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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Review] <해원>: 아직 과거가 되지 못한 과거들

by indiespace_한솔 2018. 5. 28.






 <해원 한줄 관람평


이수연 | 진술의 궤적을 훑는 과정 자체로도 가치 있음을

임종우 | 잔혹한 상처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

최대한 | 재현의 부족함에 대한 아쉬움과 상처투성이의 한국 근현대사

김민기 |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윤영지 | 아직 과거가 되지 못한 과거들








 <해원 리뷰 : 아직 과거가 되지 못한 과거들

 




*관객기자단 [인디즈] 윤영지 님의 글입니다. 




영화의 제목은 '해원'이다. 풀 해 자에, 원통할 원 자를 쓴 <해원>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다른 것보다 해원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어떤 관점에서 이 영화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있으면 더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많이 없다. 사건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이나 뛰어난 영화적 형식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래서 인상 깊은 이미지나 빼어난 작법으로 직조된 서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인다. 그것은 바로 국가 폭력으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100만의 원혼과 그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상처와 아픔에 대한 해원 그 자체이다.

 




<해원>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알지만 모르는 척해왔던 흩어진 역사를 최대한 모두모으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는 1946년 화순 탄광 사건과 대구 10월 항쟁을 시작으로 1947년 제주 4.3사건뿐 아니라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고양시 금정굴 학살, 김포, 강화, 남양주, 양평, 여주 등 말 그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행되었던 학살의 역사를 모두 담아낸다. 이는 사실상 영화의 가장 큰 득이자 실로서 작용한다.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피해 사실과 증언을 알리려는 시도와 노력 자체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지만, 영화 자체는 정보의 나열과 전시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원>은 근거와 사례를 제시하며 자신이 가진 명제의 어떠한 해답을 계산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영화라기보다는 어디서부터 답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이 거대한 사실에 질문을 던지고, 함께 대답을 도모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영화인 것이다. <해원>은 관객을 어떤 도착점으로 이끈다기보다는 이제 함께 물음을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으로 데려다 놓는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해원>을 보며 마주하는 통렬함은 이 모든 상처와 폭력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데에서 온다. <해원>이 다루는 상처와 고통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이다. <해원> 속의 상처는 아직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현재 진행 중인 참혹한 사실들을 목도했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과거가 되지 못한 과거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이다.

 




<해원>은 또한 영민한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을 흔들어놓는 영화는 아니다. 학살의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은 말 그대로 증언의 나열에 그치고 영화의 중간중간 삽입되는 위령제의 장면이나 배경 음악처럼 활용되는 추모곡들은 간혹 관객이 울기 전에 먼저 영화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해원>이라는 영화가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증언의 나열일지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96분이라는 시간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 방언인지도 알기 힘든 말씨와 정제되지 않은 단어들, 어떤 때에는 차분히 억눌린 감정으로, 어떤 때에는 흥분과 상기를 수반한 채 관객에게 닿는 증언의 언어들은 귀를 기울이고 알아들으려고 집중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마음 다 해 집중해야만 제대로 들을 수 있다. 마치 분명히 존재하지만 구석진 한 켠에 희미하게만 쓰인, 노력하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역사처럼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곱씹으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끄럽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눈물이 흘렀다.

 




<해원>이 취한 영화적 방법론은 이렇듯 일정 부분 지극히 보편적이고 자주 아쉽다. 하지만 구자환 감독은 더 넓은 소통을 위해 가끔은 영화감독이라는 자의식과 빼어난 작품을 만들리라는 야망을 스스로, 일부러 버린 듯 느껴졌다. 참혹하고 방대한 역사와 과거가 되지 못한 과거를 이야기하는 수많은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는 경험을 보다 많은 관객들에게, 보다 보편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것이 그가 가진 가장 큰 목표인 듯 보였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몇몇 사건들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그 자세한 설명을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감독의 의도는 반쯤 성공하고 반쯤 실패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또한 현재 진행형이다. 영화는 아직 상영 중이고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아직 과거가 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 <해원>이 끝남과 동시에, 그제야 시작될 수 있는 어떤 해원이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글을 마치며 다시 한 번 묻는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는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영화 밖에 있다. 희망은 영화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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