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리브 올리브한줄 관람평


송희원 | 다시 이 땅에 올리브 나무를

이현재 | 올리브 나무 사이로, 사람이 산다

이지윤 | 올리브 나무를 심는 사람들

김은정 | 정의란 '뭣'인가?






 <올 리브 올리브> 리뷰: 다시 이 땅에 올리브 나무를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점령은 삶을 파괴했다.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자신의 땅에서 내쫓겼고, 다시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선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 부당한 상황에 저항하자 일상을 영위하기 힘들어졌다. 어떤 이들은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감옥에 갔다. 여자들은 일을 구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대신 해 직장을 얻어야 했다. 이스라엘 점령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고향으로부터 이방인이 되어버린 사람들. 바로 <올 리브 올리브>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야기다.  





서안지구 나블루스 주의 작은 마을 세바스티아에 거주하는 위즈단은 워킹맘으로 평범하지만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위즈단의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올리브 나무를 수확해 10남매를 키워냈다. 올리브 나무는 팔레스타인 인구 70%의 주 수입원인 동시에 그들의 민족성과 역사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그 올리브 나무가 뿌리 뽑힐 위기에 처했다. 선조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올리브 농장은 이스라엘 점령 하에 일 년에 단 열흘만 통행이 허락된다. 우물을 파는 것마저도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접경지 주민들의 집과 사원이 피해를 당했다. 농경지 주민들 가옥 역시 공격으로 무너져 이제 그들은 구호단체 텐트에서 생활하며 가축을 돌본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통행의 자유를 거두어가는 동시에 그들을 ‘지붕 없는 감옥’에 가둬놓고 숨통을 조인다. 인티파나(intifada,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이 일으킨 봉기) 때 자식을 세 명 잃은 무함마드 할아버지와 그 통한으로 온갖 병을 얻은 할머니. 반란 운동에 참여하다 친구를 잃고 11년 동안 감옥에서 젊음을 보내야 했던 알리. 역시 인티파나에 참여했다가 일자리를 잃고 지금은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핫산. 그리고 영화 내레이션을 맡아 자신의 아이들과 남편의 일상을 들려주는 위즈단까지. 카메라는 그동안 말해지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개개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 





가족 프로덕션 ‘상구네’의 김태일, 주로미 감독은 아들 상구, 딸 송이와 함께 팔레스타인에 갔다. 약 2년간 현지인들과 함께 살며 가까이서 촬영했기에 그들의 힘 있는 증언 그대로를 담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증언에는 분노와 한이 서려 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기억은 그렇게 <올 리브 올리브>에 차곡차곡 담겼다.  





팔레스타인인은 다음 세대에게 그들의 역사와 현재의 참상을 알리려 노력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기억된 과거뿐이기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필사적으로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수많은 죽음과 희생을 기억하고 또 알려서 그들의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결코, 이 역사를 잊어선 안 된다고. 비록 그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오직 구호와 돌멩이뿐일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감독은 그 모습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루에 다섯 번 예배시간을 알리는 소리처럼 그들의 고통스러운 일상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하게 살고 싶은 곳 역시 고통스러운 바로 이곳, 점령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이다. 높은 분리 장벽 앞에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더 이상 좌절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그들은 다시 이 땅에 올리브 나무를 심고 행복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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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밍 보이즈한줄 관람평


송희원 | 청년들 땀으로 꿈을 경작하다

이현재 | 세계를 돌고 돌아 얻은 단순한 답변. 단순하기는 어렵다.

이지윤 | 삶도 영화도 유기농

김은정 | 농사 때문만은 아니야





 <파밍 보이즈> 리뷰: 농사 때문만은 아니야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농사를 위해 뭉친 세 청년들은 해외에서는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또 해외의 젊은 외국의 농부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몸소 체험하기 위해 배낭 하나 메고 무작정 여행길에 오른다. 그들은 농사일을 배우고 돕는 대신에 숙식을 제공받으며 장장 2년간의 여행을 마친다. 98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다큐멘터리 영화인 <파밍 보이즈>가 내내 관객을 붙잡은 비결을 생각해보았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만들었을 때 무척이나 흥미로운 주제를 가져간다. 무전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여행이라는 요소만으로 영화는 이국적인 풍경, 낯선 사람이라는 장치를 통해 우리들의 시선을 끈다. 여기서 ‘돈이 없다’는 상황이 더해지며 이야기는 보다 자극적으로 변화한다. 돈이 없는 여행객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차를 타고 이동하기 위해 몇 시간씩 히치하이킹을 한다든지, 그 마저도 녹록치 않아 비오는 늦은 밤까지 무작정 걸어야 한다든지, 풀숲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한다든지. 이렇게 무전여행이라는 주제만으로 극적인 효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마치 흥미진진한 어드벤처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또 다른 흥미로운 주제는 바로 이들이 여행하는 목적이다. 농사. 사실 무전여행이라는 테마 없이 단순히 농업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을 것 같다. 농사를 업으로 삼는 것에 관심 있는 한국 청년들이 별로 없듯이 농사 자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웰빙, 오가닉 푸드 등을 화두로 도시에서 자신만의 작은 뜰을 가진다거나 주말농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농업을 위해 무일푼으로 여행을 떠나는 세 청년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우리는 갑자기 내용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영화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농사는 직업 그 이상이다. 삶이다.’ 그렇기에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더 와 닿는 것이 아닐까.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편집, 그리고 경우에 따라 추가되는 내레이션과 배경음악 등을 제외하면 인물의 삶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 말하자면 진정한, 그리고 사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저 우리의 삶의 이야기인 것이다. 2년간의 여행을 마친 뒤, 그들은 모두 농사를 짓고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만 저마다 어떤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책을 쓰고 창업을 하고, 누군가는 취직을 하고, 또 누군가는 농사를 짓는다. 여행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이후의 삶이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라는 점. 처음에는 두렵고 설레던 무전여행이 이제는 우리가 지나온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는 것. 그렇게 여행은 우리에게 삶에서 놓쳐왔던 생기와 의지를 불어넣어주며 다음 도약으로의 기회를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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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꽃한줄 관람평


송희원 | 천천히 위로한다

이현재 | 지치지 않기를 빈다

박영농 | 재(again)꽃

이지윤 | 바스러지며 피어나는 꽃처럼

김은정 | 가슴 찡한 거짓말






 <재꽃> 리뷰: 지치지 않기를 빈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재 님의 글입니다.



박석영 감독의 ‘꽃 3부작’에 나온 모든 소녀는 늘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 그들의 이동은 그들의 삶을 위치하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어딘가에 있었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동물의 움직임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 단순함은 아주 간결한 상황에서 나온다.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움직인다. 이것은 어떤 상황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다. 죽음은 그들과 정말 가까운 곳에 있다.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으며, 잘 곳 또한 없다. <들꽃>(2014)의 ‘은수’와 ‘수향’, ‘하담’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여기에는 그들의 과거나 미래가 들어갈 만한 틈이나 여유가 없다. 당연히 타인이 들어설 자리는 더더욱 없다. 그들이 뭉쳐있다면, 그것은 추워 죽지 않기 위해 뭉쳐있는 상황에 가까웠다. 그들은 재난에 한 가운데서 재난의 가장자리로 몸을 피하기 위해 이동한다.

그들이 움직이는 시간은 주로 밤이다. 밤이라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빛이 부재하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사체를 식별하기 어렵고 살아남으려는 자들은 이를 이용해 이동을 지속한다. 그나마 함께 움직일만한 무리가 있던 <들꽃>과 달리 하담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스틸 플라워>(2015)에 낮의 시간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먹고, 자고, 일하는 낮의 시간은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공동의 생활에서 내쳐진 그녀는, 밤을 자신만의 독무대처럼 이용한다. 영화는 80여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무려 5분이라는 긴 시간을 온전히 그녀가 춤을 추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존재는 오직 카메라 밖에 없다. 하담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데, 그건 자신 옆에 있는 존재가 카메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담은 자신이 속한 세계 밖의 존재들과 소통한다.




<재꽃>에 이르면 영화를 이루던 중요한 두 가지 축이 사라진 채 시작된다. 하담은 더 이상 길 위에서 살지 않는다. 그리고 낮의 시간에 블루베리 농장에서 일을 하며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다만, 그녀는 종종 ‘집’을 향하여 달린다. 달리는 모습은 흡사 <들꽃>과 <스틸 플라워>에서 위험을 피해 달아나던 하담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해별’이 온다. 하담은 달리던 와중에 해별을 만난다. 이건 우연 같지 않은데, 하담이 도망치던 대상이 그녀의 과거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과거는 갑자기 하담 앞에 던져지듯 놓이는 것이다. 해별과 하담이 만나는 장면이 사뭇 감동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소녀와 지속되던 운동을 일순간에 끊어버리는 또 다른 소녀. 그리고 하담이 달리기를 멈추면 다시 밤이 찾아온다.

이러한 점에서 <재꽃>은 낮에게 잠시 자리를 내주었던 밤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귀환하는 영화이다. 해별이 도착한 후, 선해보였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지나왔던 과거를 마주한다. (해별이 아버지라 믿고 있는) ‘명호’는 지난 날 갚지 못한 부채를 갚을 기회를 갖자 섣부르게 흥분한다. ‘철기’와 ‘진경’은 온전한 1인분의 삶을 소화해내지 못했던 과거에 시달린다. 하담은 자신이 도망치던 대상을 마주하지만 미숙한 처신으로 난장의 원인을 제공한다. 다만 하담만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하담은 밤을 겪어본 자로서 밤의 귀환을 환대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선의가 가득한 세계에 밤이 찾아올 때 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하담이 유일한 것이다.




‘꽃 3부작’은 밤이라는 시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시리즈이다. 밤은 마을이라는 작은 공간을 분리하고 변화를 가하며 영화를 이끌어가는 모종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다. 밤이 지나가면 명호의 집 앞에는 마당이 가꾸어지고 있고 해별의 방을 대신할 텐트가 놓여진다. 그리고 밤 안으로 들어가면 하담이 해별을 찾아 도로 위를 뛰고 있고 하담이 탭슈즈를 해별에게 신겨준다. 영화를 보고나서 마음속에 남는 이미지가 두 개 있다. 하나는 하담이 해별에게 탭슈즈를 신겨주는 밤 풍경 위로 쏟아지는 불씨들이다. 분명 어딘가 불타고 있음에도 이상한 따듯함을 느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마침내 마주한 하담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 무표정으로 하담은 재난이 휩쓸고 간 마을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마을을 떠날 때 영화는 주저하지 않고 블랙아웃 된다. 주변에 아무도 없던 하담 옆에 해별이 생겼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카메라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뗀다.


‘꽃 3부작’에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고통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나눌 대상이 생겼을 때, 즉 인물의 성장이 확인되는 순간 카메라는 단호하게 눈을 감는다. 어딘가 불타고 있을 화제의 현장에서 온 불씨를 바라보기. 그리고 단호한 태도로 고통에 동참하기. 밤이 찾아오면 카메라는 다시 켜질 것이다. 그러나 <재꽃>의 두 소녀가 해가 뜬 낮에 길을 떠나는 것을 단호히 붙잡지 않는다. 밤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하담은 무엇을 보았을까? 카메라나 하담이나 부디 지치지 않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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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보라>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1604







<보라> 리뷰: 이 멍을 보라



*관객기자단 [인디즈] 송희원 님의 글입니다.



영화 <보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의거해 사업장에서 이뤄지는 현장보건관리 실태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법률이다. 영화는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산업 근로자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수십 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할머니와 인터넷데이터센터 관리자와 하드디스크 데이터 복구 전문가, 사진동호회 사람들을 보여준다. 감독은 언뜻 연관성 없어 보이는 사람들과 풍경을 직조하며 현대 사회의 노동과 여가에 대해 고찰한다.





영화는 전반부 보건기관 직원과 전문의가 사업장을 방문하여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근로자를 진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작업환경측정이란 작업환경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해당 근로자 또는 작업장에 대하여 시료를 채취하고 분석·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도루코 칼, 마네킹, 피아노, 타이어, 채석장 노동자들은 전문의에게 원인불명의 두드러기, 기계소음으로 인한 난청, 고혈압, 근육통 등의 고통을 호소한다. 노동자들의 멍 자국은 건강검진 후에야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 멍 자국은 매일 노동의 강도가 축적되어 신체에 서서히 새겨진 것이며 지우려면 그 발생의 원인일 생계의 동작을 중지해야 한다. 노동자의 신체적 고통은 의사에게 전문적 용어의 병명으로 진단되지만, 금주와 금연이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처방이 내려질 뿐이다. 진찰하는 의사도 고통의 원인이 노동 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생계가 끊기는 것은 노동자에게는 죽음의 선고와도 같다는 것을 알기에 일하지 말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다. 설령 당장 일을 그만둔다 할지라도 멍은 잠복해 있다가 언제 다시 표면 위로 드러날지 모른다. 과거 2년 동안 석면 작업을 했다가 몇 십 년 뒤에서야 후유증이 발병한 노동자처럼 말이다.


“전반부는 육신이 거하는 공간으로서의 공장을, 후반부는 정신이 거하는 네트워크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 전반부가 산업재해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보랏빛 멍을 보여줬다면, 후반부는 인터넷데이터센터와 하드디스크 복구 기술자를 보여주며 디지털 시대에 현대인이 느끼는 쓸쓸함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어느 한 인터넷데이터센터 야간 교대 근무 노동자는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일한다. 네트워크를 관리하고 남는 시간에 디엠비로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메신저로 친구와 대화하고 관처럼 생긴 박스에 들어가 쪽잠을 잔다. 하드디스크 데이터를 복구하는 다른 한 노동자는 하드가 높게 쌓인 어둡고 좁은 방에서 홀로 작업한다. 그러다가 잠깐 게임을 하며 온라인상에서 사람들과 접속한다. 기계 소음과 분진이 날리는 앞의 작업장 환경에 비하면, 정보화 기기가 들어선 사무실은 조용하고 신체에 치명적인 유해요인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 환경을 관리하고, 우주라고 표현되는 하드 속 데이터를 복원해내는 노동자들은 고독해 보인다. 그들은 인터넷으로 자신이 어딘가 접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정서적인 허기를 달랜다.  





가끔 멍을 세게 눌렀을 때 너무 아파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라>는 어떤 장면들에서 내게 지독한 농담을 던지는 것 같았다. 장면 하나, 소음으로 청력을 손실한 노동자가 “지금 약 드시는 거 없으세요?”라는 전문의의 질문에 “그니까 소주 두 병이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산업재해 교육 현장에서 재생되고, 그걸 본 노동자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시차를 갖고 발생하는 웃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에게 웃음을 터뜨리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자못 씁쓸하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영화 후반부 사진동호회 사람들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다시 발생한다. 감독은 청소년 야구단, 수영강습 장면을 짧게 보여주며 연이어 사진동호회의 한 남자를 인터뷰한다. 카메라 기능을 낱낱이 외우며 새로운 기종이 나올 때마다 종류별로 기기를 산다는 남자는 자신의 활동에 “즐거움은 없어요. 결과물 하나 보려고 찍는 거죠”라고 고백한다. 장시간 노동으로 소진되는 삶은 정서적인 불안과 공허함을 불러오고 스포츠나 취미활동에 집착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여가마저도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소진하는 강박적인 노동으로 대체해 가는 것이다. 





<보라>는 여러 면에서 기존 고발 형식의 다큐멘터리 문법을 비껴간다.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의도로 수렴되지 않고 이질적인 장면들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설명 없이 전개되는 화면들이 언뜻 당혹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멍을 가까이에서 들춰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의 성과는 분명해 보인다. 이는 공장 기계 소음에 묻히는 노동자의 말을 담기 위해 화면 안에 잡힐 정도로 가깝게 다가가는 영화 속 붐오퍼레이터의 태도처럼, 감독의 치열하고 끈질긴 응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영화는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포착한 이것을 관객에게 보라 한다. 그리고 이 멍을 이미지의 잔영으로 관객에게 오랫동안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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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두만강>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1238







<두만강> 리뷰: 고요하고 묵직한 시선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장률 감독은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어 동북아시아를 배경으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타자와 경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작품 전반에서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민족과 국적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오늘날, 당장 나의 이웃이 되어 살아가게 된 이방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섬세하고 복합적인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의 영화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주목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슬픔이 침묵으로 흐르는’ 두만강을 배경으로 <두만강>은 고요함 속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준다. 북한과 연변의 경계에 놓인 조선족 마을에서 살아가는 소년 ‘창호’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소년 ‘정진’은 우연히 친구가 된다. 그런데 마을에서 탈북자들의 절도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그 와중에 어떤 탈북자가 창호의 누나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마을사람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마저 탈북자들을 적대시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정진과 창호의 축구시합은 무산되었으나 창호는 정진과 꼭 축구시합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다시 열린 시합 날, 누군가의 신고로 정진이 공안에게 잡혀가게 되고 창호는 이를 막으려 건물 지붕에 올라갔다가 그대로 떨어지고 만다. 





경계를 사이에 둔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 서로를 믿었다가 다시 불신하게 되는 과정, 아이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참혹함을 영화는 건조하고 고요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는 장률 감독 특유의 미니멀리즘적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설원을 오랫동안 롱테이크로 잡는 샷이나 창호의 사고를 건물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촬영한 샷 등에서 특히 그의 스타일이 드러난다. 장률의 카메라는 결코 인물들의 감정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관조한다. 그렇기에 느껴지는 묵직한 정서가 있다. 냉혹한 현실을 정직하게 담아냄으로서 이 영화의 비극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그 자체로 관객에게 전달하여 더 강렬한 감정적 파장을 이끌어낸다.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모든 아름다움이 다 들어있는 것 같다’(『영화잡지 아노』, 2016)는 장률 감독의 시선은 수없이 많은 경계인, 소수자, 주변인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이는 현실적인만큼 애정의 온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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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 대책 없다한줄 관람평


송희원 | 노후 대책 있다!

박영농 | 불안은 노후를 잠식한다

이지윤 | 우리는 너무 화가 나고! 인정사정 볼 것도 없다!

김은정 | 그들이 소리치는 삶의 대책





 <노후 대책 없다> 리뷰: 불안은 노후를 잠식한다(아주 사적인 감상)




*관객기자단 [인디즈] 박영농 님의 글입니다.



1.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영화를 글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강박적으로 고민한다. <노후 대책 없다>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영화를 과연 영화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포기했다.


2.

영화 속 출연자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 다 거부할 거야라든지, 나는 이런 거 하기 싫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거야 하는 치기에 얼룩져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펑크를 사랑하고 있구나.


3.

물론 펑크 정신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외부의 것들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곤 하지만, 영화 속 출연자들은 단순히 회의주의에 젖어 방탕하게 사는 것만을 최고로 삼지 않는다. 모두 엿 먹으라는 가사를 노래하지만 최소한 나 말고는 다 틀렸어,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그래서 부럽고 멋있다.


5.

사회를 비판하고 체제와 부조리에 대항하지만 또 그런 음악활동을 하기 위해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명 깊다. 한편, 그런 문제의식들을 음악의 영역에만 가둬두고 소비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메가폰을 들고 직접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예술에게 사회적 기능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흥미와 진지함을 고루 갖춘 이들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는 이유로 펑크를 그만둬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좌절하고 고민하는 이들의 잔상이 영화가 끝나고도 뇌리에 오랫동안 맴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부족해보이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비참하게 슬퍼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사랑한다는 게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다. 나도 모른다. 그러나 출연자들의 눈물과 비애는 거짓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7.

노후 대책 없다! 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끊임없이 노후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가폰을 잡고 거리로 나설 수도 있는 것일 테다. 이들은 단지 어리석은 반동분자에 불과한 존재들이 아니다. 누구보다 자신과 타인을 그리고 우리 사회를 사랑하고 있으며 또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크로 머리를 찍어대는 광기의 공연을 마치고 난 다음 소박하게 맥주를 아껴 마시는 이들의 모습은 공허한 이상주의자라기보다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8.

노후 대책 없다. 대신 노후에도 함께 살아가자. 사실상 그게 대책이다.

 

9.

이 리뷰는 대책이 없다.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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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나비효과한줄 관람평


송희원 | 사드 '진심' 가고 평화 '함께' 오라

이현재 |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해서 손을 놓을 수가 없어

이지윤 | 파란나비들의 날갯짓으로

최지원 | 싸우면서 평화에 가까워지는 사람들





 <파란나비효과> 리뷰: 파란나비들의 날갯짓으로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지윤 님의 글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사드(THAAD) 배치는 정권이 교체된 지금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사드의 외교적 가치와 군사적 실용성에 대한 의심, 그로 인해 파생되는 환경 파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 하에 사드 배치를 결정한다. 사드가 배치되는 경북 성주 군민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일방적 결정이었다. 박문칠 감독의 <파란나비효과>는 현재진행형인 사드 문제를 다룬 첫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다.





작년 8월부터 올해 4월까지의 촬영분을 토대로 제작된 <파란나비효과>는 팩트 체크가 아닌 성주 군민들의 목소리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사드라는 현실을 마주한 인물들의 사연과 감정, 생존권의 주장을 바탕으로 그 흐름을 이어나간다. 사드 배치 최적지로 성주가 거론된 후 시작된 반대 투쟁은 아이들에게 피해를 끼칠 레이더의 전자파가 걱정되어 거리로 나온 여성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카메라는 변화를 위해 모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담아내며 그 속에 피어나는 연대와 생각의 확장을 스크린까지 고스란히 옮겨온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성주 군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군민들의 모습이 자칫 님비(NIMBY) 현상의 단편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성주 군민들이 주장하는 것이 ‘성주군 내 사드 배치 반대’를 넘어선 ‘반전(反戰)과 평화’라는 것을 점진적으로 드러낸다. 더 나아가 사드 문제에 대한 생각의 확장은 정치적 시야의 확장으로까지 이어진다. 투쟁에 참여한 군민들은 정치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과거 스스로의 태도를 반성한다. 불편한 진실을 목도한 군민들이 ‘빨갱이’, ‘외부세력’이라 타자화되던 사람들과 비극적인 사건들을 되새기는 장면은 울컥한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들은 현재까지 이어져온 불통(不通)의 실타래가 멀고도 가까운 과거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한 이들은 실타래를 끊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평화를 외친다.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 힘겨운 순간들이 닥쳐오기도 한다. 투쟁의 불씨를 끄기 위한 회유와 압박, 제3부지 논란으로부터 비롯된 의견 차 등은 함께 변화를 외치던 군민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군민들은 연대의 끈을 놓지 않으며 힘겹고 불합리한 순간들에 맞선다.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누군가를 위해 대신 분노하는 연대의 과정은 거대한 국가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진심’이란 힘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진심은 성주에서 지속되고 있는 수많은 나비들의 날갯짓을 지치지 않게끔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파란나비효과>는 4월 26일, 소성리에 기습적으로 사드가 배치되는 장면을 통해 막을 내린다. 허무함과 동시에 분노를 자아내는 결말은 자연스럽게 현실과 이어진다. 사드가 배치된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는 여전히 ‘사드 반대’, ‘사드 철회’란 글씨가 선명하다. 마을회관 앞에서는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작품은 계속해서 반대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성주 군민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사드의 문제가 성주를 넘어선 모두의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파란나비효과>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시작된 파란 나비들의 날갯짓에 대한 연대를 호소한다. 미미한 파란 나비들의 날갯짓으로 평화라는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자 그렇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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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즈_Choice]에서는 이미 종영하거나 개봉으로 만나볼 수 없었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 '인디플러그'(www.indieplug.net)에서 

다운로드 및 관람이 가능합니다.


<카니발> 다운로드 바로가기 >> http://www.indieplug.net/movie/db_view.php?sq=73







<카니발> 리뷰: 그럴듯한 이름의 광기



*관객기자단 [인디즈] 김은정 님의 글입니다.



사람들이 지하철에 앉아있다. 사람들 사이로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지나간다. 그녀는 사람들의 동정을 구하고 있다. 어린 아이가 장애인을 조롱하며 그 뒤를 따라가지만 아무도 저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때 남자의 눈빛이 여자와 마주친다. 남자는 황급히 눈을 피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따끔하게 주의를 준다. <카니발>에는 서로 다른 두 명의 장애인과 남자의 관계가 그려진다. 남자는 그가 두 번째로 만난 노숙자로 보이는 장애인에게 돈 대신 아침에 이웃에게서 받은 선물을 건넨다. 남자는 자신이 호의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가 준 물건을 버리고 열차에 탑승하려고 한다. 남자는 자신의 호의를 거절한 장애인에게 화가 난다. 그는 자신의 건강한 몸을 이용해서 장애인을 폭행한 뒤 도주한다.





남자는 호의에 대해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사고방식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것이 한 눈에 보인다. 처음 열차에서 만난, 장애인을 조롱하는 아이를 저지한 이유도 그게 마땅히 도덕적인 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총대를 짊어지는 심정으로 행동했다. 그는 무엇이 바람직한지 알고 있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후 그는 장애인에게 자신의 애물단지를 건네면서도 ‘노숙인이므로 당연히 나의 호의에 고마워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숙인이 자신의 호의를 거절했을 때 화가 났던 것이다. 그가 상대방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의 인간으로 생각했다면 노숙인을 폭행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는 자신의 쓰레기를 ‘호의’라는 이름으로 노숙인에게 버린 것이다. 쓰레기를 받고 감사함을 느낄 이유는 없다. 게다가 상대방은 구걸하는 노숙인인데, 잘 포장된 물건을 들고 다닌다면 그의 사업에도 큰 지장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남자는 자신의 삶에서 품어 온 분노를 스스로가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분출했다. ‘나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상대방은 이를 무시했으며, 이유를 물었지만 나를 먼저 건드렸기 때문에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그럴 듯한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인간 깊은 곳에 내재한 합리적인 척하는 광기이다. 연민과 동정, 자비는 나와 동등한 인간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무의식적인 전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광기에 휩쓸리며 그것을 얼마나 단순한 방법으로 합리화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도덕이라는 것이 어수룩한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행동의 동기에 따라 기괴한 방식으로 변모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남자는 달라진 것 없는 하루를 산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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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타 보이즈한줄 관람평


송희원 | 현실은 기(승전)결, 우리만 아는 승전

이현재 | 타인의 진지를 비웃지 마라

이지윤 | 허기가 도는 세상, 빛나는 꿈

최지원 | 우리는 대책이 없고 무엇 하나 쉬운 것도 없다

김은정 | 온 몸으로 흔들기






 <델타 보이즈> 리뷰: 우리는 대책이 없고 무엇 하나 쉬운 것도 없다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지원 님의 글입니다.



<델타 보이즈>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톤으로 네 남자의 대책 없는 모험담을 이야기한다. 분명 남성 사중창 콘테스트에 도전하는 이야기임에도 ‘도전 해볼까’로 시작해서 ‘제대로 해보자’로 넘어가는 과정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대로 노래를 연습하는 과정은 영화 후반부에야 등장한다. 심지어 이렇다 할 배경음악도 없다.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도전을 해내고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마음먹는 과정이 얼마나 지지부진한지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때문에 (공연을 올릴 수 없게 되었지만) 공연 전 마지막 연습 이후의 이야기는 아예 생략되어 있고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들의 박수소리만 사운드로 삽입될 뿐이다. 도전의 시작, 노력하는 과정, 결말이라는 순차적 구조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인물들의 고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네 남자는 생각보다 능력이 없어서, 이미 여러 번 실패해서,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아서, 아내가 반대해서 등의 이유로 영화 곳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짜증이 치미는 현실에 그들은 고함치고 주정부리며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인물들의 공통적 ‘대책 없음’은 <델타 보이즈>의 단점이기도 하며 원동력이기도 하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인물들이 굳이 도전을 계속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장사를 뒤로 한 채, 그렇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닌 음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잘 하고 있던 생선가게와 공장을 그만두고 (잘 하지도 못하는) 사중창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자학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흘러간다.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즉 영화는 어떤 도전을 할 때, 확신을 가지고 뚜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한심해하고 괴로워하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티를 획득하게 되고, 따라서 다른 영화들과의 차별성을 가지게 된다. 신화적으로 꾸며진 모험담, 꿈의 도전기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후반부에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어 노래한다는 ‘대용’의 대사가 있는데, 이를 들은 ‘일록’은 더 큰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전까지의 모험담에서는 대용의 희망찬 대사가 그 자체로 희망적인 것으로 읽히겠지만 <델타 보이즈>에서는 대책 없는 해맑음으로 읽힌다. 게다가 일록의 상황을 알고 있는 관객으로서는 공들인 탑이 완성되기 직전에 무너지는 상황에서 들려오는 희망적인 대용의 말이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대책 없음’은 분명 영화의 단점으로 보일 수 있다. 성인 남성 넷이 시도 때도 없이 술에 취해서 고함을 지르고 현실적인 고민은 하나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노래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장면들이 일으키는 반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 인물의 강력한 캐릭터성과 무식한 고군분투는 독특하고 생생한 활기를 띠게 한다. 여타 영화와는 다른 각도에서 주인공들의 지친 모습, 미성숙한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희망적 메시지까지 담아내고 있어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솔직하고 단순한 이 중창단 도전기는 어쩌면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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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한줄 관람평


송희원 | 먼 이국땅에서 펼쳐지는 여성들의 강인한 삶과 노래

이현재 | 잊혀진 꿈의 악보

박영농 | 고려(빼어날 고, 아름다울 려)의 아리랑

최지원 | 가락으로 전해지는 한의 정서와 감동

김은정 | 역사 한 켠, 여전히 노래하는 고려인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리뷰: 잊혀진 꿈의 악보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현재 님의 글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오래된 사진 하나가 투사된다. 오래된 사진을 처음 본 관객은 그 사진이 전달하고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정지된 화면 위로 내레이션이 흘러 나와 그 사진에 대한 정보를 추측가능하게 만든다. 내레이션은 한국에서 러시아로,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쫒긴 그들의 기구한 기원을 짧게 서술한다. 서술이 마무리되면 카메라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를 걷는다. 다시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며 그들의 고통스러운 이주를 전달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고려인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에 당도한다. 다시 내레이션은 그들이 처음 연해주에 도착하여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움집을 파고 살았던 시절을 서술한다. 서술이 마무리 될 즈음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념비 위에 무희로 보이는 여인의 사진이 투사된다. 그리고 그제야 내레이션은 영화가 다루게 될 대상이 고려극장, 이함덕과 방 타마라가 누구인지를 서술한다. 이상이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이하 <고려 아리랑>)의 오프닝이다.





<고려 아리랑>의 오프닝은 정해진 대상을 다루려고 하는 다큐멘터리로서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이미지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정보를 전달하는 쪽은 이미지를 돕고 있는 내레이션에 가깝다. 그렇다고 내레이션이 이미지들을 정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프닝임에도 불구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내레이션은 선형적인 시간을 따라가지 않는다. 내레이션이 전달하는 정보의 시간대는 고려인의 기원이 된 러시아의 황망한 땅에서 고려인이 겪었던 이주의 시간으로, 그리고 다시 러시아의 황망한 땅으로 돌아간다. 회귀한 곳에서 내레이션의 서사는 다시 고려인들의 본격적인 삶의 터전이 된 중앙아시아로 비약한다. 정리되지 않은 내레이션은 이미지들을 한 곳에 묶지 않고, 묶이지 못한 이미지들은 벌어진 사태나 인물의 초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시퀀스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영화는 고려극장의 공연 장면이나 이함덕과 방 타마라의 노랫소리 혹은 풍경과 자료가 오버랩 되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앞서 말했듯 열리고 닫힐 때 제시되는 사운드나 이미지가 시퀀스에 제시된 형상을 정리하거나 정보들을 좌표에 지정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고려인들에 대한 김소영 감독의 시선이나 고려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접고 펼치는 기능을 한다. 이 기능이 형성하는 것은 고려인에 대한 정보라기보다는 떠돌고 이산되어야 했던, 그들이 걸어온 궤적의 리듬이다. 이 리듬은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정돈하고, 나아가 고려인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일종의 거울이 된다. 영화는 정보를 좌표로 지정하지 않는 대신 유동적으로 조응시켜 그들이 왜 한국이 아닌 연해주를 그리워했는지, 어딘가에 정착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무엇인지, 그들의 노래가 그들 자신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복원한다. 이 리듬으로 인해 영화는 고려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정보적 아카이브라기보다는 고려극단의 노래를 기준으로 정보를 정리한 일종의 악보와도 같다.





여기에는 해소되지 않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사명이라면, 흘러나오는 영화는 과연 지금 시점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제시되고 있는 ‘악보’는 적절한 재현인가? 이는 결국 복원의 기준은 왜 리듬이어야 했는지 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을 하고 있진 않다. 그러나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 이 영화가 악보였어야만 하는 이유를 언뜻 찾을 수는 있다. 영화의 초반, 방 타마라가 (우리가 보았던) 고려극장의 공연영상을 보고 난 뒤 “나는 이 영상을 처음 봐요. 제 젊은 시절을 되돌려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영상의 주인공을 본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시간이 중첩되는 순간을 관람을 통해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다분히 체험적인 순간이지만, 방 타마라 본인에겐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받는 회귀의 시간이다.


이러한 회귀는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에 나오는 이함덕의 모습이 투사되는 장면에서 더욱 명확하게 형상화된다. 보는 이는 없지만, 투사되는 영상은 그 곳에 한 때 희망을 품고 왔던 이들을 위한 일종의 제의이다. 이 제의는 잃어버린 역사를 마주한 이가 그것에 시선을 던지는 가장 적합한 태도이다. <고려 아리랑>은 자신만의 집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헤르메스가 되고 있다. 중간 중간 제시되는 오버랩 된 영상과 자료들은 장소들을 움직이고 교통하게 만들고 중첩시키는 수행자로서 작동한다. 고려인이라는 망명자를 찾아 떠난 카메라는 그저 또 다른 장소를 찾아 영원히 떠돌 뿐이다. 이 떠돎의 상태는 고려인들이 처한, 그리고 처했던 ‘현실’과의 결연이며 이 현실은 본 다큐멘터리의 출발점이자 최종적인 지향점이다. 결국 자료를 정리하지 않고 리듬만을 남겨놓아 자료를 ‘떠돌 수 있게’ 만든 것은 본 다큐멘터리가 수행하는 수사의 기반이자 윤리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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