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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리뷰: 낙원으로부터의 배웅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시골 마을의 풍경에 물기가 어렸다. 여자는 남자와 말없이 눈을 맞춘다. 둘 사이에 이별의 공기가 흐른다. 여자는 들풀이 무성히 자란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남자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절뚝절뚝 여자를 따라간다. 여자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힐끗 남자를 돌아보기도 하고 남자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는 것을 따라 하듯 우산에 몸을 기대 절뚝절뚝 걷기도 한다. 바람에 나뭇잎이 흩어지는 소리와 서정적인 음악이 어우러지고 두 인물은 한참을 걷는다. 보랏빛 석양이 질 무렵 남자와 여자는 조용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본다. 여자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버스에 올라탄다. 남자는 홀로 남는다.


작품에는 유난히 빈자리가 도드라진다. 생각해보면 김종관 감독의 단편들이 대개 그랬다. <사랑하는 소녀>(2003)에서 드러난 두렵고도 애틋한 감정은 부재(不在)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운디드>(2002)의 소녀는 횡단보도 건너편으로 나아간 소년의 빈자리와 함께 머무르고 <영재를 기다리며>(2005)의 카나는 꽁꽁 언 손을 애써 녹이며 오지 않는 남자친구 영재를 한참 동안 기다린다. <모놀로그#1>(2006)의 여자는 지나간 순간과 사랑하는 사람의 빈자리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이처럼 김종관 감독의 단편 속 인물들은 타인의 빈자리 위에 서 있고 그 자리에서 파생된 상실감과 고독감을 앓는다. 인물들이 앓는 감정은 관객에게로 확장된다. <낙원> 또한 그러하다. 작품은 내러티브를 배제하고 감정만을 남김으로써 그것을 가능케 한다. 둘 사이의 관계와 스토리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보다는 그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에 충실하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배우들의 표정, 작품 너머의 관객에게도 느껴지는 듯한 비 온 다음 날의 시원하고 촉촉한 공기, 시골의 적막한 풍경과 어우러지는 서정적인 음악은 그런 감정들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그들의 여정을 바라보며 쌓이던 감정은 여자가 떠난 뒤 선명한 고독감으로 변한다. 그들은 때론 보폭을 맞춰서, 때론 상대방의 걸음걸이를 따라하며 긴 길을 함께 걸어왔다. 비록 나란히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긴 여정의 끝에서 둘은 이별한다. 묘한 아픔이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정류장에 머무른다. 통증과 상실감으로 얼룩진 남자의 얼굴 위로 비눗방울이 흩날린다. 남자가 비눗방울을 발견한 장면 후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와 떠나버린 여자는 <낙원>이라는 작품의 제목과 걸맞은 일종의 환상성을 부여한다.


서로가 함께했던 공간은 그들에게 낙원,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별했고 남자는 여자가 없는 낙원에 홀로 남는다. 낙원이었지만 더 이상 낙원이 아닌 공간에서 남자는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상실과 고독을 매개로 돌아오지 못할 낙원을 회상한다. 함께했던 낙원으로부터 그녀를 배웅한 그는 텅 비어버린 낙원에 한동안 머무를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빈자리를 목격한 관객 또한 그 자리에 머무르며 각자의 낙원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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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밤에>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3730







<어느 여름날 밤에> 리뷰: “햄버거 하나 같이 먹기가 쉽지 않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영농 님의 글입니다.



인민군 ‘재성’과 ‘용준’의 섹스신에서부터 시작하는 <어느 여름날 밤에>는 곧바로 남한 사회에 정착해 살아가는 용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남한으로 내려온 용준은 작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에겐 새로운 애인 ‘태규’가 생겼다. 북에서 누릴 수 없었던 것들을 찾아 남한으로 왔지만 용준의 삶은 딱히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연인과의 동거생활을 유지하기도 벅찬 그에게 태규의 못된 장난이 감당할 수 없는 빚마저 떠안긴 탓이다. 어느 여름날 밤에 한 남자가 용준을 찾아온다.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 북에서 내려온 재성이다. 그러나 용준은 재성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인다. 용준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재성은 마침내 집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고 용준에게 햄버거 봉투를 내민다. 인민군 용준이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미제 햄버거’이다. 용준은 그 마저도 거들떠보지 않고 뿌리친다. 한편 철없는 태규는 재성의 정체를 의심하며 둘의 관계를 다그쳐 묻는다. 그저 아는 형일 뿐이라며 적당히 둘러댔지만 그동안 남한에서의 삶이 썩 녹록치 않았던 용준은 다시 나타난 재성에게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자란 태규와 그의 철없는 행동에도 차마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용준, 여전히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용준의 모습이 견딜 수 없는 재성의 관계는 서로 맞물려 갈등을 빚어낸다. 위태롭게 진행되는 세 남자의 동거는 잘 유지될 수 있을까.





“햄버거 하나 같이 먹기가 쉽지 않다”. 계속되는 용준의 외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햄버거 봉투를 내밀며 재성이 뱉는 말이다. 자유가 없는 북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이제 미제 햄버거를 먹을 자유가 생겼음에도 여전히 ‘같이’ 먹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북에서 재성을 사귀었던 이유를 ‘같이 힘들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밝히는 용준은 마치 운영이 중단된 놀이공원과 같은 신세다. 이어지는 용준의 대사처럼 ‘관리 없이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용준은 재성을 잊게 된 것이다. 대신 그에겐 새롭게 ‘같이 힘들어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자유’는 주체가 독립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하는 조건이다. 그러한 조건을 갈망했던 용준은 한편 끊임없이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용준은 성매매를 해서라도 태규를 벌어 먹이지만 마땅한 보살핌은 받지 못하는 듯하다. 자유와 자본의 딜레마 속에서 갈등하는 용준은 마침내 재성과 키스하는 장면을 태규에게 들킴으로써 그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조건마저 무너지게 될 상황에 놓인다.





퀴어, 디아스포라, 분단, 군대, 자유, 자본 등 여러 키워드를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 <어느 여름날 밤에>는 그 중에서도 자유와 자본의 문제에 가장 무게를 둔다. 세 남자의 관계에서 계속 등장하는 햄버거는 그 키워드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다. 나아가 이 햄버거는 앞서 언급한 ‘햄버거 하나 같이 먹기가 쉽지 않다’는 대사를 통해 ‘같이’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소재이기도 하다. 세 남자가 같이 살아가지 못 하도록 하는 것에는 이 영화가 다루는 키워드 모두를 대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같이’의 가치에 둔감한 요즘 한국 사회의 민낯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영화는 재성이 사투리 교정을 위해 동영상 강의를 보며 따라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결코 낙관적인 결말로 보이진 않는다. 이미 서울 말씨를 완벽히 익힌 용준처럼 재성 역시 자유와 자본의 딜레마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인을 찾지 못해 식어가는 영화 속 햄버거 봉투처럼 세 남자의 삶은 정착하지 못한 채 그 온기를 잃어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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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춤: 기무>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1122






<기이한 춤: 기무> 리뷰: 삶의 시퀀스 그리고 응시

<기이한 춤: 기무>와 <호수길>을 통해 본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기이한 춤: 기무>(이하 <기무>)는 한때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가 사용했던 건물과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박동현 감독은 기무사 건물의 내·외부를 찬찬히 보여주며 건축학자의 입을 빌려 건물의 보존 가치를 말한다. 또한 건물 일대 한옥마을 골목길을 비추며 시간이 축조한 삶의 공간을 재조명한다.

  



기무사 과거와 현재


기무사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종로구 소격동의 이 터는 1864년 종친부, 192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8·15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사용되다가 1971년부터 국군기무사령부(전 국군보안사령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기무사는 국방관련 기밀보안업무를 수행하는 국방부 직할 군 수사정보기관이다. 기무(機務)란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비밀을 지켜야 할 중요한 일’을 뜻한다. 기무사가 주로 수행하는 업무는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군사보안지원, 군관련첩보 등 특정범죄 수사 등이다.(출처: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기무사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도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전신인 보안사령부부터 민간인 사찰로 여러 차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켰다. 또한 기무사 지하실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남산 지하실,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과 함께 야당 정치인과 재야인사, 운동권 대학생에 대한 불법 연행과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출처: 윤상호, 손영일, “기무사 대해부”, 동아일보, 2014.6.2.) 


영화는 기무사가 과천으로 이전한 후 빈 곳으로 남아있던 건물 모습을 기록한다. 영화가 촬영된 당시 부지에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이 확정되었지만, 기무사 건물의 보존 또는 철거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종친부의 터이자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곳이기에 건물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7월 3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2013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일부로 건물 형태가 보존되었다. 





<기무> 자막, 대한민국 재개발의 역사


영화 전반부는 기무사 건물 내·외부를 고정된 카메라로 천천히 비춘다. 건축학자들의 인터뷰가 중간 중간 덧붙여지는 한편 화면 하단에는 짤막한 자막으로 대한민국 역사 특히 재개발사를 순차적으로 나열한다. “1864년 종친부 확장 이건”, “1910년 한일합방”, “1961년 청계천 복개”(“2003년 청계천 복원”), “1979년 대민간 사찰업무 전두환 명령”(“2009년 기무사 민간사찰 재개 논란”), “2001년 상암동 재개발”(“2009년 상암 뉴타운 건설”), “2006년 은평 뉴타운 건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2009년 용산 재개발” 등. 전후 맥락 없이 무조건적인 철거와 재건축으로 대변, 서술되는 대한민국 역사는 화면 위에 위태롭게 축조되는 <기무>의 자막과 닮아있다. 빠르게 전환되는 자막은 재개발로 인해 무참히 스러져간 수많은 건물과 사람들의 삶을 은유한다. 2009년 1월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숨진 “2009년 용산 재개발” 참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자막이 반복 재생하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재개발”이라는 철거의 방식을 대한민국은 현재까지도 명칭만 “뉴타운”으로 바꿔 똑같이 답습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박동현 감독은 서울 도시개발로 사라지는 것들을 안타까워하며 문화 속에서는 다양한 것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숭례문이 가장 그랬던 것 같습니다. 총독부 건물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총독부 건물이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도 해봅니다. 그것을 남겨두고 사람들에게 그런 역사 또한 남기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깨끗이 없애는 것이 중요한지”(출처: [인디포럼2010 데일리 9호] 박동현 감독 인터뷰) 박동현 감독이 했던 인터뷰와 <기무>에서 건축학자가 한 말처럼 재개발의 방식은 광범위한 시민적 참여를 통해 보존과 철거 그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관료화된 권위의 판단으로 파괴적인 재개발과 뉴타운 방식이 반복되어 왔다.  





<기무>와 <호수길>의 골목길 풍경과 삶의 시퀀스


기무사 건물을 관조하던 카메라는 영화 중반부부터 건물 일대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로 이동한다. 카메라는 어느 골목길 풍경 하나를 7분여 동안 긴 침묵으로 응시한다. 동네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어떤 아주머니는 대화를 나누다가 수레에 물건을 싣고 온 행상에게서 그날 저녁 찬거리를 산다. 옆집 할아버지는 세탁소에서 찾은 양복을 옷걸이에 고이 들고 온다. 앞집, 옆집 사람들이 잠깐 멈춰 서서 거리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과 안부 인사를 나눈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조금 의식하다가도 다시 본인들의 대화에 집중한다. 감독이 긴 기다림 끝에 얻은 이 장면을 나는 삶의 시퀀스가 담긴 장면이라 말하고 싶다. 거기에는 물리적 장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활동들이 일어나고 그곳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서와 의미가 있다. 감독은 긴 응시를 통해서 관객 스스로가 그 장면, 삶의 풍경을 바라보고 감각하게 유도한다. 


이 장면은 정재훈 감독의 <호수길>(2009)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의 골목길을 기록한 이 다큐멘터리는 아무런 내레이션 없이 담담하게 골목길 사람들의 풍경을 오래도록 기록한다. <기무>, <호수길> 두 영화의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머문다. 골목길 프레임 밖으로 한 사람이 사라지면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뛰어노는 아이에서부터 자전거를 타는 사람, 산보를 하는 노인,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까지. 두 영화의 골목길 풍경, 삶의 시퀀스를 구성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배역들이다. 또한 두 영화의 카메라 모두 대상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골목길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렴풋이 들리지만 무슨 대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가청권 안이지만 자세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너무 멀지도(무관심하지도) 너무 가깝지도(침해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카메라는 담담히 그들의 삶을 기록할 뿐이다. 누군가는 외면하거나 무관심하게 힐끗 보고 지나쳤을 풍경들이 두 감독이 응시하는 동안 삶의 시퀀스로 온전해진다. 응시를 한다는 것은 상대(대상)를 지그시 바라봄을 의미한다. 관객은 그 응시를 통해 공간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 공간은 경제적 가치로 값이 매겨진 ‘부지’가 아닌, 다양한 배역들의 일상과 만남이 부대끼는 삶의 무대이다. 두 감독은 그 장면을 오래도록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기억 속에 잔상을 남겨 그 풍경을 보존하려 하는 듯하다. 카메라가 촬영을 멈춰도 그곳에는 삶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관객들의 뇌리에 잔상처럼 남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관객은 이 골목길 풍경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그곳에 있어야 할 삶의 풍경이 사라지면 우리는 분명 아쉬워하게 될 것이란 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기무> 후반부에는 수직으로 급격하게 치솟은 고층의 건물을 원경에서 보여준다. 영화 처음과 중간에서 카메라가 골목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풍경을 가까이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람들은 이제 골목길에 나와 앉아있지 않고 건물 안에 ‘들어있다’. 화면에서 경제업무 지구의 높은 건물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학교 하나가 멀리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의도적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를 크게 들려준다. 카메라와 학교 운동장 사이의 시각적 거리감과 사운드가 불일치한다. 가청권 밖인, 그 거리감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아이들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 역시 <호수길>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바로 철거로 비어버린 동네 풍경 위로 클로즈업된 아이들의 얼굴이 디졸브 되는 장면이다. 정재훈의 영화가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이미지로 담아냈다면 <기무>는 사운드로 그 아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려는 듯하다. 





보존되어야 할 역사와 삶의 풍경


<기무> 마지막 장면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며 남기는 잔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잔상을 담는 방식은 흔히 사진에서 시간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장노출 기법과 유사하다. 영화에서도 느린 잔영을 남기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공간과 장소에 새겨진 시간성을 상징한다. 동시에 장소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각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요구와 역사적 맥락에 의해 기무사 건축물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현재 미술관의 일부로 보존된 기무사 건물처럼 삶의 역사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퇴적된다. 단지 경제적 가치만을 따져 무조건 부수고 밀어버리는 재개발, 이 주기적인 파괴의 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공간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맞게 보존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건물과 골목길에는 역사와 함께 그곳에 새겨진 미시적인 개인들의 삶이 존재한다. 이것을 응시하려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회피(철거)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역사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 또한 잃게 될 것이 아닌가. 역사와 그 장소에 새겨진 개인들의 삶, 이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삶의 풍경을 이제는 응시하고 보존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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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2094






<경복> 리뷰: 단순하고 투명한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재 님의 글입니다.




<경복>은 관객에게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넣었지?’라는 당혹감을 종종 안겨주는 영화다. 때때로 자조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막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영화가 한없이 투명하게 보일 때이다. 당혹감은 정확히 이러한 영화의 특징에서 온다. 별다른 계산이 없어보여서 당혹스러운 것이다. 첫 장면이 그렇다. <경복>은 기타를 메고 홀로 터널을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이 장면이 한없이 투명하게 보이는 이유는 카메라가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터널을 걷고 있는 사람은 카메라에 의해서 촬영을 당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느껴져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러한 특유의 이상한 분위기는 영화 내내 계속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무엇을 보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있는 듯하다.





이러한 특징이 특히 잘 드러나는 부분은 제3자의 위치를 지키다가 갑자기 원 숏으로 전환될 때이다. 부모님이 휴가차 여행을 가고 ‘동환’과 함께 방에서 뭉개던 ‘형근’은 무작정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집을 팔아버리기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집에 들이게 된다.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대화를 관찰하다가 갑자기 동환을 원 숏으로 잡는다. 3명의 대화가 진행 중인데 동환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한다. 대화 상대의 시선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동환이 보고 있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동환은 카메라를 보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3명 사이에 느닷없이 끼어든 카메라는 마치 자신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과격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동기는 불분명한 상태로 시퀀스가 끝나 버린다.





이 당혹스러운 카메라의 난입이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것은 그들이 방에서 뒹굴며 ‘정영음’(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는 순간이다. 누구의 기억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플래시백처럼 몇 장의 사진들이 지나간다. 그 사진들은 앙드레 바쟁이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사진을 “방부 처리한 시간”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지아 장커와 미아자키 하야오에 대한 이야기 사이에 잠시 등장하는 앰비언스는 마치 영영 돌아오지 않는 지나간 시간과 그것을 물성으로 볼 수 있게 만든 사진이라는 매체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듯 들린다.





이 장면이 지나가면 “다들 어디론가 떠났지만,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는 형근의 진술이 들려오고 그 뒤 형근은 자조 섞인 유쾌한 유머가 진행되는 술자리에서 갑자기 울어버린다. 이 눈물이 독특해지는 것은 그가 울기 전에 삽입된 플래시포워드 때문이다. 이 플래시포워드는 형근의 눈물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플래시포워드가 지칭하는 바는 영화 전반이 이미 지나간 시간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방부 처리된 시간임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위에서 <경복>의 원 숏들은 마치 그들이 어찌저찌 함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처럼 보인다. 영화는 기계 없이 만들어 질 수 없고, 기계는 능동적인 사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카메라를 켜고 끄는 사람이 필요하다. 영화는 결국 (적어도 지금까진)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 숙명을 지닌 매체이다. <경복>은 이 단순한 영화의 숙명을 원 숏이라는 가장 투명한 구도로 잡아내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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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리뷰: 우리 모두 조금씩은 괴물이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각수’는 항상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선생님 사람한테도 뿔이 날 수 있나요?” 각수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뿔이 돋아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각수에게 의문스러운 말을 던진다. “이제 괜찮아질 때도 됐잖아” 어떤 일이라는 것이 괜찮아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가 마주하는 사건들은 어떤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혀지는 것은 기억일 뿐, 인상이나 흔적들은 흐려지지 않는다. 선생님이 기억의 조각이라고 착각하는 각수의 뿔은 그 사건이 무엇이 되었든 각수에게 짙은 흔적을 남긴 인상인 것이다. 그는 이 뿔로 인해, 과거의 어떠한 인상으로 인해 자신이 남들과 다를 뿐 아니라 괴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혁태’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혁태는 언제나 창 밖을 바라보며 홀로 있는 각수에게 관심을 가진다. ‘정빈’은 이러한 혁태의 모습이 못마땅한지 친구들과 함께 각수가 아끼는 염소의 뿔을 자른다. 이 장면은 이후 각수의 반창고를 떼는 혁태의 모습과 겹친다. 


<뿔> 초반부에 등장하는 고정희 시인의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에서 ‘뿌리’를 ‘뿔이’라고 바꿔서 읽어보자. 이 구절은 염소의 뿔이 잘리는 상황을 설명한다. 물론 상황 자체는 아주 비극적이나 결국 새순은 돋아나고 말 것이다. 각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혁태가 각수의 반창고를 떼어내면서 굴욕적이고 비참한 순간을 맞았지만, 결국 각수에게는 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각수는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마주 해야 하는 새로운 고통이 두려웠기 때문에 과거의 상처 속에 묻혀, 자기연민을 합리화하며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혁태라는 인물은 그가 다음 단계로 발을 내딛도록 도왔다. 각수에게 다가가고, 또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는 했지만 각수의 반창고를 떼고. 혁태가 각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빈도 혁태에게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뿔 잘린 염소는 혁태와 겹치는데, 역시 정빈은 염소의 뿔을 자르고 혁태를 불가피한 상황에 몰아넣는 등 고통을 주었지만, 결국 그것은 의도치 않게 혁태에게 전환점을 제공한다.





퀴어라는 영화의 장르를 고려하고 생각해봤을 때, 뿔은 퀴어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이질감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각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혁태를 계속해서 밀어내면서 자신이 괴물이 되어 혁태를 해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결국 영화에 끝자락, 혁태가 찾아왔을 때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각수는 표면적으로는 혁태를 밀어내고 있지만, 결국 자신을 이해해줄 어떠한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무리에서 동떨어진 어딘가로 데려가기에 바빴다. 각수에게 계속 자신이 뿔을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자신은 결국 특별할 것 없는 사람 중 일부이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을 분류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자면 뿔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의 성정체성으로 그를 사회와 동떨어진 존재로 분류하고자 했을 것이고 각수는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인해 도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차별 받는 것이라는 변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대체물로 뿔을 고른 것이다. 다시 말해 뿔을 가진 각수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자기방어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각수에게 진짜 뿔이 자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혁태의 이마에 변화가 생긴 것처럼. 그러나 결국 뿔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가 드디어 다름으로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리며 이제 스스로 존재에 대한 변명을 떨쳐낼 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를 다름이 아닌 사람으로 봐주는 혁태의 존재가 생겼기 때문이다. 반면 혁태에게는 흔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과거 각수가 겪었던 변명의 시간으로 돌입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영화는 인물들을 이용해 존재에 대한 자각부터 부정, 자기 존재에 대한 인정까지 개인이 겪는 심리적 상황들을 뿔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전달한다.





<뿔>은 끊임없이 다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리 속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지. 설사 아무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해도 그는 환영 받지 못한다. 다름은 누군가에 대한 도전이고 위협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익숙하지 못한 것들에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표현은 단지 혼자 덜덜 떠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수의 두려움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으로 치환 된다. 끊임없이 억압하고 고통을 주려 애쓴다. 마침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되면 그들은 축제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서성거린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들이 몰아내고 싶었던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공허와 지루함,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열정을 쏟아내기 위한 희생자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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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해법>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3615





<슬기로운 해법> 리뷰: 언론, 그리고 창 너머의 진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2016년의 끝자락, 오랜 시간동안 모습을 교묘히 감춰오던 부정부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많은 이들이 분노했고 수많은 촛불들이 거리로 나왔다.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 사람들과 그들의 탐욕이 줄줄이 세상 밖으로 쏟아졌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부정부패를 국민 앞에 꺼내놓고 있는 것은 언론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말도 안 되는 비리들에 침묵해온 것 또한 언론이었다. 언론은 때로 진실을 숨기기 위해 왜곡을 일삼기도 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권력과 자본이라는 이해관계에 얽혀 ‘권력의 감시자’ 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했고, 명백한 현 세태의 공범이 되었다.





태준식 감독의 <슬기로운 해법>은 이런 언론의 현실, 특히 한국 사회의 주류 언론인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현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다큐멘터리다. 2014년에 개봉한 해당 작품은 다양한 기사들과 풍부한 통계자료, 언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설득력 있게 재조명한다. 작품은 5개의 장(章)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 5개의 장을 통해 차분한 어조로 언론이 지닌 문제점들을 모두 아우른다. 언론이 거짓말을 일삼는 ‘양치기 언론’이 된 이유, 언론재판을 부추겨 한 사람의 삶을 비극으로 치닫게 만든 총보다 강한 펜의 힘, 미디어 법을 통해 주류 언론사들의 방송 진출을 허가하고 특혜를 제공한 과거의 정권, 언론사의 수익 중 80%를 차지하는 광고 수익을 손에 쥐고 거침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과 현 상황에서 필요한 ‘슬기로운 해법’까지, 작품은 자본과 정치권력이 복잡하게 얽힌 언론의 문제를 알기 쉽고 명쾌하게 드러낸다.





<슬기로운 해법>은 언론이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기업화되는 과정을 다루며 어떤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작품의 후반부에는 삼성그룹과 언론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2007년,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은 삼성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적극적으로 보도한다. 그리고 보도 바로 직후인 11월, 삼성은 두 신문사에 대한 광고를 전면 중단한다. 독보적인 국내 최대 광고주인 삼성의 광고 중단으로 인해 한겨레와 경향, 두 신문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된다.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절대적인 손해를 감수해야하는 상황 속에서 경향신문은 2010년, 삼성을 비판하는 논조의 칼럼을 미게재한 후 사과문을 올린다. 언론에서 일종의 굴복과 반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사례는 단순히 기업화된 언론을 넘어서 언론 앞의 절대자에 대한 고민의 기회를 부여한다.





‘펜은 총보다 강하다’. 군사 독재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언론의 비폭력 저항을 상징하던 말이다. 언론은 사실을 밝혀 알리기 위해 존재했으며 사실의 전달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했다. 그러나 언론의 의미는 퇴색 된지 오래다. 2014년 <슬기로운 해법>이 개봉하던 당시에도 그랬으며 3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되었던 언론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고 침묵과 거짓의 기정사실화가 반복되며 ‘펜은 총보다 강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언론은 창(窓)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언론이라는 창을 통해 진실을 보곤 한다. 창이 맑고 깨끗할수록 진실은 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창에는 먼지가 쌓이고 물때가 끼곤 한다. 그렇게 더러워진 창 너머의 진실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부옇게 보이게 된다. 다시 진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창문을 닦고 또 닦아야 한다. <슬기로운 해법>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치권력과 기업의 자본이라는 큰 이해관계 속에서 본질적인 변화는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고, ‘슬기로운 해법’을 찾아나서는 것 자체가 어쩌면 치열한 전쟁일 수 있다. 그러나 부패라는 무게에 눌려 무너지려는 언론을 감시하고 언론의 도구화를 인지하여 올바른 판단력을 구축한다면 언젠가는 깨끗한 창 너머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다.


<슬기로운 해법>은 언론의 도구화를 인지하게끔 하고 언론에 대한 고민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작품의 이런 특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한 해를 맞은 현 시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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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먼 집>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3615





<할머니의 먼 집> 리뷰: 당신이 멀어져가도 변하지 않을 마음을 담아서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어느 날 자살을 시도했다” 이 영화에 이보다 강력한 문장이 있을 수 있을까. 나(이소현 감독)를 키워준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할머니가 계신 화순으로 내려가 그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먼 집>은 ‘할머니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카메라에 담긴 그들의 모습은 생각보다 따스하다. “밥은 묵어쪄?” 묻는 할머니와 “잉, 먹었지.”하는 손녀의 대화에서 따뜻한 애정이 비친다. 할머니가 잡초를 캐는 모습, 낮잠을 주무시고 약을 챙겨 드시며 “요놈 하나 묵어”라며 나에게 카스테라를 내어주는 모습. 할머니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고 이를 담아내는 카메라 역시 그렇다. 마치 일기와도 같은 사적인 기록임에도 보는 이는 영화를 따라 울고 웃게 된다. 





왜 죽으려고 했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성가신게”라고 답한다. 죽음은 할머니에게는 가깝고 손녀인 나에게는 가깝지 않아서 할머니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가족들이 할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 역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듯 죽음도 그러하기에, 나는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저 상처를 치료해드리고 가족 몰래 영양제를 놔드리고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이 영화는 특정한 메시지를 위해 설계된, 관객을 설득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할머니와 할머니에게 가까워지는 죽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 가장 따뜻했고 다정했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그 정서를 공유하는 영화다. 아흔 셋,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으나 나는 아직도 할머니, 할머니와 함께하는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이 기록으로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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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플러그 <부곡 하와이>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3014







<부곡 하와이> 리뷰: 삶을 재생하는 배우의 영화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형주 님의 글입니다.



어느 시골의 정신병원에서 두 여성이 탈출을 감행한다. 중년 여성 ‘자영’은 가끔 발작 증세가 있고, 아직 십대인 소녀 ‘초희’에겐 자살 시도의 흔적들이 있다. 이들은 각자 탈출 목적이 있다. 자영은 아들이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꼭 만나기 위해, 초희는 정신병원 원장으로 인해 임신한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해 나가려 한다.



<부곡 하와이>는 이들이 병원을 탈출하여 목적을 향해 떠나는 로드 무비이다. 낯선 이들과의 만남, 길 위에서의 우여곡절, 그리고 이들을 쫓는 수사꾼까지 장르의 전형성이 모두 담겨있다. 영화는 특히 여성의 연대와 화합을 강조한다. 이들이 만난 남성들은 모두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며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만 한다. 어쩌면 너무 익숙한 길일 수 있는 이 영화의 여정에서 관객의 손을 잡아주는 건, 자영 역의 박명신, 초희 역의 류혜린 배우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말하지 않은 슬픔까지 눈빛으로 담아낸다.



박명신 배우 특유의 야생적인 눈빛과 몸짓은 자영의 모성애가 부딪히고 깨졌던 시절을 복원한다. 자영이 주변을 위협하는 듯해도 결국 할퀴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반면 류혜린 배우가 그리는 초희는 아픔과 동시에 재생을 담아낸다. 삶을 멈추려 한 흔적이 가득한 그지만, 자영과 먼저 관계를 구축해가는 건 초희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과 관계를 충실히 복구해나간다.



<델마와 루이스>(1991)처럼 폭력적인 세상을 탈출하는 꿈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나 배우들이 만들어낸 두 여성의 모습만으로도 영화는 가치가 있다. 깊은 절망 속 어딘가에서, 삶을 재생해내는 배우들의 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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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플러그 <평범한 날들>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1220







<평범한 날들> 리뷰: 사람도 사회도 더 이상 병들지 않길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미선 님의 글입니다.



하루 동안 우리를 스치는 수많은 얼굴들은 신기하리만큼 서로 다른 표정을 가졌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 뒤에 제각각 어떤 사연들이 감춰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평범해 보이는 누군가의 얼굴 뒤에는 그가 가진 것의 모든 숨결을 빼앗아버릴 만큼 아픈 것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평범한 날들>은 그런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상처를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 기억하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아픔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 세 사람이 상처를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이지만, 그 상처의 근원은 모두 ‘죽음’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병들고 마침내 상처를 대면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Between> 평범한 직장인 ‘한철’(송새벽 분)은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린다. 일도 잘 안 풀리고 매번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마저도 실패의 연속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누군가의 흔적을 더듬는다. 어느 날 아침, 그의 핸드폰엔 그 날이라는 알림이 뜬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강가에 있는 무덤이다. 비로소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내가 널 안아도 되겠니”  

<Among> ‘효리’(한예리 분)는 자주 가던 카페의 문 앞에 붙은 ‘근조(謹弔)’라는 메모를 보고 발길을 돌린다. 단어의 뜻을 찾아보다 문득 기억 너머의 어떤 사건을 흐릿하게 떠올린다. 어느 날, 5년 동안 만난 남자친구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 받은 효리는 설상가상 교통 사고를 당해 한 쪽 다리를 다친다. 상처가 다 나았을 무렵 잠에서 깬 효리는 어딘가로 뛰어가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이 이별이나 교통사고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만든 손수건에는 ‘상처를 기억하세요’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Distance> ‘수혁’(이주승 분)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고아가 되었다. 숨을 거둔 할아버지 옆에 앉아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담배 한대를 태워 입에 물려드린다. 담담하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수혁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를 보고 화가 난 채로 그의 뒤를 쫓는다. 그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세 인물은 모두 상처가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평범해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상처를 한 순간 외면해 버린 후 그것은 고질적인 병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인식하지 못한 채 병들어가는 영화 속 세 인물은 서로 다른 이야기 속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ET가 그려진 시계나 근조가 적힌 메모,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나뭇잎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연결고리는 공통적으로 상실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지만 상처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상처를 망각하면 결코 치유되지 못한다. 잔인하리만큼 아픈 대면의 순간을 갖는 것에서부터 치유는 시작된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나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어야 하는 순간이다. 아픔을 기억하고 곱씹고 극복할 시간을 가지는 것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몫이니 빨리 잊으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개개인의 상처와 상흔이 무시되는 순간 사람도 사회도 병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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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플러그 <파스카>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bit.ly/2laAdYI







<파스카> 리뷰: 다시 돌아올 희망에 대해



*관객기자단 [인디즈] 홍수지 님의 글입니다.



안선경 감독의 <파스카>는 ‘가을’(김소희 분)과 ‘요셉’(성호준 분)의 사랑과 삶을 다룬 영화다. ‘파스카’는 ‘건너간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말로, 기독교에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 사이의 기간을 의미하는 ‘파스카 성삼일’과 연관된다.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 <파스카>는 가을과 요셉이 겪게 되는 고난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그들이 키우던 고양이 ‘희망’이 죽으면서 시작된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가을과 배달 일을 하는 요셉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며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40세인 가을과 19세인 요한의 사랑은 사회적 기준 아래에서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는 둘만 있을 때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제3자의 시선이 더해지면 정상이 아닌 관계로 비친다. 주변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가난함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사회에서 동떨어진 채로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 희망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아이가 생긴다. 





영화는 가을과 요셉이 겪게 되는 고통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느끼는 고통에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실성과 잔인함이 더해진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고양이의 수술을 두고도 돈 걱정이 앞서게 되는 모습, 고양이 희망이 죽었을 때 장례비용 때문에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지 못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그들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직시한다. 가을이 태아의 망가진 몸을 보게 되는 장면 역시도 생략이나 과장 없이 담담히 전시한다.





<파스카>는 가을과 요셉의 ‘희망’이 죽고 난 뒤 맞이하게 되는 고통의 시간을 담아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다시 찾아오는 ‘희망’에 대해 말한다. 가을과 요셉은 고통의 기간을 보내고 다시 새끼 고양이 ‘희망’을 만나게 된다. 영화 속 인물 혹은 현실 속 모두에게는 각자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가을’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듯, 그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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