟁가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잖아요. 그것을 다 거부하시면서 그때 공포를 느꼈고 혁명하고 투쟁하기보다는 살기 위해 그렇게 지냈다, 그런 말을 진솔하게 말씀하시며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하는 게 소중했습니다. 동시에 그것 때문에 감독님이 힘드셨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욕심이 있으셨을 텐데 선생님들이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고 보여줄 만한 일은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 감독님은 어떻게 계속 질문을 하셨고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셨는지, 관계의 긴장을 어떻게 잡고 가셨을지 궁금합니다.
김미례: 촬영본은 항상 그렇듯이 정말 많습니다. 같은 내용의 답을 반복하시는 걸 듣다 보면 하고 싶으셨던 말을 제가 선택하기도 하고, 다른 분들과 가볍게 수다 떠는 와중에 인터뷰를 서로 끌어내며 하시는 말들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런 토론의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손희정: 이제 마무리로 소감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미례: 극장 상황이 많이 어려운 시기인데 관객분들 한 명 한 명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바쁘신 시간 내서 함께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시간 배정해 주신 인디스페이스에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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