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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관객기자단 [인디즈]

[인디즈] 욕망의 바다에 울려 퍼지는 숨비소리 <물숨> 인디토크(GV) 기록

by indiespace_은 2016. 10. 6.

욕망의 바다에 울려 퍼지는 숨비소리  <물숨>  인디토크(GV) 기


일시: 2016년 10월 1일(토) 오후 5 상영 후

참석: 고희영 감독, 황도철 촬영감독

진행: 영화사 진진 정태원 팀장




*관객기자단 [인디즈] 최미선 님의 글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물질. 살기 위해 멈추지 않는 끊임 없는 자맥질. 바다가 밥이고, 집이고, 인생 그 자체인 제주 해녀의 삶을 담은 영화가 있다. <물숨> 인디토크에서 영화를 만든 고희영 감독과 아름다운 영상미로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한 황도철 촬영감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사 진진 정태원 팀장(이하 진행): 영화를 보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물숨>을 만드신 고희영 감독님과 황도철 촬영감독님을 모시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고희영 감독(이하 고): 요즘 독립 다큐멘터리를 보시는 분이 많지 않아서 이걸 만들어야 될까 고민이 들 정도로 걱정이 많았어요. 다른 화려한 상업영화들을 두고 이렇게 <물숨>을 찾아와 주시고 이야기를 위해 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도철 촬영감독(이하 황): 북경에서 같이 일을 하던 중에 이 작품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물음에 술자리에서 얼떨결에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영화가 극장에 오르니 감회가 새롭네요. 영화를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행: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이 해녀에 대한 작품인 걸 알고 오셨을 텐데요, 왜 해녀를 촬영하게 되었나요?


고: 누구나 어렸을 때 자기 고향이 있고, 그 곳이 싫을 수도 있죠. 제 고향은 제주인데, 그곳은 섬이어서 어렸을 때 고향이 참 싫었어요. 벗어나고 싶었지만, 형편이 좋지 못해서 서울로 가지는 못하고 대학 졸업 후에 탈출에 성공했어요.(웃음) 서울에 와서 ‘그것이 알고 싶다’ 작가로, 독립 PD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가 지금은 북경에 살고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마흔이 되면 인생의 시련이 몰아치는 시기가 찾아온다고 해요. 저 또한 그런 시련이 찾아왔는데, 그것을 겪으면서 젊을 때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이 그리워졌어요. 그때 고향에 내려가 바다를 바라봤는데, 처음으로 목숨을 건 해녀들의 모습이 제 마음속에서 자맥질했고 그분들의 숨비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그저 평범한 풍경으로만 보였던 모습들이었죠. 그 모습을 담고자 7년간 촬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행: 촬영을 위해 해녀 분들에게 다가가기가 참 어려웠을 것 같아요.


고: 처음에는 제주가 내 고향이라 다른 감독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우도에 가자마자 그분들께 내쳐졌어요. 카메라에 모습이 담기는 것을 싫어하셨거든요. 그래서 2년간은 촬영을 거의 하지 못했어요. 황도철 촬영감독은 뉴스 보도국에서 깡다구 있기로 유명한 감독이에요. 사회의 어두운 곳을 취재하면서 겪을 건 다 겪어본 분이죠. 그런데 그런 황 감독도 해녀 분들에게는 꼼짝을 못하더라고요. 새로운 발견이었어요.(웃음) 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도에 가면 기가 빨리는 기분이라고 하세요. 그분들은 날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죠. 자연의 변수를 예측할 수 없기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마음으로 바다에 가시기 때문에 그런 분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던 제 모습을 스스로 반성했어요. 


황: 누구나 차이는 있지만, 점점 더 친해지는 데에는 그만한 기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은 제가 갈 때마다 저를 잊어버리셨어요. 그래서 일부러 멀리서도 알아보시라고 녹색 모자를 매일 쓰고 다녔어요. 


고: 그분들은 물에 들어가실 때 음식을 전혀 안 드세요. 그래서 물질이 끝나고 바다에서 나올 때는 체력이 바닥이 나고 심한 허기를 느끼죠. 그때 그 모습을 촬영 할 것인가, 무거운 해산물을 들어드려야 하나 늘 갈등했어요. 저와 촬영감독님은 지상 촬영을 맡았기에 밖에서 갯바위에 붙어 늘 7시간씩 기다렸어요. 나오는 장면을 찍기 위해 기다렸는데, 차마 그 장면을 찍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하다가 저는 도울 테니 황 감독님이 촬영을 해달라 부탁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황 감독님도 함께 돕고 있더라고요. 허탈한 부분이 있었죠. 그래서 촬영을 놓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요. 스태프 모두 같은 마음이었어요.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에 점점 마음을 여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행: 사계절을 담았고 지상과 수중 촬영이 병행됐습니다. 과정이 힘드셨을 것 같지만, 보는 관객입장에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어요. 촬영 당시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고: 구성을 보면 봄으로 시작해 다시 봄으로 끝나요. 방송 다큐를 오래 했기에 시청률에 대한 강박이 있었어요. 그래서 방송 다큐에서는 시작할 때 굉장히 격렬하고 자극적인 것을 넣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구성을 하게 되죠. 그런데 해녀들의 삶을 보다 보니 자연스러운 모습을 다루고 싶어졌어요. 인위적으로 뭔가 만들어내고 싶지가 않았고 그렇게 해서도 안될 것 같았어요. 송지나 작가님 또한 그렇게 생각해 주셨어요. 자연스러운 구성과 더불어 항공 촬영도 많이 했죠. 그 당시에는 드론이 없었어요. 마치 구름 위에 떠서 바라보는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원했는데, 장비도 없고 예산도 부족해서 고민하던 중에 직접 비행선을 만들어 문화재를 찍고 계신 분을 만났어요. 그 분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 분은 문화재가 좋아서 자비로 어렵게 비행선을 만들어 촬영을 하고 계시던 분이었기에 서로의 마음이 통했죠. 그래서 그분의 도움으로 자연스러운 항공 촬영을 할 수가 있었어요.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 덕분에 이런 자연스러운 구성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진행: 촬영감독님은 술김에 승낙을 해서이기도 하지만,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년간 끊임없이 고 감독님과 함께 일하신 이유가 있나요?


황: 그래서 고 감독이 수시로 술을 사줬죠.(웃음) 어렵다기보다, 다큐는 로망이에요. 뉴스를 찍으면서 한계를 느꼈고 돈은 사이사이 일해서 벌면 되니까 작업의 개념으로 생각했어요. <물숨>의 경우는 연출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일단 통제할 수가 없는 분들이었죠. 그래서 리얼하게 담을 수밖에 없었어요. 


진행: 해녀들의 삶. 그것 자체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관객의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관객: 처음 해녀들의 삶을 알 수 있었던 건 권철 사진작가의 사진집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때 숨비소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 그 소리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느껴졌어요. 저는 소방관인데 숨을 참아야 한다는 점에서 해녀들의 삶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에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영화 기획 당시 해녀의 삶을 담으면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고: 솔직하게 말하면 신파 같아서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사실 저는 40살에 암 진단을 받았어요. 이 영화는 치료를 받으면서 시작했어요. 치료 중에 고향의 바다에서 저분들을 발견했죠. 그 당시에 저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죽음이 두려웠어요. 그런데 매일 무덤이 될 수도 있는 곳으로 뛰어드는 그분들의 모습을 본 거죠. 어느 날 하루 종일 그 광경을 지켜봤어요. 늘 들고 다니던 카메라로 그 모습을 촬영 했어요. 해외 버전은 그 장면을 담은 것으로 시작돼요. 처음에는 살아있는 숨비소리에 대한 강한 이끌림, 그 이면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어요. 그리고 촬영을 하면서 그분들의 바다 속에서 저 자신의 욕망을 봤어요. 마지막 촬영 즈음에 이런 깨달음을 얻었죠. 능력도 없고, 나는 하군인데, 상군을 탐하다가 이렇게 됐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물숨이라는 단어가 아주 강하게 와 닿는 내 자신을 발견했어요. 이 과정을 통해 제가 제 인생의 바다를 발견 했듯이 다른 관객들도 자신의 바다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진행: 감독님이 실제로 물질을 시도하셨는데, 해녀 분들이 감독님을 하군이라고 하셨다고요?(웃음)


고: 사실 저는 정말 해녀가 좋고 해녀가 되고 싶어요. 언니들에게 말했어요. 언니들은 못찍는다고혼내는 상사도 없고, 몸은 힘들지만 돈도 벌어오고 좋겠다고요. 저의 꿈은 코스모스 해녀 언니들과 함께 늙어가면서 그들의 마지막까지 기록하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 영화를 만들면서 수중 촬영을 못했다는 것이 죄책감이 들었어요. 바다에 들어가서 숨을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면서 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죄송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배워서 직접 수중 촬영을 하며 더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집 앞 마당에 물을 받아놓고 물안경 끼고 연습을 해요. 그것만 해도 무섭고 잘 안 되더라구요. 그 모습을 보고 언니들이 “똥군이다. 딱 봐도 알겠다.” 하시더라고요.(웃음)


진행: 촬영감독님은요?


황: 저는 들어갈 시도도 안 했죠. 수중촬영 감독님이 베테랑이기에 믿었습니다.(웃음) 


고: 그런데 계속 황 감독님이 망원렌즈를 사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샀죠. 아무리 줌을 당겨봐도 멀리 있는 해녀 분들이 안 보이는 거에요. 저희는 오랜 시간 계속 지켜봤기 때문에 숨비소리만 들어도 자맥질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옆에서 누가 누군지 알려줬지만 보는 분들은 누군지 모른다고, 찍어도 똑같이 보이기만 한다고 그걸로 싸우기도 했어요.(웃음) 할머니 해녀 분들을 계속 지켜보면서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지켜봤죠. 한참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뒤에 길이 없어진 적도 있었어요. 물이 차는 줄도 몰랐던 거죠. 갑작스러운 파도를 맞고 장비를 챙기느라 안절부절 한 적도 있어요. 그럼에도 열심히, 즐겁게 촬영 해주신 감독님들께 미안한 점이 많아요.


관객: 7년이라는 촬영기간이 놀라웠어요. 그만한 기간이 걸릴 것이라 처음부터 예상하셨는지 궁금하고, 소스에 비해 러닝타임이 길지 않은데, 어떤 생각을 가지고 편집을 하셨는지도 궁금해요. 그리고 꼭 넣고 싶었으나 편집 과정에서 넣지 못했던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고: 사실 처음부터 7년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어요. 등산을 할 때도 정상을 쳐다보고 오르다 보면 힘이 들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발만 보고 걸어가요. 제주 해녀 분들의 가장 큰 특징은 탄탄한 공동체 문화에요.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무엇도 절대 할 수가 없죠. 두 마을의 촬영을 처음 기획 하고 2년 정도는 많이 쫓겨났어요. 그러다 보니 자신이 없어졌죠. 그때 대략 5년을 예상했어요. 그래서 송지나 작가님께도 5년 뒤에 가져올 테니 그때 글을 써달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7년뒤에 찾아가니 많이 놀라시더라고요. 드라마 쓰시던 중에 해녀의 모습을 보면서 큰 힘을 얻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버리는 것이 참 힘들었어요. 7년간의 기록이다 보니 압축을 풀지 않고도 20테라 정도의 촬영본이 나왔어요. 그만큼 편집 버전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졌죠. 계절 별, 시간 순서 별, 주인공 별, 상군 별 등등 다양한 버전이 만들어졌어요. 엄청난 분량을 작가님께 드릴 수 없었기에 12시간 편집본을 드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싶다고 했죠. 그리고 버릴 수 밖에 없던 부분이 있었는데, 정말 매력적인 대 상군 86세 할머니가 있었어요. 주변 분들이 그분을 특 왕 계란으로 불렀어요. 대 상군 중에서도 최고인데, 그분이 물질만 잘 하시는 게 아니라 잡은 물건을 제일 못한 분에게 나눠주시고 물질을 해서 아들을 3개 나라에 유학도 보내셨어요. 그만큼 참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셨죠. 자부심이 대단하고 제가 정말 존경했던 분이에요. 그런데 마지막에 아드님이 반대를 하셔서 그 장면을 쓸 수가 없게 됐죠. 그 때가 많이 안타깝고 힘이 들었어요. 


진행: 영화 속에서 해녀 분들이 숨비소리만 들리면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하시잖아요. 제가 보기에 감독님은 숨비소리가 들리면 카메라를 들고 싶다고 할 것 같아요. 계속 찍고 싶다고 하셨는데, 혹시 이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은 의지가 있으신지요.


고: 다큐멘터리 만드는 것은 농사와 똑같아요. 씨를 뿌리고 잘 자라는지 계속 봐야 하고. 다른 다큐멘터리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해녀 이야기는 끝까지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마지막 해녀일 수도 있는 코스모스 언니들과 같이 늙어가면서요. 지금은 욕망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10년 뒤에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황 감독님도 함께 하실 예정이시죠?(웃음)


황: 그때는 나이가 많지 않을까요?(웃음)


고: 해녀 분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한 번 상군은 영원한 상군이에요. 그러니 한 번 감독도 영원한 감독이죠.(웃음)


진행: 팀의 끈끈함을 느낄 수 있네요. 정말 작품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제주에서 시사회 했을 때 감독님께서 어머니를 모셔오신 걸 봤어요. 그때 감독님의 어머니를 보고 영화 속 해녀 분들의 모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해녀 분들과 어머니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 생각했어요.


고: 맞아요. 제주 시사회에 어머니를 초대했어요. 제주에서 촬영을 하면서도 늘 시간에 쫓기다보니 정작 어머니를 만나지는 못했거든요. <물숨> 제작기 책도 나왔는데, 그 책은 어머니에게 바치는 책이에요. 제가 항상 해녀 정신을 계승, 보존해야 한다고 외치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유는 해녀의 정신이 사실 어머니의 정신과 같기 때문이에요. 제주는 옛날부터 척박해서 농사가 잘 안됐거든요. 제주 여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물속으로 들어가 자식들을 건사해왔어요. 제 어머니는 해녀는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들 굶기지는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계세요. 한 인터뷰에서 저에게 해녀는 어떤 의미냐고 물어보셔서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대답했어요. 존경하고 안쓰럽고 연민도 있고 속상하고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 존재에요. 그래서 해녀의 바다는 어머니의 바다라고 생각하죠. 욕심내지 않고 자기 숨만큼 있으면서 가꿔온 자신의 정원. 그 정신이 깃든 바다죠.



진행: 감독님은 섭외의 달인인 것 같아요.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 각본을 쓰신 송지나 작가님과 양방언 음악감독님, 그리고 촬영감독님 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을 섭외한 능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대단한 것은 해녀 분들의 마음을 돌린 것이 아닌가 싶어요.


고: 저희 어머니가 제 점을 봤대요. 돈은 하나도 없는데, 인복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어요. 모두 재능기부를 해주셨어요. 촬영감독님들은 따뜻한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촬영을 했어요.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하면서 터득한 방법이 있어요. 대부분 섭외가 안 되거든요. 범죄자의 가족을 섭외 하기란 참 힘들죠. 일주일씩 집 앞에서 계속 버티고 기다렸죠. 그때의 기다림이 몸에 베어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제가 너무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아보신 것 같아요. 특히 양방언 선생님은 제가 한국에 올 때마다 내내 들렀어요. 음악은 꼭 선생님께서 해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하고 싶어도 스케줄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7년 작업했는데 3년 더 기다릴 수 있다고, 급하지 않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느 날 선생님이 짐을 싸서 편집실로 오셨더라고요. 편집본을 보시고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겠다며 해보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의 곡은 오케스트라를 통해서 연주를 해야하기 때문에 비용이 부담이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다른 곡 할 때 이 곡을 끼워서 연주해 주시겠다 하셨고 그렇게 나온 곡이에요.


진행: 개봉을 준비하면서 또 특별한 인연을 만드신 것 같아요. 김영선 사진작가와 예쁜 해녀 캐리커처를 그려준 스페인 화가도 있었죠. 그분들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고: 스페인 화가는 ‘행복을 그리는 작가’라고 많은 분들이 아실 거에요. 에바 알머슨 작가님이 어느 날 기사로 <물숨>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메일로 보내 드렸죠. 영문자막으로 보내야 하는데, 여기 정태원 팀장님이 한글자막으로 보내셨더라고요.(웃음) 장문의 답장이 왔는데, 한글이었지만 해녀들의 고독, 슬픔, 강인함 다 느낄 수 있었다며 자신이 도울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너무 감사하게 시사회에 참여해서 힘을 실어 주셨죠. 이렇게 보면 제가 맺은 인연이 아니라 <물숨>이라는 작품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해요.


진행: 김영선 사진작가와는 전시회, 동화책을 기획하고 있어요. 해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 들을 수 있으니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고: 오늘 노르웨이에서 온 특별한 친구가 한 명 있어요. 자막이 없어서 불편했을 텐데 어떻게 봤는지 궁금해요. 작년 인천다큐멘터리포트에 피칭을 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관심을 가져 준 고마운 친구에요. 번역이 엉망이라 자신이 해주고 싶다고도 했고 영어 제목도 멋있게 지어줬어요. 


친구: 전에 이 작품을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자막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노르웨이에서 5번은 넘게 본 것 같아요. 이번에 본 것은 이전에 본 것 보다 짧은 버전이지만, 역시나 멋있어요. 인천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촬영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촬영감독님에게 감사한 마음이에요. 저는 변함없는 지지를 할 거에요. 많은 관객들이 보길 바라며 잘 되길 항상 응원합니다.

 

고: 참고로 이탈리아와 스웨덴 공영방송에서 이 영화를 사고 싶다고 요청이 왔어요. 홍콩에도 판매가 됐고 미국과 유럽 15개국과 구체적인 협의가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좋은 반응이라 전 세계에 해녀의 정신과 어머니의 정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또 11월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있는데, 등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해녀의 가치를 먼저 아는 것이에요. 해녀 분들의 바다, 그분들의 가치를 많이 알려주세요.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4,300분정도 남았는데, 제가 촬영하는 동안 120여분이 돌아가셨어요.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로 중요한 힘이 될 것 같아요.


관객: 영화 속 해녀 분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7년이라는 기간의 과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처음엔 섬을 벗어나고자 꿈꾸었지만, 다시 돌아가서 영화를 찍게 되셨잖아요. 감독님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고: ‘숨이 다되면 너의 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나오라’는 해녀 분들의 가르침이 있어요. 그런데도 욕망을 버리는 게 잘 안 되죠. 저의 바다는 아직도 욕망이 출렁이는 것 같아요. 2년 동안 카메라 부수겠다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할 땐 굉장히 괴로웠어요. 내가 주인공으로 삼고자 하는 분들이 저렇게 싫어하시는데, 이건 나의 욕심이 아닌가 싶더라구요. 맨날 혼나고 나가라고 하니 정말 그만 둬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죠. 변명 같지만, 저도 팔순이 되면 욕심을 내려 놓으려고요. 사실 영화를 만들기까지 저의 원동력은 욕망이었어요. 잘 만들어서 그분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욕망이요. 특이한 직업으로만 비춰지던 해녀 분들의 모습을 다르게 바라보고 싶었어요. 며칠 전 욕망을 부리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한 사연이 하나 있었는데, 제주 해녀 7분이 저를 만나러 방송국을 찾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또 혼날까봐 잔뜩 긴장을 했었는데, 그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정말 뭉클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 합리화했어요 ‘욕망하길 잘했다’. 아직은 욕망을 완전히 자르지 못하고 늘 다른 영화를 꿈꿔요. 제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는 바다입니다.


진행: 특히나 촬영감독님께서 해녀 분들에게 카메라를 대는 것이 어려웠을 것 같아요. 


황: 지금까지 다양한 사람을 취재해봤는데, 어려운 건 사실이었죠. 연세가 많고, 여성이고. 복장을 갈아입는 부분에서도 저는 남성이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많았죠. 그런데 점점 훈련이 됐어요. 처음에는 가까이 가지 않아요. 아예 못 찍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얼만큼 가까이 가야 하는지 매 순간순간 갈등해요. 혼나는 것도 두렵지만, 완전히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 어느 순간까지 다가가야 할지 망설이던 부분이 힘들었죠.


진행: 7년의 계절을 겪으셨을 텐데, 감독님께 조금 더 특별했던 순간이 있다면요?


고: 영화에도 나오지만 봄이 가장 바쁘고 예민해요. 저희가 촬영하는 기간 동안 네 분의 해녀 분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바다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늘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바다에서 마지막을 맞을 것을 알고있었죠. 특히 고창석 할머니의 경우 제가 우도에서 처음 뵌 분이에요. 나중에 깨달았지만, 고창석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인사를 하셨어요. 풍랑주의보가 내려지면 며칠씩 배가 끊겨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피신을 해야 해요. 해녀 분들도 물질을 하다가 느끼시면 저희에게 얼른 나가라고 하죠. 어느 날 풍랑주의보가 내릴 것 같아서 급하게 짐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했어요. 우도에 빵집이 없어서 매번 할머니들께 보리빵을 사다 드렸는데, 나가기 전에 할머니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그날은 이상하게 다음에 빵을 사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몇 년을 해왔고 정말 맛있게 드셨는데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그 동안 너무 많이 받았고 정말 고마웠다고 하셨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신 거였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해 봄에 유채꽃과 바다가 왜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그 봄이 저에게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진행: 마지막에 그 이야기를 들이니 가슴이 많이 뭉클하네요. 감독님께서 지금 굉장히 열심히 홍보를 하고 계세요. 여러분도 함께 많이 홍보를 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고: 네, 정말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많이 보여드리고 싶고, 저 또한 풍경으로만 봤던 해녀들의 삶이 많이 알려졌으면 해요. 제주를 있게 한 우리 어머니들의 정신과 그분들이 계셔서 더 특별한 제주 바다 이야기를 많이 퍼뜨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 가장 감사한 것은 고희영 감독이에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것을 끝까지 추진해서 이뤄준 게 고마워요. 이 자리에 못 온 수중촬영 감독 후배들, 그리고 많은 관객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진행: 감독님께서 물질로는 하군이라고 하셨는데, 해녀 분들의 마음을 수확하는 데는 상군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늦은 시간 까지 자리에 남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해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바다로 출근한다. 무덤이 될지도 모르는 곳이지만 그들은 결코 바다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가득히 전해진다. 찬란했던 유채꽃의 향기와 출렁이는 푸른 바다가 유난히 아름다웠던 그 봄을 함께 기억하며, 우리들도 각자의 바다를 찾을 수 있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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