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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Playing/정기상영 | 기획전

[발제문]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는 다큐멘터리 <그녀들의 점심시간>

by indiespace_은 2017. 5. 31.

그녀들의 ‘삶’과 ‘노동’에 접속하기

<그녀들의 점심시간>


강남역 10번 출구 활동가 이지원


영화 <그녀들의 점심시간>에는 총 열 명의 여성들이 출연한다. 카메라는 별다른 사건이나 반전 없이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취업준비에 지쳐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모습, 직장에서 상사에게 지적받는 모습, 사람 없는 경로당에 누워 잠든 모습……. 우리는 연령도, 직업군도 모두 다른 그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는 은밀하게 접속된다.

직업이 배우인 ‘그녀’는 임신 이후 난생처음으로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삶에서 일이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에 미뤄왔던 임신을 한 그녀는 때로는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기도 했던 임신의 경험이 배우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녀에게 임신은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뤄왔던 것이지만 지금은 어머니로서의 행복과 배우로서의 자원, 양쪽 모두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어머니로서의 행복 이면에 있는 육아노동을 동시에 조명한다. 세 아이의 어머니인 ‘그녀’의 하루는 아이들을 깨워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빵으로 늦은 아침을 때우다가도 아이가 깨어 엄마를 찾으면 먹던 빵을 내려놓고 부리나케 달려가 아이를 얼러 안아야 한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고 난 뒤 식사를 준비할 때에도, 아이들에게 밥을 다 먹이고 본인의 식사를 챙길 때에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를 찾는다. 보기만 해도 엄청난 강도의 노동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녀의 정신없는 식사시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부터 질문해보아야 한다.

사회는 ‘그녀’의 하루에 노동이 있다고 이야기할 것인가? 육아는 어째서 ‘그녀’의 몫인가? ‘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노동임을 주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생각해보자. 모성애 없는 여자, 비정한 모정의 낙인이 찍힐 것이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집에서 놀고 먹으며, 떼로 몰려다니며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고 아이 단속도 하지 않는 엄마”를 지칭하는 ‘맘충’ 서사가 대중화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한국사회에서의 모성신화는 여성의 영역을 가정으로 규정하고, ‘육아’라는 엄청난 노동을 어머니로서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으로 포장해왔다. 이는 비단 육아 뿐 아니라 가사노동에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빛 좋은 개살구”, 골드미스인 ‘그녀’가 결혼과 출산을 하고 싶다고 느끼면서도 “가정에서의 ‘나’가 되는 것은 밥을 차린다는 것”이라고 통찰하듯이 말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밥 차리는 것’이야말로 젠더화된 노동이다. 누군가에게 식사시간은 휴식의 시간일 수 있겠으나 누군가에게는, 특히 여성에게는 식사시간이란 으레 노동의 시간인 것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그녀’는 타인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동안 “전쟁을 치른다.” 뒷정리까지 모두 마친 그녀는 늦은 시간 그때그때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손님맞이는 계속된다. 그녀의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여유로운 점심시간은 사실상 그녀의 노동 위에 서있는 셈이다.

신발가게를 하는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식사할 때와 혼자 식사하는 지금을 비교하며 “그때는 반찬도 신경 써서 준비하고, 예쁘게 차려 먹”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남은 반찬으로 점심을 먹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여자는 가족을 먹이기 위해 요리”하는 것인데, 이것이 비단 그녀만의 생각인지 질문해보아야 한다.

취업준비생 ‘그녀’는 혼자 식사하는 또 다른 출연자다. PD의 꿈을 꾸고 있는 그녀는 강의를 듣는 등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되고 싶은 욕구만 남아있고, 실패한 기억 뿐”인 그녀에게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과정은 녹록치 않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 돌아올지를 확신하기 어려운 채로 기약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취업준비생에게 식사다운 식사란 어쩌다 친구와 만났을 때에야 겨우 가능한 것이다. “이게 7일째 된 밥인가? 괜찮아. 먹고 소화하면 돼.” 되고 싶은 모습과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의 외로움과 불안함은 그러나 그 되고 싶은 모습이 된다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의 행복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택시기사인 ‘그녀’는 “택시는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차 안에서 김밥으로 식사를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얼른 먹던 것을 멈춘다. 그러나 “운전하는 것도, 손님과 이야기 나나누는 것도,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도 좋아하는 그녀는 택시운전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여성 운전자로서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에도 굴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린다.

한편, 함께하는 점심시간을 통해 노동의 고단함을 잠시 잊어내는 경우도 있다. 경마장 청소노동자인 ‘그녀들’은 돈을 잃은 경마꾼들의 예민함에 힘든 노동의 시간을 보낸다. 관리자는 청소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꺼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맛이 없”던 밥도 “여럿이 먹으니 맛있다.”는 그녀들은 서로 반찬을 나누고, 너무 적게 먹는다며 핀잔을 주기도 하면서 서로를 챙겨주고 의지한다. ‘식구’의 뜻이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임을 비춰봤을 때, 그녀들에게 점심시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식구인 시간이다.

경로당의 ‘그녀’ 역시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아침도 못 먹고 온” 노인들의 식사를 챙긴다. 이틀 안 나오면 궁금해서 전화를 한다는 그녀는 그 이유를 “식구니까”라고 말한다. 그 말대로 경로당의 할머니들은 같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모여앉아 식재료를 다듬는다. 경로당이라는 공간에서 모두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밥을 먹음으로서 그들은 혼자가 아닌 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과 노동 속에서 그녀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누군가는 또래 여성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하드록, 블루스록 같은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고, 누군가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저녁만이라도 맛있는 식사를 찾아 먹기도 한다. 또 함께 먹는 시간을 통해 서로에게 든든한 식구가 되는 ‘그녀들’이 있는가 하면, 고된 취업준비의 시간 속에서 간간히 친구를 만나 “밥다운 밥”을 먹는 ‘그녀’가, 자신의 일을 온 몸으로 즐기며 살아가는 ‘그녀’가 있다.

영화는 “점심시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생활의 기본적인 영역인 식사를 조명함으로서 여성들의 삶과 노동에 진하게 접속한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점심시간”을 통해 만나는 그녀들의 삶과 노동이 각자 분리된 듯 연결되어 있고, 어쩌면 ‘그녀들’을 바라보는 ‘나’의 그것과도 닮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맛있기만 한 것은 아닌, ‘그녀들’의 삶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솔하게 와 닿는다.

영화 속 ‘그녀들’, 그리고 영화 밖의 ‘그녀들’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매일 먹는 밥을 짓고, 먹고, 나누며 ‘우리’의 삶을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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