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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분노’ 아닌 ‘공감’을 부르는 민중가수, 연영석

by Banglee 2008. 7. 2.
오랜만의 기사 스크랩!
경향신문 이로사 기자님의 연영석과 관련한 기사입니다.
스스로 문화노동자라 부르고 있는 연영석에 대해서 영화에서는 약하게 다뤄진 부분들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는 글이네요.
분노가 아닌 공감으로, 그래서 감동으로 이어지는 연영석의 노래는
그의 홈페이지
"게으른 피"에서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6041533415&code=900315

‘분노’ 아닌 ‘공감’을 부르는 민중가수, 연영석
입력: 2008년 06월 04일 15:33:41
ㆍ다큐 영화 ‘필승 ver2.0…’ 6일 개봉

격렬한 투쟁이 끝난 후 전단지만 흩날리는 텅빈 건물 로비. 머리띠를 두르고 어깨를 늘어뜨린 한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 “왜 이리 세상은 삭막해지는가/ 아 나는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 내 할 수 있을 때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만 갖는 세상을.” 카메라는 노랫말을 읊조리는 남자의 입술을 비춘다.

홍대 미술대학을 나온 연영석의 주변엔 대학교 강의도 하고, 작품도 팔고, 건물에 자기 작품을 세우는 동기들이 많다. 그는 “근데 뭐, 별로 안 부럽다”고 했다. 기자는 ‘그 사람들이 당신을 부러워 할걸요’라고 생각했다.
노동가요는 현실과 유리돼 있다. 선동적 구호로 가득한 노동가요는 무관심한 일반인에겐 다른 세상 얘기다. 대학에 갓 들어간 새내기들이 습득하는 의미없는 통과의례이거나 노동자 투쟁의 결의를 불태우기 위한 ‘기능적’ 노래 정도로 치부된다.

‘문화 노동자’ 연영석(41)의 노래는 다르다. 그의 노래는 거대한 이념에 집착하거나 섣불리 대중을 선동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다. 대신 고단한 시대를 사는 노동자들의 삶이 다른 어떤 노래보다 정직하게 담겨있다. 치열한 진격의 순간만이 아니라, 다시 홀로 자신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다. ‘투쟁’보다 ‘일상’이 묻어난다.

햇살 가득한 초여름 오후, 다큐멘터리 영화 ‘필승 ver2.0 연영석’(감독 태준식·6일 인디 스페이스 개봉)의 개봉을 앞둔 연영석을 만났다. 영화는 민중가수 연영석의 노래와 삶을 지금, 여기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운동의 단면들과 끊임없이 교차시킨다. 그 조응은 의외로 가장 신실한 한국 사회의 자화상을 만들어냈다.

연영석은 자전거를 구르며 나타났다. 여린 등짝 위에 얹힌 기타는 그의 삶이 짊어진 무거운 짐같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문화노동자 연영석입니다.” 순박한 웃음에 단호한 어투. 그는 “80년대 민중가요는 권위적이며 남성적”이라고 했고, “게으르게 살고 싶다”고도 했다. 기존의 민중가수에게 덧씌워진 ‘투쟁’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얘기들이었다.


‘문화 노동자’가 부르는 우리의 노래

연영석은 스스로를 ‘문화 노동자’라 부른다. ‘민중가수’도 있고 ‘예술가’도 있는데 왜 하필 문화 노동자라는 생소한 말을 사용하는 걸까.

“노동자로서 내 존재의 선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통 예술가는 신비화돼 있습니다. 천재적이고, 감각적으로 타고났다는 등의. 그러나 이미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는 이상적 가치보다 상품적 가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여받고 있어요. 수많은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자기 작품을 소비시키기 위한 적극적 노력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미 예술가들은 노동자화돼 있죠. 저는 예술적 가치를 구현하려 하지만, 현실에 발 딛고 있는 노동자예요. 함께 투쟁하려면 스스로 적극적인 노동자로서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공연을 보는 가장 빠른 방법은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랜드, 코스콤, 이주노동자, KTX 여승무원 등 농성 현장엔 언제나 그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현장’에서 그를 찾는 연락이 온다. “음악 없이 현장이 안 되고, 현장 없이 음악도 안 된다”는 그는 벌써 10년째 이 생활을 하고 있다.

노래는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다. 음악을 시작한 건 서른두살. 그 전엔 미술을 했다. 홍대 조소과 출신이다. 대학 졸업 후 노동미술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작업실에 틀어박혀 노동자들과 동떨어진 미술 작업을 한단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첫 노래가 1집 ‘돼지 다이어트’(1998)에 실려 있는 ‘라면’이다. 기타 코드조차 모르던 그의 가슴에서 나온 날것의 목소리였다.

“돈을 벌어야 하나, 미술학원에 취직이나 할까 생각을 많이 했죠. 돈을 벌다 돌아오면 운동은 어떡하지, 생각했더니 운동을 떠나선 살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게 노래예요. 전에도 음악하는 친구들을 보면 멋있다, 나도 해보고 싶다, 생각은 했죠. 근데 현장을 다니다보면 노래 부르는 사람들한테 밥을 주거든요. 그래서 노래 부르면 ‘밥’은 굶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시작했죠(웃음).”

첫 데뷔 무대는 록밴드 ‘천지인’의 공연을 펑크 낸 가수의 ‘대타’였다. 이후 지금까지 ‘돼지 다이어트’ ‘공장’(2001), ‘숨’(2005) 세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2006년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칼국수, 라면, 부품, 돌 등 이전의 민중가요와는 다른 소재를 갖고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가 하면, 신자유주의 사회를 사는 민중의 삶을 통렬히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노래는 유쾌하고 전복적인 동시에 슬프고 처연했다. 일상생활에서도 공감을 얻기 충분했다. 때문에 음악 그 자체만으로 평가받지 못하던 민중가요에 대한 인식도 바꿔놨다.

연영석(왼쪽)과 영화 공개후 강제출국된 검구릉씨(가운데).
음악평론가 박준흠씨는 연영석의 노래를 두고 “한국 노동가요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평가했다. “의미는 있지만 막상 듣기는 꺼리는 ‘죽은 노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좀, 게으르게 살자고요

그의 닉네임은 ‘게으른 피(lazy blood)’다. 홈페이지 이름도 같다. ‘게으르게 살고 싶다’ ‘밥(만 먹고 살 수 있나요)’이란 노래들도 있다. 일하려고 발버둥치는 현장이 일상인 사람과 썩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현장의 ‘동지’들도 “인마, 부지런히 투쟁해서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데, 그 말이 맞는 기가” 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르다. “부지런히 사는 게 내 의지가 아니라 자본이 만들어 놓은 틀에 따르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강요하는 시간=생산량이라는 시스템을 게으르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틀 안에서 노동자들은 잔업에 특근도 하고, 노동에 중독돼 있어요. 돈은 200만원을 벌어도 300만원을 벌어도 영원히 넉넉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고성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지만 저성장이 가지는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식적 환기가 필요하단 생각에서 붙인 별명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삶은 팍팍하기 짝이 없다. 각종 노동·인권 관련 행사에 불려다니지만 넉넉히 돈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영화 속에 나오는 한 지방 인권영화제는 출연료로 ‘15만원’을 제시한다. 차비, 밥값만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래도 “어떻게 예산을 꾸려가는지 다 알아서”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아는 게 병이다. 그냥 적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 뿐이다.

영화 속 조그만 옥탑방이 연영석이 사는 곳이다. 변변한 가구 하나 없다. 집은 찍지 말라고 극구 말렸지만 태준식 감독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삶이고, 때로 다른 이들에게 권해주고 싶기까지 한 괜찮은 삶의 방식인데, 미디어에서 동정의 눈길로 비추는 것이 싫었다”고 했다.

“현장 사람들을 만나면 미안한 것도 있어요. 대다수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밀려온 사람들이고, 선택의 길이 없었던 이들이에요. 그러나 저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거잖아요. 누가 떠민 것도 아니고, 제가 선택한 삶입니다. 그런데도 민중가요는 고난이고 힘들고 못살고 하는 식으로 미디어에 비쳐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건 옳지 않죠. 전 이렇게 살아도 제 가치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괜찮아요. 다른 이들도 그런 가치 판단을 좀 했으면 좋겠고요.”

특별상을 받은 2006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노래하고 있는 연영석.
지금, 여기의 노동가요

영화는 여기저기 투쟁의 현장을 비춘다. 노래와 영상들은 짧지 않은 여운을 남기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해결된 건 아무 것도 없다. 코스콤 사측은 가까스로 도달한 합의를 깨버렸고 비정규 노동자들은 여전히 천막농성 중이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 검구릉씨는 영화 공개 이후 결국 강제출국됐다. 세상이 그의 목소리를 자꾸 외면하는 탓인지 현장에서 얻는 에너지가 예전보다 약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지금 노동운동 상황이 좋은 건 아닙니다. 저 스스로도 보이는 게 힘든 상황만 있다보니 많이 우울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꼭 있든 없든 해온 일이 그거라 감각이 그 쪽으로 집중되니까요.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온 말이에요. 1년쯤 시간을 두고 책도 읽고 땅도 파고 여행도 다니고, 그냥 멍해 있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말이 그렇지 제 버릇 개 못 주는 법이다. 아무리 그래도 현장에서 등을 돌려 휴식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가수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다만 그는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고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됐음 좋겠다”고 말했다.

“변화의 시기에 와 있어요. 예전엔 노동운동이 너무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다수의 대중들은 노동자들에게 다른 요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공장 안의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문제에 대해 노동자들이 자기 입장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은 대중들과 소통하는 그 방법 찾기가 잘 안 되는 상태입니다. 내 음악도 그 흐름 속에서 함께 그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많은 음악전문가들은 노동가요가 진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현장에서만 존재를 인정받는 단계를 넘어서 대중성을 획득해야 하는 시기에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연영석이 이야기한 ‘노동운동 변화’의 지형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의 노래가 현실과 괴리된 민중가요를 생활 속으로 끌어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의 노동가요, 민중가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노동가요는 노동조합이 있는 이상 수요가 있으므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안으로 굽는 방식이 아니라 밖으로 확장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 투쟁을 알리는 수준을 넘어야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왜 사회적으로 공동책임을 져야 하는지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문화적 창구들이 필요하고, 민중가요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아쉬운 건 이런 고민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재생산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것을 가슴에 가져갔으면 합니까.

“자신이 어떤 문제에 개입하거나 자기 의견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인터넷 댓글도 있고 촛불을 드는 방식도 있겠죠. 지나가다 농성 현장을 보고 음료수 한 병을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작은 관심이 결코 작은 게 아니란 걸 보시는 분들 스스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들이 정말 외롭구나, 고립돼선 안 되겠구나 느끼고 격려의 말이라도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당사자에겐 정말 크게 다가올 겁니다.”

인터뷰 중에도 여러 번 현장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마다 그는 스케줄을 체크했다. 그의 수첩엔 각종 스케줄이 빽빽했다. 이날은 장애인 콜택시 노동자 원직복직촉구집회 현장 공연이 있는 날. 다시 자전거에 오른 그의 발놀림이 빨라졌다. ‘이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할 줄 아나’를 고래 고래 부르던 영화 속 여학생이 떠올랐다. 그녀는 분노에 차 있기보다 흥에 겨워 했다. 앉은 자리에서 춤을 추다 못해 무대로 올라가 그가 부르던 마이크를 빼앗아 악을 썼다. 흥에 겨운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부른 노래를 일상에서도 이어 부른다. 노래는, 그럴 때 삶이 된다.

<글 이로사·사진 강윤중기자 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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