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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s 페이스] <벌거숭이> 시네마&철학강좌 '햄릿에게 카인이 묻다' (인문학자 고병권)

by 도란도란도란 2013. 10. 18.


 인디's 페이스 (Indie's Face) 

상영 후 감독 배우들과 함께하는 인디토크와 인터뷰, 상영작 리뷰 등 인디스페이스의 다양한 소식들을 전하는 인디스페이스  기록 자원활동가 입니다. 극장 안 이야기들을 전하는 인디스페이스의 얼굴, <인디's 페이스>와 더욱 알찬 소식 만나세요 :D





영화: 벌거숭이 (감독 박상훈)

일시: 2013년 10월 13일 

참석: 인문학자 고병권


햄릿에게 카인이 묻다_ 삶과 죽음 그리고 죄에 대해


 영화를 보고, 햄릿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말에 대한 반론이라는 것이죠. 살거나 죽거나 한다면 진짜 해결이 난 것이고, 그런데 진짜 문제는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즉, 햄릿의 to be or not to be가 되지 못하는 것이죠. 영화 속 돌탑을 지키는 노인은 영화에서 “살려면 살고, 죽으려면 죽어” 라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인간에게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동물에게나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살고, 죽음이 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삶과 죽음이 외면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 말이죠. 하지만 사람에게는 삶이라는 것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고, 그렇다고 죽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생과 사는 분명하지가 않은 것이죠. 인간은 죽음을 품은 채로 살아가는 셈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박일래’에게서 최초의 인간인 ‘카인’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카인이 자신의 혈육인 동생을 죽였고, ‘박일래’는 아내와 아들을 죽였다는 점에서 둘은 흡사합니다. 성서에는 카인이 추방된 후 어떻게 되었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 추측컨대 박일래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죄의식은 그를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도록 했을 것이며, 동생의 유령이 출몰하는 모든 곳에서 안식을 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카인은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없는데,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결국 그는 살 수도 없지만, 누구도 죽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이 또한 ‘박일래’와 흡사한 점입니다. 삶과 죽음에서 모두 추방된 존재, 그 경계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죠. 아마 이러한 상황이 앞서 말했던 햄릿에 대한 반박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처음 강연을 시작 할 때, ‘살려면 살고, 죽으려면 죽어’라는 말은 동물에게 해당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죄의식을 매개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신이 낳은 인간인 아담과 인간이 낳은 인간인 카인. 저는 아담이 동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외면적 형상이 인간인 동물로서의 인간인 것이죠. 그는 단지 생존(삶과 죽음)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외면적인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내면’이 없는 존재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아담의 이야기는 인간의 탄생이라는 이야기 보다는 ‘죄의식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탄생은 도덕의 탄생이고 종교의 탄생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박일래’는 초반에 반동물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들을 맡기려다 실패한 그날, 다른 걱정 보다는 ‘수제비를 먹자’라고 하였고 심지어 집에 와서는 싱크대에 소변을 봅니다. 이는 다른 것 보다는 먹는 것, 배설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동물적 인간으로 보이는 단서들입니다. 또한, 그는 주차 문제로 다툴 때 아내에게 “내가 남편이냐? 동네 개만도 못한데.”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이 동물로 취급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그에게는 가슴속 깊이 불안함이 있습니다. 아내에게도 난 잘 될 거야, 이번에 잘 될 만한 일이 있어. 라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러한 말은 오히려 ‘나는 되는 일이 없어.’ ‘이번에 역시 잘 안 될 거야.’라는 말을 반증합니다. 영화의 시작에서 아내가 무너진 돌탑을 그냥 두고 가는 한편, 박일래는 그것을 하나하나 다 쌓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박일래가 사소한 사건들에서도 자신의 운명의 비극성을 발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박일래는 배고프면 시도 때도 없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음식의 공간과 배설의 공간을 나누지 않으며, 돈을 가지고 있으면 기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도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정신을 팔리는 어리숙하고 천진난만한 동물이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은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관했던 불행한 해석자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박일래는 자신을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로서 해석을 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불행한 해석을 통해 죄나 저주로 받아들였습니다. 혈육살해라고하는 끔찍한 결과는 비극적 해석에 적합한 주체의 탄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아주 불온하고 끔찍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박일래는 죄책감에 빠져 황야를 헤메이게 되는데요,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 사실상은 죽어있는 좀비적인 인간형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유령은 장소와 시간에 편재합니다. 아마 모든 장소, 심지어 꿈에서까지 말이죠. 박일래가 버려진 농가에서 잠을 청하다 새벽에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장면, 그는 틀림없이 아내 혜림과 아들 영수의 유령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원귀의 형상이 아닐까 합니다. 박일래가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아들과 아내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일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박일래가 두부를 먹으면서 끝이 납니다. 이 때의 두부는 ‘죄의 사함’으로서 읽힙니다. 마치 살아가라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제 살거나, 죽거나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것이 어떤 죄의 사함을 받았다거나,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 되었다. 라는 뜻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죄란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즉, 두부는 박일래에게 이제부터는 죄가 없다. 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처음부터 그에게 죄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리숙했으며 부주의했고, 천진난만했을 뿐입니다. 즉, 그의 불행한 해석 속에서 그 스스로 죄수가 된 것이죠. 두부를 먹는 장소 또한 생명이 태어나는 원초적인 장소인 갯벌입니다. 아마 이는 그가 이제 삶에 대해 어떤 것을 배웠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강의 = 인문학자 고병권

/정리 = 유승민 자원활동가 (tmdals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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