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_기획] 삼인행(三人行): 영화 공간 탐방기

by indiespace_은 2017. 4. 10.

 삼인행(三人行): 영화 공간 탐방기 

- <최악의 하루> 서촌, 남산 / <춘몽> 수색 / <혼자> 신당9재개발구역



*관객기자단 [인디즈] 이형주, 최미선, 전세리 님의 글입니다.



때때로 영화 속 공간은 영화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인물들의 행동, 벌어지는 사건, 흘러가는 시간 모두 공간 위에 적히고 쌓인다. 우리는 공간을 통해 그들의 감정을 보고, 나아가 그 영화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느낀다. 이렇게 기억된 공간은 그 영화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인디즈는 2016년 하반기에 개봉한 영화 중 특히 공간이 돋보였던 세 편의 영화 <최악의 하루>, <춘몽>, <혼자>의 장소를 탐방해 보았다. 최미선 관객기자는 <최악의 하루> 속 서촌과 남산을 다녀왔다. 매일 연습실에서 나와 걷는 길에서 다시 한 번 살짝 벗어나 한여름과 초가을의 그 날을 문득 떠올릴 ‘은희’를 상상하며 그녀의 시점으로 새 하루를 구성해보았다. 한예리 배우의 발걸음이 향하는 또다른 곳인 <춘몽> 속 수색역 근처는 전세리 관객기자가 찾았다. 수색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와 시간성을 되짚으며 동네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번 기사의 제목으로 차용한 ‘삼인행’은 <춘몽>의 제목 후보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형주 관객기자가 <혼자>의 신당9재개발구역을 방문했다. 온전한 동네의 이름조차 잃어버린 이곳은 주인공 ‘수민’이 끝끝내 지우지 못한 기억들이 묻어나오는 곳이다. 구부러진 골목들 사이에서 길을 헤매다 문득 자신을 되돌아 보기도 했다.

이 세 공간 탐방에서 인디즈 '삼인'이 만난 스승은 작품에 한껏 밀착한 일상의 시간들이었다. 작품-나-공간의 교류가 매우 묘한 느낌으로 우리를 채워주었다. 이제 3인을 따라 작품 속을 걸어보자. 



1. <최악의 하루> 은희 따라 걷기


초록이 물든 뜨거운 여름날의 남산은 폭발 직전이던 은희의 하루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시간으로부터 여러 달의 흐른 지금, 그곳은 오히려 흑백에 가까운 장소가 되었다. 어디서도 색깔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빼곡히 들어찬 앙상한 나무들과 그것을 실감케 하는 차가운 공기만이 가득했다. 어떤 아쉬움도 없이 이렇게 변해버린 계절 속에서 은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뜨거웠던 여름이 주춤하고 가을이 올 것만 같았던 날, 끝도 없이 걸었던 그 길을 은희가 되어 다시 걸어보았다.



아… 그날 진짜 최악이었지

‘서촌은 이제 나에게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연습이 끝나고 골목 골목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가끔 여기 오는 외국인이 길을 물어보는데 이젠 어디든 능숙하게 잘 찾아준다. 그때마다 그 일본인이 생각난다. 이름이 료헤이였던가? 아무튼.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은 하늘이 작정하고 나를 괴롭히나 싶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거짓말을 하는 일로 먹고 살고 여전히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다. 아,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날 이후로 SNS는 안 한다. 그 모든 일이 다 트위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지워버린 후 아직까지도. 좀 심심하지만 그 덕에 연기 연습에 더 집중하고 있다.’



여길 다시 올 줄은 몰랐다

‘몇 달 만에 다시 찾은 남산은 겨울이다. 절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금 이 길에서 그날을 회상했을 때 가장 나를 사로잡는 기억은 끔찍했던 삼자대면의 순간이 아니다. 하루의 끝에서 료헤이와 우연히 다시 만나 걸었던 어둑해진 산책로, 그리고 의미가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는 언어로 서툴게 나눴던 대화이다. 이곳이 여름을 잊은 것처럼 나도 그날을 지나 보낸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날 료헤이가 말해준 소설 속 여자도 이맘때쯤 이 길을 걸었을 것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다던 무표정의 그 여자. 어쩌면 그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좀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그 여자가 돌아보았던 캄캄한 산책로에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이야기는 해피엔딩일 테니까.’



‘날씨가 좋다. 그날도 이 말을 했던 것 같다. 겨울은 그 계절만이 가질 수 있는 온도와 냄새가 가장 잘 느껴지는 계절인 것 같다. 바람이 코 끝에 닿을 때 괜히 공기도 좋게 느껴지는 정도의 냉기. 하지만 곧 계절은 변하겠지. 그런데 료헤이는 정말 그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마쳤을까? 얼마 동안은 서점에 들러 그의 이름으로 된 책을 찾을 것 같다. 팬레터를 보내야지.’ 



 INFORMATION 


제목: 최악의 하루

각본/감독: 김종관

출연: 한예리, 이와세 료, 권율, 이희준(특별출연)

개봉일: 2016년 8월 25일











 SYNOPSIS 


‘어떻게 오늘, 이래요?’

늦여름 서촌의 어느 날,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는  연기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 길을 찾는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난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이상하게 대화가 이어지는 료헤이와 헤어진 후 은희는 드라마에 출연 중인 남자친구 현오(권율)를 만나러 촬영지인 남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같은 시간, 한 때 은희와 잠깐 만났던 적이 있는 남자 운철(이희준)은 은희가 남산에서 올린 트위터 멘션을 보고 은희를 찾아 남산으로 온다. 오늘 처음 본 남자, 지금 만나는 남자 그리고 전에 만났던 남자까지 하루에 세 명의 남자를 만나게 된 은희.

과연 이 하루의 끝은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2. <춘몽> 다음 계절이 봄이라 하니 


<춘몽> 주요 배경지인 수색에 다녀왔다.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수색은 흑백 정서를 가진 곳이다. 그는 5년 동안 상암에 살았지만 수색이 컬러로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상암은 신도시이고 수색은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곳이다. 이곳은 언뜻 서울 교외나 다른 지역에 다다른 느낌을 준다. 



수색역 옆 굴다리를 지나면 장엄한 신도시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나는 그곳에서 모종의 시간차를 느꼈다. 수색역 굴다리에 ‘수상한 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기도 했다. 그 이름처럼 수색은 수상하고 오묘한 곳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 출퇴근 한다. 영화에서 ‘예리’와 세 남자는 수상한 굴을 통해 한국영상자료원에 간다.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 없이 목도리를 뒤집어쓴 채로 잠시 거닐었다.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향수 비슷한 여운이 남는다. 입구에 채소와 과일을 잔뜩 내놓은 슈퍼마켓, 문방구 앞 뽑기와 게임기, 비 오는 날의 분식집, 아이들의 하굣길. 굴다리 하나만 지나면 만나게 되는 익숙한 풍경들이 아주 묘한 느낌을 주었다. 동네 이곳저곳을 거닐다 ‘주영’이 고양이 밥을 주던 주택 앞에 가보기도 했다. 그 집은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오르막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렴풋이 방송국 건물이 보이고 그 아래 사람들이 길을 오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리와 세 남자가 앉아있던 슈퍼에 갔다. 가게 이름을 몰라 사진만 가지고 물어물어 갔다. 행인에게도 묻고 주민센터에 들어가 묻기도 했다. 덕분에 금방 찾을 수 있었고 간판에는 ‘윤창슈퍼’라고 쓰여 있었다. 이전 사진에는 가게 앞에 평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카시아 까페로 바뀌어 있다. 주민들은 그곳에 옹기종기 앉아 추운 몸을 녹일 것이다.   

다시 역으로 가는 길, 멀리서 역을 바라보다 역 계단을 내려오던 예리의 모습이 스쳤다. 밤이 되니 여름처럼 비가 쏟아졌다. 많은 비. 맑은 날 다시 가보고 싶다. 햇살 잔뜩 스미는 겨울 끝 무렵, 또는 어느 봄날에.



 INFORMATION 


제목 : 춘몽 春夢

각본/감독 : 장률

출연 : 한예리, 양익준, 박정범, 윤종빈, 이준동, 이주영

특별출연 : 신민아, 유연석, 김의성, 김태훈, 조달환, 강산에

개봉 : 2016년 10월 13일












 SYNOPSIS 


 “바보 같은 꿈을 꿨어. 우리만의…”


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농담 따먹기나 하는 한물간 건달 익준

밀린 월급도 받지 못하고 공장에서 쫓겨난 정범

어리버리한 집주인 아들, 어설픈 금수저 종빈

그리고 이들이 모두 좋아하고 아끼는 예리가 있다.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예리가 운영하는 ‘고향주막’은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오아시스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 그들만의 여신이라고 생각했던 예리의 고향주막에 

새로운 남자가 나타났다.






3. <혼자> 기억도 철거될 수 있을까 


밤에 작업실에서 이곳을 보고 있으면 꼭 내 뇌, 머릿속 같아

<혼자> 속 수민은 이상한 꿈에서 계속 헤맨다. 깨도 깨도 다시 돌아오는 이 골목을 보며 그는 마치 자신의 머릿속 같다고 말한다. 그 대사처럼 <혼자> 속 공간은 분명히 기억, 트라우마가 재현되는 상징이다. 가파른 계단, 꾸불꾸불 끝없이 이어진 골목들로 이루어진 신당9재개발구역은 시대와 삶의 시간이 가득 배어있음과 동시에 기한 없이 연장되는 철거를 앞두고 버려지고 낡은 모양새로 묘한 긴장감을 품고 있다.



골목을 들어서면 종종 대문이 열린 집들이 보인다. 장독대와 빨래가 널려있어 마당인가 기웃대보면 또 다른 집으로 연결된 길이 숨어있다. 마당이자 마당 아닌 곳, 문이지만 닫을 수 없는 문들이다. 애초부터 계획적으로 지어지지 않은, 필요에 따라 들어오고 팽창하고 쇠퇴하며 남은 공간의 틈을 엿본다. 



털어버렸으면 좋겠다. 깡그리 다, 새로, 시작하게

다른 골목으로 들어오니 빨간 깃발들이 가득하다. 이 빨간 깃발은 재개발에 반대하는 표시이다. 현재 재개발 찬반이 강력히 대치하고 있다. 사진을 찍는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경각심이 느껴지게 묻는 분들이 있었고, 하루 아침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된 이야기를 처음 보는 나에게 하는 분도 있었다. 아마 ‘더 나은 삶’이 철거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현재의 부정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 공간을 다 부수고 새 건물을 뚝딱 짓는다면 갖고 있던 모든 기억이 다 없어지는 걸까 궁금했다. 이곳에 수민의 아픈 기억들이 숨은 건 쌓인 시간들을 너무 일찍 놓아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골목을 돌다 보니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아까 지나친 곳을 다시 보았다. 뭉개지고 부서진 채로 원망의 눈빛만 쏘아붙이던 그들이 떠오르자 문득 내 한계의 잔해들도 자꾸 떠올랐다. 골목을 내려오며 나의 동네를 생각했다. 자로 잰 듯한 택지지구의 아파트. 7년의 시간 동안 번지르르해 보이던 대리석에 먼지가 끼고 위태하던 소나무는 결국 시들어 잘렸다. 시간이 쌓일 틈 없는 나의 장소에서 훗날 내 기억은 어디에 숨을 수 있을까. 


 INFORMATION 

제목 혼자 (Alone)

연출 박홍민

출연 이주원, 송유현, 이성욱, 윤영민, 김동현

상영시간 90분

관람등급 청소년관람불가

개봉 2016년 11월 24일









 SYNOPSIS 

“잘 생각해봐,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달동네가 배경인 다큐멘터리를 준비중인 한 남자,

우연히 건너편 옥상에서 벌어지는 살해 현장을 목격한다.

살해 장면이 남자의 카메라에 찍힌 것을 눈치챈 복면의 괴한들은

즉시 작업실로 찾아와 거대한 망치로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잠시 후 건너편 동네의 정자에서 알몸으로 깨어난 남자.

모든 게 이상한 꿈이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또 다시 괴한에게 죽임을 당하고

정신을 잃은 남자는 또 한 번 같은 골목에서 눈을 뜨는데…




스크린을 넘어 재생되던 영화들


이 세 공간은 재미있게도 모두 서울이지만 전혀 한 도시처럼 보이지 않는다. 남산은 겨울임에도 청명하고, 수색은 차갑고도 아련하며, 재개발 지역은 친숙하면서도 날카롭다. 이처럼 다양한 동시에 본질적인 정서를 담아낸 건 독립영화 특유의 깊고 분명한 시선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공간에 새로운 색칠을 한다기 보다 수북이 떨어져있던 낙엽 하나를 주워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것. 고인 바람이나 하수구의 악취 또는 창문에서 새어 나온 보글보글 끓는 찌개 냄새 같이 그곳에만 가면 나던 내음을 기억하고, 가만히 앉아 자리를 지키며 시간을 쌓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을 찾는 것. 독립영화가 공간을 직면하는 힘을 갖는 법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간을 재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화 속 공간을 방문한다면 영화의 확장이 이뤄질 수 있다. 각 영화의 주요한 영감과 정서를 만들어 낸 공간을 직접 방문하며 우리는 영화를 되새김과 동시에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하고 공간의 역할에 대해서 사유해보기도 하며 나아가 공간과 나를 직접 이어 보기도 했다. 우리의 감상이 영화를 얼마만큼 담았을 지는 모르지만, 스크린을 넘어 재생되는 영화를 엿보았던 건 분명하다. 다시 영화의 막이 내렸기 때문일까. 조금 씁쓸하지만 한 켠에 따뜻함을 갖고 위로를 받으며 돌아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